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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희 Sep 27. 2022

지혜일까 이기심일까(톳밥)


시장은 톡 쏘는 사이다 맛이다. 때때로 들를 때마다 청량음료처럼 삶을 강렬하게 자극한다. 시끌벅적 산만한 분위기, 투가리 깨지는 소리마냥 투박한 말투의 대화들, 말괄량이 삐삐의 머리처럼 여기저기 헝클어져 있는 물건들 때문에 시장은 역동적이다.



요즘 마트보다 시장에 가는 일이 잦아졌다. 시장구경하기 좋아하는 남편을 따라 벼룩시장에 다녀온 뒤로 시장의 맛을 안 뒤 부터다. 하지만 시장의 산만함은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쉬이 가늠할 수 없어서 필요한 물건을 찾기가 불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에 자주 가는 이유는 같은 값이라도 마트보다 양이 많기 때문이다. 또 흥정하는 재미와 덤으로 얻어오는 소소한 즐거움도 있다.



봄이 노랗게 농익어가던 5월의 첫 번째 토요일 새벽이었다. 해도 여유를 부리며 천천히 떠오르던 시간에 남편이 벼룩시장에 나가보자고 깨웠다. 늦잠자고 싶은 마음에 죽은 듯이 가만히 있었다. 포기할 줄 알았는데 또 흔들어 깨웠다. 더 이상 누워있기는 글렀다는 생각에 눈에 붙은 잠을 털어내며 느릿한 굼벵이처럼 움직였다. 부스스한 머리를 질끈 묶고 세수도 안한 채 남편을 따라나섰다.






먼동이 트기 시작하면서 동쪽 하늘이 환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남편과 나는 헐렁한 셔츠와 고무줄 바지를 입고 파라솔이 즐비한 벼룩시장 안으로 들어섰다. 한낮엔 시민들의 산책로로 이용되는 길바닥에는 얇은 비닐 조각이 자유 분망한 계집애의 치맛자락처럼 삐뚤빼뚤 펼쳐져 있었다.



비닐 위로 한 묶음씩 내동댕이쳐진 불그죽죽한 당근, 푸르스름한 배추다발과 열무 다발에서는 밭에서 막 캐온 듯한 흙냄새가 났다. 강아지처럼 콧구멍을 벌름거리게 하는 새벽의 신선한 공기, 새벽 공기와 어우러진 흙냄새는 달콤한 장미향에 비할 수 없는 자연의 향수였다. 맞은편 쪽으로 늘어선 생선코너에서는 생선 비린내와 쿰쿰한 건어물 냄새가 전주천의 물비린내와 어깨동무를 하고 종알거리고 있었다.



배추가 수북이 쌓인 곳을 지나 미끈하게 뻗은 무 다발 옆을 지나는데 코가 땅에 닿을 만큼 등이 구부러진 할머니가 시장 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할머니는 오래 입어서 그런지 원래의 색인지 빛바랜 연보라색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하얗게 쇠었는데 쪽을 지어 뒤로 묶었고 구릿빛으로 주름진 얼굴과 손은 잘 마른 곶감처럼 쭈글거렸다.



검정색 대야 위로 뻗은 할머니의 소매 단은 때가 묻어 거뭇하면서도 번들거렸다. 대야 속에 무언가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손가락은 마디가 굵고 휘어져 있었다. 손톱 밑으론 시커먼 때가 끼어서 일부러 검정색 메니큐어를 손톱 끝에 발라놓은 것 같았다. 할머니의 손을 보며 ‘어이구 저런 손으로 어찌 밥을 드실 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야 옆으론 깔고 앉았는지 엉덩이가 닿았는지 하얀 비닐에 덮인 물건이 할머니와 한 몸을 이루고 있었다.



과연 할머니는

‘이 새벽에 무엇을 팔러 나온 것일까?’

집에서 편하게 놀고 지내도 힘들 것 같아 보이는데

‘대체 연세가 어찌 되었기에 저리 허리가 굽었을까?’

안쓰러운 마음으로

“할머니! 이게 뭐예요?”

하고 물었더니 대답을 안 하신다.

귀 조차 들리지 않나보다 싶어서 재차 큰 소리로 물었다.

나를 올려다보며 쌩긋 웃던 할머니는

“이거 오 천 원이야. 마지막 떨이니까 가져가”

라고 하시는 것이 아닌가.



할머니 앞에 놓인 물건의 색깔은 거무튀튀하고 모양은 수많은 작은 벌레들이 한 줄 기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대체 이것이 뭘까?’

하는 궁금증이 가시 질 않아 큰 소리로 다시 물었다.

