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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광 Aug 25. 2024

로또에 당첨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100가지 일들

30. 마이너스 축의금



30. 마이너스 축의금



* 29화와 동일한 등장인물입니다.


"다인씨, 우리 4시 반 출발이야."

"네? 5시라면서요?"

"혹시 차가 막힐 수도 있으니 30분 일찍 가자고 하던데."

"아, 진짜 가기 싫다."

"그리고 선미씨도 내 차 타고 가야 할 거 같은데, 미안해서 어떡하지? 내 차가 작아. 그러니까 다들 이해해 줘. 선미씨 내가 미리 사과해. 미안해."


일찍 가야 한다는 말에 고개를 푹 숙였던 다인이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오늘 선미씨도 가요? 왜? 왜 선미씨까지 가?"

"그게 아까 점심 먹을 때 류부장이 챙기더라고. 아이고 그러니까 선미씨 오늘은 우리 4시 반에 업무 종료하면 돼요."

"아, 진짜 너무한다!"


선미는 무슨 상황인지 알지도 못한 채 사수인 다인언니와 상사인 염상호 팀장님  사이에서 자신의 이름이 언급되는 걸 듣고만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생겼길래 다인 언니는 저토록 투덜거리는 것이며 염팀장님은 자신의 작은 차에 태우게 되어 미안하다고 서툰 미소로 사과까지 하는 걸까.


"이런, 맞다. 선미씨는 모르겠구나."

"염팀장님은 선미씨가 어떻게 알겠어요? 선미씨 지금 입사한 지 3일째라고요. 저도 말 안 해줬고."


선미는 무슨 안 좋은 일인가 싶어 긴장이 되었다.


"저기... 오늘 회사에 무슨 일 있어요?"

"다인씨 그렇게 인상 쓰면서 이야기하니까 선미씨가 긴장하잖아. 별 일은 아니고 아니 별 일이라고 해야 하나?"

"오늘이 공이사님 결혼식이야. 공덕동 J선호텔, 6시."

"아... 네... 공이사님... 결혼식... 어?! 오늘 금요일인데 특이하게 평일에 하시네요."

"관종이야. 공이사 그 인간이 관종이라서 그래. 자기가 되게 힙한 줄 안다니까. 말 들어보니까 주말에 할 수도 있었는데 일부러 오늘 하는 거더라. 아니 류부장님도 그래. 지가 결혼해? 왜 자기까지 반차까지 쓰고 쫓아가는 건데."

"두 사람 평소에 형, 동생 엄청 챙기는 사이잖아. 이런 날인데 다인씨가 그러려니 해 줘."

"맨날 그러려니 해 주지. 언제는 뭐 안 그러려니 해 줘요, 제가?"


선미는 공이사를 제대로 본 적이 없다. 처음 회사 면접을 보러 왔던 날, 정확하게는 전 전 회사에서 함께 작업했던 미술팀의 정경호 팀장님을 통해 포트폴리오와 이력서를 보내고 합격 연락을 받은 후 면접 같은 인사를 하러 왔던 날 가볍게 인사를 나누긴 했다. 자기를 영상제작 사업부 이사라고 소개했던 공진 이사.


"이름이 권선미... 씨? 반갑습니다. 영상 제작 총괄 맡고 있는 공진이예요. 정팀장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애니메이션 업계에서도 소문이 자자했다고. 일도 잘하고 성실한 육각형 인재. 우리 앞으로 재밌는 작업 많이 해봐요. 곧 알겠지만 우리가 게임만 하진 않을 거거든요."


첫인상은 좋았다. 그는 다소 고지식한 이사라는 직함을 달고 있었으나 옷차림은 캐주얼했다. 선미가 평소 선호하는 스타일이다. 빈티지한 레귤러 핏의 피그먼트 가먼츠 워싱 된 애쉬그린 티셔츠에 아메카지 스타일의 다크 브라운 카고 팬츠를 입고 있었다. 적당한 톤온톤 조합이 꽤나 센스 있어 보였고 그래서 고루한 꼰대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인사하는 목소리에서도 권위 의식이 느껴지지 않았고. 다만 신발은 살짝 튀었다. 왼발엔 아마존 그린색 컨버스를 신고 오른발엔 스노클 블루색의 컨버스를 짝짝이로 신고 있었다. 그게 다분히 의도된 착장이었는지 궁금했던 때 옆자리 사수인 다인에게 막 첫인사를 하려던 참이었고 덕분에 다인의 작은 혼잣말을 들을 수 있었다.


