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과 일상
Day 2
늦은 아침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커튼 없는 큰 창문 덕분에 늦잠은 포기해야 했다. 1층 난로에 불이 꺼지기 전에 땔감도 넣어야 했기에 새벽동안은 오로라와 땔감 덕분에 선잠을 잤다. 밖을 나가보니 날은 생각보다 따뜻했고 (영하 -6) 1미터 넘게 쌓인 눈들이 햇빛에 반짝이며 눈부셨다. 오늘은 제레미의 사냥을 따라가는 날이다
First things First
화장실로 아침 볼일을 보러 갔다. 영하권에서 엉덩이를 까고 차가운 재래식 변기 위에 앉는 건 생각보다 곤욕스러운 일이다. 호호 입김을 불어가며 어서 마무리를 하기 위해 집중하는 수밖에 없다.
아침을 먹고 어슬렁 거리다 사냥 준비를 시작했다. 어제 탔던 제트스키와 총을 챙기는 제레미.
실탄이 든 총을 처음 보았는데, 생각보다 작은 샷건이다. 정해진 위치에 설치해 둔 덫으로 잡은 뒤 생을 빨리 마감할 수 있도록 총으로 마무리한다고 말해 준다. 동물애호가로서 사냥을 보는 것이 망설여졌지만, 알래스카에서의 생존법을 이해하기 위해 따라나섰다.
굉장히 화창하고 맑은 날씨였다. 제트스키를 타고 숲 속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기다랗게 이어진 송유관이 보였다. 1000km가 넘는 기름을 나르는 파이프 들이다. 그 길이가 부산과 서울 왕복 두 번의 거리 정도가 되니 스케일이 장난이 아니다. 송유관 주변으로는 안전상의 문제로 당연히 총기 사용은 금지되어있다. 송유관을 지나 좀 더 깊은 숲으로 향했다. 제레미가 며칠 전에 설치해 둔 덫을 하나씩 확인하며 이동했다. 총 다섯 군데 정도였는데, 이날은 덫에 아무 동물도 걸리지 않았다. 빈손으로 돌아오면서, 한편으론 실망스러웠고 다른 한편으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오는 길에 제레미와 그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작은 기프트샵에 들렀다. 늑대, 곰, 스라소니 등 동물 가죽과 이빨로 만든 주얼리, 나무껍질로 만든 공예품들이 전시된 아기자기한 공간이었다.
제레미는 독특한 캐릭터만큼이나 능숙한 세일즈맨이기도 했는데 특유의 유머와 매력을 발휘해 가며 가죽으로 만든 옷이나 모자를 입고 사진을 찍으면 10달러를 받고 있었다. 관광객들이 가죽을 입고 사진만 찍고 떠나니 나름의 해결책을 찾은 듯했다.
돌아가는 길에는 이미 잘라둔 커다란 통나무들을 실었다. 이틀째 되니 이제는 오두막 생활도 제법 익숙해졌다. 마지막 밤을 평화롭게 보내며, 불을 지피고 오로라를 볼 수 있기를 기대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Day 3
둘째 날 새벽, 오로라는 또다시 우리를 외면했다. 여행이 거의 끝나가고, 오두막에서의 마지막 밤이라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친구와 나는 고민 끝에 그에게 새로운 제안을 했다. 겨울 동안 손님이 드문 제레미는 우리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우리는 숙소에서 며칠 더 머무는 대신 할인을 받고 집안일을 돕기로 했다. 공예품 제작, 집 정리, 장작 나르기 등 다양한 일을 맡았다.
이날은 개썰매를 탔던 곳에서 만난 제레미의 엄마, 도로시가 오기로 한 날이기도 했다. 제레미와 친구는 밖으로 나무를 하러 갔고, 나는 바닥을 쓸고 약간의 집 정리 후 펀치로 나무껍질을 잘라내 작은 도형들을 만들며 시간을 보냈다. 덩치 큰 아기 같은 도베르만 대니는 제레미가 보이지 않자 종일 창문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내 친구들이 돌아왔고 그다음 도로시도 늦은 오후에 합류했다.
