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전체주의가 팽배한 문화권이다. 우리와 비슷한 문화권으로 서쪽으로는 중화인민공화국 그리고 동쪽으로는 일본이 있다.
전체주의에는 단합된 의협심이라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개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폐단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해수와 담수가 만나는 곳에 풍부한 어장이 형성되듯이 전체주의의 장점과 단점이 교차하는 곳에서 회식이라는 문화 양식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여러 가지 의미가 파생되고 있다.
우리나라를 예로 들어보자. 한글을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쉽게 이해되는 상황이 바로 우리나라이기 때문에 예시로 삼자는 뜻에 불과하다.
직장에서의 회식은 무엇인가? 바로 사적인 모임 대신에 생계와 직결된 관계에 자신을 쏟아붓는 시간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에서의 회식이 갖는 의미를 본격적으로 고찰하기 이전에 하필이면 인간은 왜 이성의 힘과 작용을 발휘하고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가져야만 한다. 이러한 토론을 통해 공감대를 형성해야만 대화의 기반을 다져나갈 수 있다.
우리가 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 건 바로 우리가 내딛는 발걸음을 지지하는 공고한 지대가 있는 덕분이다. 만일 발을 내딛을 때마다 지반이 수십 미터의 지하로 침하한다면 우리는 옴짝달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인간이 이성의 힘을 발휘하는 것은 우리가 이성이라는 걸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이성을 사용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갖지 못한 것을 얻기 위해 이성적 작용을 애써서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단안에 동의했는가? 동의했다면 우리의 이야기는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다.
언젠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정지될 텐데 그 시점을 모른다면 그 순간이 우리를 찾아오기 전까지의 시간은 일분일초가 더 이상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닐 만큼 소중해질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에게로 온전히 회귀할 수 있는 조건을 마다하고 다시금 사회적 페르소나를 유지하자고 마음을 먹었다면 그만큼의 반대급부를 얻어낼 것이라는 데에 자발적으로 동의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회식은 순전히 경제적이고 생계적인 의사결정이다. 이 순간부터 인간은 반대급부를 고려하게 된다.
이성적 활동은 반드시 보상을 바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불완전한 존재가 꿈꾸는 보상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직장 동료와 선후배들이 한데 모여 살갗이라는 한 뼘의 담을 사이에 두고 술잔을 기울여 가며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다름 아닌 온전한 자리매김이다. 너의 삶은 이러이러해서 인류에게 가치를 부여했다는 사회적 인정이야말로 최고의 부이자 명예인 것이다.
직장 사람들과 피부를 맞대면서 당신은 우리에게 필요한 존재이며 이미 당신은 충분히 노력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는 메시지를 듣게 된다면 회식에 참여한 한 개인이 누릴 수 있는 최대 행복의 근사값이다. 보상을 바라면 그 행위는 이성적인 속성을 띈다고 했다.
그러므로 회식에 참여한다는 것은 인류애적 인간미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지적인 행위인 것이다. 만일 이 점에 관하여 동의한다면 회식자리를 감성적으로 이끌어 갈 생각이나 시도를 하지 않게 된다.
다시 말해서 회식자리에서 감성적 공감대를 쌓으려고 하는 것은 사회라는 테두리에 내포된 의미를 깨닫지 못한 미개인들의 그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회식자리에서는 자아도취에 빠지는 것을 극도로 경계해야만 한다.
회식자리에서 자아도취에 빠진 존재들에게 한 가지 제언을 한다면, 지금보다 초연해집시다라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