"저 관종, 관종. 씨인~발(신발) 봐~라."


그게 다였다. 공이사는 다음 날 딱 점심시간에 요란하게 출근했다가 오후에 인사도 없이 사라졌고 또 그다음 날엔 점심시간 좀 전에 출근해서 밥만 먹고 사라졌다. 그리고 선미가 출근한 지 3일째 되는 오늘은 아예 출근을 안 했다. 선미는 단순히 그가 외부 업무로 바쁜 거라고만 생각했다. 또 그를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새로운 회사의 서버 라인이 이전 회사와 달라 적응하는데 집중해야 했고 인하우스툴도 빠르게 익혀야 했다. 다행히 거칠어 보였던 두 살 위 다인이 의외로 친절하게 이것저것 챙겨주어 크게 걱정할 일은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바짝 든 긴장이 쉬이 가시진 않았다. 입사 초기엔 항상 이렇다. 그래서 이사님이 보이지 않아도 그러려니 했는데 오늘이 그분 결혼식이라니.


"그러면 공이사님은 결혼을 이제 하시는 거예요? 연세가 어떻게 되시길래? 저는 한 오십쯤 되신 줄 알았거든요."

"어머, 선미씨 공이사님 앞에서 연세라는 말 쓰고 그러면 안돼. 크크크크. 그리고 그 양반 오십도 아니야. 그보단 훨씬 젊은데. 어머 어떻게 큰 일 났다. 공이사 꼰대 아닌 척 혼자 하더니 결국 티가 나는구나."

"진짜요? 저는 오십쯤 되시는 분이 엄청 젊게 사시나 보다 했는데 왜 그랬지? 저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선미는 무언가 잘못짚었다며 자책했고 다인은 웃음보가 터졌다. 공이사의 나이는 평소 본인이 서른셋으로 보일 것이라고 호언장담하고 다니는 마흔셋이다.


"다인씨 선미씨 그건 아니다. 결혼은 언제라도 때 되면 하는 거지. 나이 가지고 그러는 거 아니야. 우리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말하지는 말자."

"염팀장님은 누가 그걸 몰라서 그래요. 그 관종 이사가 회사 창립기념일보다 더 요란을 떨어대니까 그렇죠."

"다인씨 할 수 있으면 하고 싶은데로 하는 거지. 다 돈 있고 능력 있어서 그러는 거잖아. 그거 다 하나하나 걸고넘어지면 우리 같은 사람들은 피곤해서 못 살아. 돈 없고 빽 없는 우리는 그냥 그러려니 하자고 각자 할 일만 열심히 하면서."

"보살, 보살. 염보살. 나라에서 쓸데없는 열녀문 말고 보살문 같은 거 세워준다고 하면 내가 염팀장님 제일 먼저 추천해 줄 거야. 진짜 국보급. 국보 보살 일 호 염보살."


4시 30분은 금방 됐고 양재동 벤츠매장 골목 안 쪽에 위치한 5층짜리 건물의 3층, 4층, 5층 모든 사람들이 건물 밖으로 나왔다.


"그래도... 다인 언니, 염팀장님 저 호텔 결혼식은 처음 가 봐요. 좀 떨린다."


안 그러려고 했는데 선미는 J선 호텔로 넘어오는 염팀장님의 차 안에서 깜빡 잠이 들었다. 그만큼 염팀장님이 운전을 잘해주었고 또 도로상황도 나쁘지 않아 30분 남짓 만에 호텔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기 우리 자리다. 참 선미씨 있다가 정팀장님도 온다고 했어. 우리 이틀 만에 정팀장님 또 본다. 웃기지?"

"정팀장님이요? 진짜요?"


