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은 돈 탈탈 털어 산 땅 위에 건물을 세웠을 때, 인테리어나 난방 시스템은 꿈도 꾸지 못했다. 혼자서 넓은 공간에 에어컨과 난방을 돌리는 건 낭비라고 생각해 여름엔 문을 활짝 열고, 겨울엔 핫팩을 붙이고 작업을 이어갔다. 여름엔 창과 문을 활짝 열면 자연스럽게 온갖 벌레, 새, 개구리들이 초대받지 않은 손님처럼 찾아왔다. 심지어 출구를 못 찾아 작업장 안에서 목숨을 잃은 새와 개구리를 치운 적도 여러 번이다. 한 번은 작은 새를 사냥한 커다란 매가 들어와 날 무섭게 쏘아보던 기억이 난다. 이때는 날카로운 발톱에 눈알이나 머리채가 뽑힐까 무섭기도 했지만 사냥감을 움켜쥐고 두리번거리던 녀석을 창문으로 유인해 겨우 내 보내었다. 새들은 실내로 들어오면 나가는 방향을 찾는 게 쉽지 않은 모양이다.
방충망을 달자니 거대한 창고문에 맞는 사이즈가 없고, 맞춤 제작은 어마어마한 비용이 들어서 올해는 그냥 문을 닫고 작업을 해 보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작업실의 온도는 늘 35도를 웃돌았고 여름 낮의 작업실을 출근한다는 건 땀복으로 갈아입고 사우나를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루에 물을 3리터는 마셔야 하고, 빨래는 산더미처럼 쌓여가니, 결국 밤에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는 생활이 되었다. 물론, 밤에도 실내 온도는 30도를 넘었지만 말이다.
겨울의 작업실 출근시간은 반대다. 등유 난로를 돌려도 크게 차이가 없어서 해가 떠 있는 낮에 출근해 저녁이 되기 전에 퇴근을 한다. 그러다 보니 봄과 가을이 종일 작업실에 있기 가장 적합한 온도의 계절인 것이다. 손님이 온다고 하면 언제나 “봄이나 가을이 딱 좋습니다”라고 살짝 언질을 주곤 했다. 나야 힘든 걸 자처한 거지만, 방문하는 손님들은 그렇게 배려를 해야 하는 게 나름의 예의라고 생각했다. 불편함이 아직 많은 볼 것 없는 작은 시골 작업실까지 몇 번이고 방문해 준 친구들과 동료들을 생각하면 고마운 마음이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렇게 몇 년을 버티다가 작년 초, 복층에 냉난방이 가능한 시스템 에어컨이 드디어 하나 들어왔다. 나이가 들다 보니 추위는 더 이상 이겨낼 수 있는 대상이 아니게 된 것이다. 큰 공간을 다 커버할 수 없는 용량이라 복층의 뚫린 공간을 스크린롤로 마감을 했다. 물론 돈이 없어 샷시를 달지 못한 이유지만 나름 만족스럽게 복층에서 시원하고 따뜻하게 작업을 할 수 있게 됐다.
그렇다면 작업의 ‘온도’는 어떨까?
사실 작업의 진도는 전에 작업실과 비교해 크게 진전이 없다는 것에서 스스로가 부끄럽다.
물론 새 공간에서 많은 새 작품을 제작했고 제작 중이지만 뭔가 이 큰 공간을 혼자 쓸 만큼의 수준이나 되는지 의문스럽기 그지없다. 아무도 주지 않는 눈치를 스스로가 먹는 기분이랄까. 겁은 없지만 소심한 성격 탓에 작업 중엔 늘 큰 숙제를 안고 있는 기분이 들곤 한다. 멋진 공간이니 더 좋은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감이랄까...
막상 작업을 할 때면 그 추위와 더위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떻게 마무리를 하고 어떤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해야 하는지 늘 계획하고 혼자서 고궁분투 하다 보면 가끔 추운 건지 더운 건지 모를 때도 많다. 시골작업실의 가장 큰 단점이라면 주변에 작가친구들의 도움이나 의견이 절실할 때가 있는데 산골에 혼자 처박혀 작업을 하다 보면 늘 이런 부분은 크게 아쉬운 부분이다.
