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 뒷 이야기
내가 하는 대부분의 작업은 식물을 주로 다루고 있는데, 그 밑바탕엔 보이지 않는 수많은 삽질이 자리 잡고 있다. 작업을 위해 밭에서 삽질을 하는 이런 삶에 가끔 현타가 깊게 오기도 하지만 어쩌겠는가. 누가 시킨 것도 아닌 자발적 노동, 그 속에서 나만의 길을 찾는 것은 나의 몫이다.
그 자발적 노동 중 가장 힘든 부분이 식물 준비 과정에서 온다. 원예를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원예란 사실 삽질, 곡괭이질, 호미질이 어우러진 예술이자 육체노동이라는 것을.
전시작품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식물이 포함된 작품을 만들기로 결정된 순간부터 나는 긴 여정을 시작한다. 작품에 심어진 식물이 자연스럽게 자라나기 위해, 때로는 세 달 전에 시작해 미리 발아를 준비하거나 채집을 다닌다. 이 모든 것이 작품의 완성을 향한 여정의 일부다. 오늘은 그 과정 중 일부를 살짝 공개해 보겠다.
전시 전 식물을 준비하는 방법은 '발아'와 '채집'으로 이루어지며 이 두 가지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발아
흙속에는 이미 많은 종류의 야생 씨앗이 숨어 있다. 야외의 밭에서 채집된 흙을 준비된 그릇에 담아 물 관리만 잘해주면 일주일 뒤부터 발아를 시작한다. 한 곳에서 채집된 흙에서는 같은 종류가 자라날 가망성이 크므로 되도록이면 이곳저곳에서 흙을 채집하여 섞은 후 관리를 들어간다. 흙에서 직접 발아하기도 하지만 관리하는 동안 바람에 날려 싹을 틔우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전시를 준비할 경우는 시간이 꽤 걸리기 때문에 넉넉하게 시간이 확보된 전시 때 준비하는 방법이다.
채집
준비된 그릇에서 발아가 더디거나 성장속도가 느린 경우, 그리고 전시 준비 기간이 짧은 경우에는 직접 식물을 채집을 한다. 채집을 할 대상은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있는데 대게 화단이나 밭에 인의적으로 식재하여 키우는 식물이 아닌 것만 채집을 하게 된다. 주변에 경작하시는 분들께 양해를 구해 밭에서 나는 망초, 민들레, 바랭이, 깨풀, 냉이 등등을 채집한다. 화원에서 이윤을 남기기 위해 판매되는 꽃들은 나의 작업 목적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해당사항이 못된다. 큰 작업실이 지어진 후로는 주로 작업장에서 자라고 있는 야생화들을 채집해 그릇으로 담은 후 10일 정도의 안정기를 거친 다음 전시장으로 이동한다.
대부분의 전시장 환경은 건조하고 어두우며 바람이 잘 통하지 않는 공간이 대부분이다. 식물이 자라나기에 아주 취약한 공간이다. 그러다 보니 식물 설치 시에는 굉장히 많은 관리와 신경을 써야 하는 부분들이 많이 있다.
전시공간에서 물 주기
환기가 잘 되지 않는 실내에서의 물관리는 쉽지가 않다.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의 실내 전시장에서는 1~3일 간격으로 물을 줘야 했으며 물이 고이지 않을 정도, 흙이 촉촉할 정도로만 물을 줘야 한다. 아무래도 살아있는 생물이다 보니 관리자의 능력에 따라 식물의 상태가 많이 좌지우지되는 편인데 어떤 공간은 물 관리를 하지 않아 바짝 말리기도 하고 어떤 곳에서는 물을 너무 많이 줘서 벌레도 꼬이고 식물뿌리가 썩어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때그때 상황에 맞혀 대처하는 요령이 필요하다.
밝기
대체로 전시장의 조도는 많이 어두운 편이다.
그래서 식물이 설치되는 작품에는 식물이 자랄 수 있는 식물재배등을 따로 설치한다.
공간마다 콘센트가 있는 위치가 다르므로 매번 작품이 설치될 때마다 조명등의 전선을 재배치해야 하는데 이게 만만치 않은 노동과 시간이 걸린다.
환기
작품에 직접적인 환기 시스템이 없기 때문에 따로 써큘레이터나 선풍기를 작품과 함께 설치해 식물 주변 공기를 환기시키는 방법을 사용 중이다.
작품이 설치되고 나면, 나는 늘 꼼꼼한 작품 매뉴얼을 작성해 식물이 무사히 전시 기간을 견뎌내길 바라며 공간 측에 전달한다. 하지만 공간의 제약은 예상보다 크고, 식물은 그 환경에서 쉽게 지쳐버린다. 아무리 잘 관리한다고 해도 빛 하나 없는 답답한 실내에서 식물이 버티기란 쉽지 않아 전시 중간에 식물은 자주 교체가 된다. 식물이 견디지 못하고 자주 교체되는 작업에 내 마음도 무거워진다. 마치 끝없이 반복되는 삽질처럼, 소모적인 싸움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모든 것이 나의 욕심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 작품이 빛나기 위해, 그 과정에서 식물들은 끊임없이 희생된다. 어차피 뿌리 뽑혀 죽을 운명이면 전시장에 비치되어 다른 목적으로 살아가다 사라지는 건 괜찮은 것일까. 이 아이러니 속에서 나는 갈등한다. 예술을 위한 삽질이 이토록 소모적이라면, 과연 이 길이 옳은 것인지.
그러다 보니 최근에는 작업의 방향성에 변화를 주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새로운 방식으로 예술적 고민과 사유의 공간에서 땅을 파고 있다. 이렇듯 삽질은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끝없는 질문과 그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전시를 준비하던 나에게 아버지가 물으셨다. "너, 전시 준비하는 동안 하루 일당은 얼마나 되냐?"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평소 별생각 없이 해오던 작업에 대해 "일당"이라는 개념을 떠올려 본 적이 없었다. 일반적으로 평범한 회사원이나 하루 일용직 노동자분들과 같이 일을 하시는 분은 시간과 노동을 돈으로 환산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작업을 하는 예술가의 일당이라니. 그 질문은 참 냉정하면서도 현실적이었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문제에 허를 찔린 기분이랄까.
내게 예술은 돈이 목적이 아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질문은 내가 애써 외면했던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만들었다. 현실은 차갑고, 돈은 필요하며, 삶은 그것을 요구한다. 예술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건 어렵다. 슬프지만, 나를 포함해 대부분의 작가들은 본업이 아닌 부업으로 생계를 이어간다. 그러다 보니 나는 가끔 우스갯소리로 이렇게 말하곤 한다. "작업은 비싼 취미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느낌이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다고 해서 그 물이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 물은 독을 지나 땅속으로 스며들고, 그 땅은 언젠가 싹을 틔워 열매를 맺을지도 모른다. 이게 바로 예술이 아닐까? 겉으로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 과정 속에서 무언가가 자라고 있는 것.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삽질, 이 삽질이야말로 예술가의 숙명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