정경호 미술팀장님. 그는 이틀 전 퇴사했다. 선미는 정경호 팀장님과 다시 일하게 된다고 생각했을 때 내심 큰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는 선미가 살아오면서 몇 명 못 본 찐 능력자였다. 가끔은 그의 그림 그리는 능력이 초능력 같은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만큼 그림을 잘 그렸다. 정확한 퍼스펙티브, 그가 그리는 그림은 구조적으로 어긋남이 없었다. 그렇다고 단순히 테크닉적인 데생력만 뛰어난 게 아니었다. 보통은 징그러울만치 구조적으로 맞아떨어지면 몰개성에 감정 없는 스케치처럼 보이기가 쉬운데 그의 그림엔 아름다운 유머가 있었다. 또 눈 속 아니 머릿속에 렌즈가 들어 있는 사람처럼 같은 장면이라도 35mm 이하 광각 렌즈부터 70mm 이상 망원렌즈까지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화면의 왜곡까지 정확히 구사하곤 했다. 선미는 그의 스케치를 애니메이션으로 움직일 수 있는 일이 영광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래서 그가 그의 회사 입사제의를 했을 때 크게 기뻐했었는데... 그는 선미가 입사 인사를 한 다음 날 퇴사 인사를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나저나 염보살님, 아니 팀장님. 이 자리에선 신랑, 신부 발 밖에 안 보이겠네요."


선미도 다인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식장은 TV속 유명 연예인들이 식을 올리는 화려하고 으리으리한 장소였다. 칠흑 같은 어두운 밤색 천장은 높이가 3층쯤 돼 보였고 아래로 작은 LED전구가 거의 한 층높이를 채우고 있었는데 하나하나 별처럼 반짝이는 것이 마치 디즈니 동화 속 은하수 같았다. 여기저기 각 테이블엔 엄청나게 고급스러운 생화장식이 놓여 있었는데 모든 꽃송이가 막 꺾어온 것처럼 크고 싱싱했다. 바닥카펫은 얼마나 두툼한지 수많은 인원이 들락날락거리는데도 발소리가 조용하고 접시 위에는 오늘 먹을 음식을 순서대로 알려주는 안내문이 놓여 있었다. 테이블 식기는 어찌나 비싸 보이는지. 결혼식은 뷔페 결혼식만 다녀 본 선미로서는 모든 게 신기해 보였다. 그리고 버진 로드. 오늘의 주인공 신랑 신부가 걷는 길의 높이가 테이블 높이보다도 높아 보였다.


"그럼 사회는 류부장님이 보시는 거예요?"


선미가 물었다.


"아, 사회? 사회를 류부장이? 아니야. 무슨 연예인이 본다던데. 우리 대표팀이랑 친한 무슨 예능 진행하는 개그맨이 본다고 했었어."

"류부장님이 안 보세요? 저는 류부장님도 일찍 안 보이셨던 것 같길래 사회를 류부장님이 보는 건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었구나."

"선미씨 눈에도 둘이 친해 보여?"

"아, 아니요. 그러니까... 음, 네. 저는 잘 모르죠. 모르긴 한데 그냥 얼핏 보니까 어제오늘뿐이지만 류부장님이 공이사님 칭찬을 많이 했던 것 같아서요. 좋은 형이자 대학교 선배라고. 그러고 보면 부장님이 공이사님 이야기만 했던 것 같기도 한데."

"그치, 둘이 참 더럽게 챙기지. 류부장이 따까리긴 하지만. 뭐 지가 따까린지도 모르고."


씁쓸하게 두 사람의 관계를 읊조리던 다인이 갑자기 어색하고 큰 미소를 지었다. 류부장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다인씨, 선미씨, 염팀장님 다들 여기 있었구나. 오면서 먼저 연락하지. 내가 신랑 신부 잘 보이는 테이블로 잡을 수 있었는데."


선미는 잠깐 눈을 질끈 감았다. 류부장이 반짝이는 은갈치 슈트 차림에 머리는 올빽으로 넘기고 세 사람에게 아는 척을 했기 때문이었다. 분명 비싼 옷일 텐데 동시에 너무 촌스러워 보였다. 저러기도 쉽지 않은데. 살짝 터지려는 실소를 겨우 참아냈다.


"부장님, 그런 건 연락을 안 해도 미리미리 챙겨주셨어야죠. 어차피 우리 오는 건 기정사실이었는데 왜 그걸 미리 연락 못 받아서 아쉬운 사람처럼 이야기하는 건데요. 말을 참 앞 뒤가 안 맞게 하시네."


다인은 류부장의 차림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할 말을 쏴댔다.


"또, 또 다인씨 까칠하게 군다."

"아니 상황이 그렇잖아요, 상황이."


선미는 지난 이틀 동안 다인이 류부장한테 이런 날 선 말을 날릴 때마다 침을 꼴딱꼴딱 삼켰다. 지금도 행사가 행사인만큼 류부장이 적당히 참고 넘어가려는 것 같아 참으로 다행이다. 며칠 못 봤지만 저렇게 공격적인 부하 직원에게 그다지 큰 소리를 안내는 류부장님을 보면 다른 건 몰라도 성격만큼은 좋은 것 같은데 말이다.