예전엔 작업을 위해선 무조건 서울을 올라가야만 할 것 같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마음이 변했다. 필요한 건 모두 인터넷으로 구입을 하고 중요 전시가 열리는 곳은 올라가 관람 후 다시 시골로 오는 생활을 반복 중이다. 문화생활 전반이 서울에 집중되다 보니 작업하는 사람들 간의 네트워크도 물론 큰 도시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하지만 모든 이에게 좋다고 나에게도 그게 최선일까.
4년 넘게 뉴욕에서 유학했지만, 나는 어떤 소셜 네트워크도 만들지 못한 채 학교와 집만 오가던 '범생이'였다. 그런 내가 서울로 올라간다고 딱히 나에게 길이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걸 난 어렴풋이 알 고 있었다. 운이 좋게도 귀국 후 얼마되지 않아 큰 미술관 전시에 초대가 되었고 그 후로는 내가 어디서 사느냐는 중요하지 않다는 걸 깨달은 후 서울로 올라가고자 하는 마음은 완전 접어둔 채, 이곳에 작업실을 마련하게 되었다.
가끔 동료작가들과 얘기할 때 미술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들어보면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인 것 같아 낯설기도 하고 별 할 말도 없어서 괸시리 멋쩍어진다. 하지만 아웃사이더처럼 한 발짝 떨어져 있다 보니 그만큼 구설수에 휘말릴 일도 적고 사람과 부딪히는 스트레스도 적어서 이래저래 난 촌구석 작가가 제격인 것 같다.
서울이든 지방이든 간에 좋은 작품을 많이 만들어야 하는 스스로의 숙제만 있을 뿐. 추우면서 더운 이 공간에서 열정적인 작품을 만드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일 것이다.
평소 때의 작업실 생활은 늘 노동과 작업을 동반한다. 첫 1,2년은 작업보다는 작업실공간 수리에 모든 힘을 쏟아부은 듯하다. 벽면 페인트칠, 테이블과 수납공간 만들기 및 정리, 복층공사가 이어지며 또다시 페인트칠과 바닥합판공사, 바닥마감재, 그리고 숙소공간과 화장실, 15평 정도의 텃밭까지. 그리고 본가의 좁은 마당에 있던 수많은 나무들과 꽃을 작업실 마당으로 옮겨와 심고 화단을 만들며 정리하다 보니 1~2년이라는 시간이 후딱 지나가 버렸다. 근사한 작업실이 생겼는데 작업하는 시간이 느는 게 아니라 작업실 관련 일에 매달려 본업을 못했다는 이 아이러니... 마치 십 대 시절 독서실에 공부하러 갔는데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고 필통정리와 책상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피곤해져 잠들기 십상이던 시절이 떠 오른다. 하지만 지금의 난 적당하게 현실과 타협하고 적절함을 유지하는 연륜을 가진 중년이 되었다.
돌아서면 일이 생기는 집안일처럼 작업실의 끝없는 노동시간을 1시간에서 최대 2~3시간으로만 단축시키고 나머지는 작업을 하는 시간으로 나누어 사용을 하니 노동으로 버무려졌었던 하루의 일과가 체계적인 루틴으로 조금씩 바꿔며 좀 더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이 모든 과정이 쌓여 내 작업실과 작품이 함께 성장해 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여전히 완벽하지 않지만, 조금씩 변화하고 나아가는 내 일상은 그 자체로도 만족스럽다. 비효율적인 난방과 끊임없는 불청객들, 때때로 찾아오는 의구심 속에서 그런 고생이야말로 내가 선택한 예술의 일부가 되어 버린 지금, 나는 오늘도 이곳에서 작은 불편을 예술로 바꾸며, 묵묵히 내 길을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