그러고 얼마 있지 않아 제트스키 소리가 들려왔다.
‘부아아아 앙~~’
방문객이 없던 제레미는 무슨 일인지 확인하러 바로 밖으로 튀어 나갔다. 옆 인디언 마을에서 온 손님이었다. 사실 옆 인디언마을에는 많은 사건 사고들이 있으니 그 마을로는 가지 말 것을 당부했었기 때문에 불청객의 방문에 모두들 긴장을 했었다. 자신이 타고 온 제트스키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았는데 한 참을 밖에서 제레미와 이야기하더니 손을 흔들며 이내 시선에서 사라졌다.
긴장감이 사라지고 도로시와 식사를 만들어 다 같이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친 후,
자연스럽게 거실에 둘러앉아 가죽을 재단하고 공예품을 만들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레미는 자신이 정직하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임에도 왜 아직도 결혼을 못했는지
그리고 옆마을 누구는 술주정꾼에 놈팽이인데 이미 이쁜 마누라가 있다며 인생 한탄을 하곤 했다.
‘아... 제레미야...
넌 분명히 일도 열심히 하고 착한 건 알겠어...
너의 진심과 유머감각. 정말 전부 너무 다 좋은데...
아무리 겨울이라도 조금은 씻고 다니면 여자들도 좋아하지 않을까...‘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 올랐지만 내가 뭐라고 그에게 왈가왈부할 수 있겠는가.
분명 제레미 너에게도 좋은 인연이 있을 거라고 토닥거리며 저녁은 깊어갔다.
( 진심 어린 마음이었다.)
제레미와 도로시는 사냥으로 잡은 동물 가죽을 가공하고 여러 동물의 이를 뽑아 장식품들과 주얼리들을 제작해서 기프트 샵에서 팔고 있었는데 이날 역시 말린 가죽을 가공하기 위해 모인 날이었다.
인상적이었던 건 도로시가 직접 만든 나무껍질을 이용한 쓰레기통이나 다용도 바구니들이었는데 인디언 전통적 방식의 공예품이라고 설명해 준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녀는 그림을 한 번도 배우지 않았지만 본인만의 감성으로 그려낸 주변의 동물, 풍경이나 기억들이 담긴 작은 그림들을 그리기도 했었는데 내가 그림을 전공했다고 하니 도로시는 신이 나서 그림들을 꺼내어 보이며 설명을 해 주었다. 영화 ‘내 사랑’에 나오는 모드 루이스의 다른 버전이랄까. 오랜만에 느껴보는 순수하고 소박하지만 거짓이 없는 그림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고 자신이 만든 드레스를 입고 결혼한 딸 사진 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늦은 밤을 함께 보냈다.
이윽고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자 다시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알래스카에 온 지 10일이 훨씬 넘었는데 한 번도 보지 못한 오로라에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얘기하니 도로시가 올해(당시 2019년)는 유난히 날이 따뜻해서 보이지 않았을 거라며 이야기를 해 주었다.
하지만 그날 밤의 온도는 이미 -30도 이하를 가리키고 있었는데 얼마나 추워야 알래스카 주민들은 춥다고 느끼는 걸까.... 그런데 꼭 날이 추워야 오로라가 잘 보이는 건가? 꼭 그렇지는 않다. 오로라가 잘 보이는 것은 기온보다는 하늘의 상태와 관련이 있는데 추운 날씨가 오로라 관측에 좋은 조건을 제공할 수는 있지만, 오로라의 발생 자체는 태양 활동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꼭 추워야 잘 보이는 건 아니다. 그저 내가 방문한 때가 운이 좋지 않았던 것뿐...... 하지만 사람일은 모르는 일.
잠자리 들기 전 다시 한번 오로라를 보길 기대하며 난로에 나무를 가득 넣고 2층 잠자리에 들었다.
오늘밤은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