“할머니! 이게 대체 뭐예요?”

그제야 질문의 내용이 무엇 인지 파악한 할머니는

“이게 톳이여. 톳!”

이라며 벌어진 앞니 사이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나는 남편을 향해 톳을 사자고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아랫집에서 톳 전을 얻어 먹고 맛있었던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검정 대야에 담긴 톳의 양이 내 가늠으로 야박한 듯해서 아쉬운 마음이 들었으나 마지막으로 떨이를 하는 것이라고 하니 우수를 얹어달랄 수도 없고 돈을 더 내고 양을 늘려 구입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쩌겠는가. 그저 세월에 낡아버린 할머니의 모습에 애잔한 마음이 들어 굳이 사지 않아도 될 물건을 사는 것이므로, 그릇에 담긴 톳을 싹싹 긁어서 봉지에 담아주는 할머니의 손에 오천 원을 건넸다.

“할머니! 이제 다 팔렸으니 댁에 들어가셔도 되겠네요.”

라는 말과 함께.

할머니는 겸연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주차장으로 가기 위해 폭 좁은 다리를 건너다가 문득 톳 팔던 할머니가 자리에서 일어섰는지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뒤를 돌아보니 나한테 떨이를 했으니 자리를 털고 일어났어야할 할머니는 그 자리에 아까 그 모습 그대로 구부정하니 앉아있었다. 찬찬히 쳐다보니 자신의 엉덩이 옆에 붙어있던 비닐을 슬그머니 들추더니 톳을 양손으로 한줌 집어 검정 대야에 담았다. 그러고 나서는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도록 비닐을 토닥거리며 다시 덮어두는 것이 아닌가. 내가 바라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아무래도 톳의 양이 너무 적어서 ‘오천 원 어치를 더 사올까?’하다가 나를 보고 염치없어 할 할머니를 생각하며 그만 두었다. 남편에게 할머니의 행동을 말하다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저 순박하게만 보이던 할머니의 속임수에 내가 말려들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약간 어이없어 하는 나를 보며 남편이

“이런 것이 험한 세상을 살아오면서 터득한 방법인가 보네”

라고 말했다.



순간 자꾸 더 달라고 떼쓰는 사람들에게 당하지 않는 장사 법, 내가 팔아야할 물건에 어느 정도의 이익을 내고야 말겠다는 할머니의 장사 법은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이기심이 자아낸 귀여운 속임수라는 생각도 들었다. 지혜일까 이기심일까 저울질을 하면서 이런 귀여운 속임수라면 앞으로도 한 번 아니라 두 번, 세 번쯤은 속아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새벽시장에서 사온 톳을 넣고 밥을 지었다. 검정 비닐봉지에서 꺼낸 톳을 맑은 물에 씻으니 눈으로 볼 때는 미끄덩거릴 것 같았는데 뽀드득뽀드득 흰 눈 밟을 때 나는 소리가 났다. 기다란 줄기에 진한 갈색으로 옹기종기 붙어있는 톳을 일일이 손으로 뜯어내니 송사리 새끼들이 싱크대에서 마구 헤엄치는 것 같았다.

물기를 쪽 뺀 톳을 끓는 물에 데치니 푸릇하게 변했다.



불려놓은 쌀과 톳을 1:1로 넣고 밥을 지었다. 밥솥 안에서 톳은 다시 짙은 갈색으로 변했다. 하얀 쌀밥과 거무튀튀한 톳이 어우러진 톳밥을 양념장에 쓱쓱 비벼 한 수저 크게 떠서 입에 넣었다. 톳밥에서 초록 바다 향이 났다. 바다향 뒤로 애잔한 할머니의 모습이 보이는 듯 했다.









*주먹구구 레시피 <톳밥>


재료: 쌀 2컵, 톳 두 컵, 전복(대) 2개, 들기름, 멸치 다시마 육수 2컵 반, 들기름 1 큰 술


1. 쌀은 미리 불려두고 톳은 소금을 넣고 씻은 다음 끓는 물에 살짝 데쳐준다.

2. 데친 톳은 줄기를 제거해 주고 전복은 손질해서 얇게 잘라준다.

3. 밥 지을 냄비에 들기름을 두르고 전복을 볶다가 불린 쌀이 투명해질 때까지 볶 아 준 다음 톳을 넣는다.

4. 육수를 자작하게 부어주고 센 불에서 밥물이 끓어오르면 약 불에서 10분 정도 지나서 불을 끄고 5분 간 뜸을 들인다. 완성된 톳밥은 달래장에 김을 싸먹으면 맛이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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