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내 작업실은 본가에서 차로 7분 거리의 작은 시골 마을에 있다. 내가 사는 이곳은 군 단위의 조그마한 동네인데 읍에서 면으로, 그러니까 시골에서 좀 더 시골로 더 들어가게 된 거다. 작업장을 옮기면서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시골 인심'이라는 말은 옛말이 된 지 오래인 듯, 동네의 텃세는 정말 만만치 않았다. 물론 하기 나름이라는 주변 분들의 의견들이 있었지만 초반에 동네를 들어가는 것조차 달가워하지 않았던 동네분들의 얼굴들이 하나 둘 스쳐 지나가면 아직까지도 마음이 불편한 건 사실이다. 떡도 돌리고 마주치면 넉살 좋게 인사도 건넸지만 나는 늘 이 동네의 이방인 같은 존재로 남아 있다.
이 동네는 'ㅇ씨촌'이라 불리는 마을로 대부분의 주민이 ㅇ씨 집안이라 서로 친척관계로 얽혀 있었다. 그들 사이에 나 혼자 외지인으로 끼어든 셈이다. 나는 겨우 모은 돈으로 야산 일부를 사고, 그곳에 작업실을 지었는데, 문제는 그 야산 뒤편으로 줄줄이 늘어선 ㅇ씨 가문의 선조 무덤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무덤 앞에 작업실이 들어서니 마을 사람들 눈에 썩 좋게 보일 리 없었다. 결국 전망을 가린다는 후손들의 의견을 반영해 건물 위치를 몇 번이나 수정한 끝에 간신히 작업실을 올릴 수 있었다.
솔직히 처음엔 억울했다. 내가 정당하게 산 땅인데 왜 이렇게 난리인지, 이럴 거면 애초에 자기네가 사서 지키지 그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법에 의거한 묘까지의 거리보다 세배 이상의 거리를 두고 충분한 공간을 확보하는 배려를 했지만 목소리들이 대단하셨다. ㅇ씨 후손들이나 동네분들의 마음은 이해했다. 조용한 동네에 시끄러운 공사소음과 큰 대형차량들이 일으키는 먼지들이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었을 것이다. 공사 중에 난입하여 진로방해를 해서 공사가 멈춘 것도 여러 번이었다. 많은 도시 사람들이 시골에서의 로망을 꿈꾸며 귀촌을 하지만 동네의 텃세에 못 이겨 결국 이사를 하게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다. 결국 이 모든 게 조용해진 건 마을 발전기금이라는 명목의 '성의 표시' 덕분이었으니, 씁쓸하긴 했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작업실을 짓고 나서 ‘집은 세 번 지어야 마음에 든다’는 말을 절감하게 됐다. 전기며 배관이며, 초보 건물주에게는 하나같이 어려운 문제들이었다. 시공업체의 조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그 덕에 수많은 개선과 보수가 뒤따랐다. 게다가 비가 새는 부실공사까지 발견했으니, 정신없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건물은 건물대로 동네는 동네대로 참으로 시끄러운 삶의 몇 년을 보내고 이제는 제법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처음에는 대문조차 없었기 때문에, 공사 중에도, 공사가 끝나고 혼자 작업하는 와중에도 마을 사람들은 불쑥불쑥 들어왔다. 마을 주민들이야 호기심에 그랬겠지만, 그래도 개인 공간에 허락 없이 들어오는 건 불쾌하기도 했거니와 안전하지 못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대문 없이 일 년 가까운 몇 개월을 보내고 학교에 강의 나가는 돈과 전시를 하며 모은 돈을 차곡차곡 모아 휀스와 대문을 달기 시작했다. 그렇다. 돈이 모일 때마다 한 군데씩 고치고, 공사하고… 그 과정에서 손재주 덕에 많은 걸 스스로 해결했다. 그렇다 보니 작업실에서 작업하는 시간보다 노동을 하는 시간이 훨씬 많아졌다. 이제는 요령도 생겨 하루 2~3시간은 수리나 작업실 보수 작업을 하고, 나머지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어느새 나름의 균형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해마다 찾아오는 ‘칡과의 전쟁’도 이젠 일상이 됐다. 아무리 자르고 약을 뿌려도 스멀스멀 다시 올라오는 칡을 보면, 새삼 그 끈질긴 생명력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동네분들과도 더 이상의 소란이 없이 조용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사실 동네는 조용한 할머니들이 대부분이시고 몇몇의 남자 청년회가 그 소란을 일으킨 것으로 한참 지난 후에 알게 되었다. 하지만 2년 전에 바뀐 젊은 이장님의 덕분에 작업실 앞에는 밝은 가로등도 생겼고 벌초시즌이 되면 동네분이 작업실 외곽의 주변 풀 정리도 함께 도와주셨다. 동네 개가 작업장으로 들어와 똥을 여러 번 싸질러도 이젠 마음이 평온하다. 마침내 평화가 찾아온 것이다.
삶은 모든 걸 다 내 뜻대로 할 수는 없다는 것. 때로는 아무리 잘라내고 막아도 다시 자라는 것들이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게 중요하다. 시골 생활도, 내 작업실도 마찬가지다. 매번 새로운 문제들이 생겨도 그걸 다듬고 다시 세우는 과정에서 내 공간은 점점 더 나다워지고 있다. 칡처럼 질긴 인생의 문제들 속에서 난 오늘도 웃으며 또 한 번 머리를 질끈 묶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