"저기... 그런데요. 다인 언니. 저 축의금은 어떻게 해요? 제가 오늘 알아서 급하게 왔잖아요. 그래서 현금을 준비 못 해서... 아까 오는 길에 둘러봤는데 ATM기도 안 보이고. 언니하고 염팀장님은 어떻게 내시는지 저도 거기에 보태면 되는 거죠?"


축의금. 이렇게 고급스러운 결혼식에 왔으니 얼마나 비싼 축의금을 내야 할지 속으로는 못 내 걱정되기도 했다. 주변에 아직 결혼한 친구도 없고 친인척 결혼식은 항상 엄마와 함께 갔고 엄마가 낸 축의금으로 밥을 먹고 왔다.


"아! 제일 중요한 이야기를 안 했네!"


다인이 크게 놀란 눈으로 선미를 바라보며 "짝!" 박수를 쳤다. 선미는 그 박수 소리에 놀랐다.


"왜요? 무슨 중요한 이야기인데요? 제가 무엇을 놓쳤나요?"

"축의금 말이야... 별 건 아닌데... 아 몰라. 염팀장님이 이야기해요."

"왜? 다인씨한테 물어봤잖아. 다인씨가 말해."

"싫어요. 너무 쪽팔려서 제 입으로 말하기 싫다고요. 결혼 구걸! 염팀장이 말해줘요."

"다인씨 구걸이라니... 그건 아니라니까."

"네? 구걸이요? 그게 무슨 말인데요?"


선미가 무슨 영문인지 몰라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염팀장님은 이해를 갈구하는 눈빛으로 웃어 보였고. 결국 다인이 끝까지 입을 안 떼는 염팀장님을 대신해 입을였였다.  


"축의금. 우리 월급에서 깔 거야."


선미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분명 충분히 익숙한 단어로 조합된 문장인데도 처음 듣는 말 같았다.


"네?"

"축의금. 우리 월급에서 깐다고. 일괄적으로. 그게 나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라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선미씨한테 안 가도 된다고 말할 수가 없었어. 선미씨 우리 회사 너무 짜치지? 확 진짜 어디 찔러 버릴까 보다. 정말, 내가 학자금 대출만 다 갚으면 진짜 엎어버려. 아니 진짜 이직할 회사만 나타나 봐라."


선미는 알아들으면서도 이해하기가 어렵다.


"왜요? 저 그러면 여기서 첫 월급을 축의금만큼 제하고 받는 거예요?"


다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염팀장님. 선미씨 표정 좀 봐봐요. 그러지 말고 염팀장님 재대로 설명 좀 해 주세요. 왜요? 왜 이렇게 된 거예요? 우리 회사 도대체 왜 이런 거예요?"

"어휴, 미안해. 나도 일방적으로 통보받은 거라 뭘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 내가 몇 번을 말을 해. 임원회의 가니까 갑자기 전달 사항이라고 알려 왔다니까. 내가 무슨 힘이 있겠어. 나도 말이 안 되는 건 아닌데 거기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냐고."

"또, 또 염팀장님이 사과한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되놈이 번 다더니. 뺨 때리는 놈은 따로 있고 사과하는 염팀장님 따로 있고." 다인은 와인잔 옆에 물 잔을 벌컥벌컥 단숨에 비웠다. "좀 그러지 좀 마요. 팀장님 이러는 게 더 답답해!"


다인이 빈 잔을 내려놓자마자 우아한 호텔리어가 쪼르르 다가와 바로 물 잔을 채워준다. 그리고 그 뒤로 반가운 얼굴이 나타났다.


"또, 또 다인씨 염팀장님만 가지고 뭐라 그런다. 가만 보면 다인씨가 염팀장님 제일 괴롭혀."

"어?! 정팀장님!"


정경호 팀장이 왔다. 선미한테는 와서 같이 일하자고 하더니 자기는 퇴사한 사람. 변함없는 모습이다. 결혼식이라고 갖춰 입고 오지 않은 옷차림. 아래위로 블랙으로 입어 그렇지. 잘 보면 츄리닝이다. 블랙 저지 팬츠에 흰 면티에 블랙 맨투맨. 장례식장엔 안에 받쳐 입는 티만 블랙으로 바꿔 입는다고 했었는데. 그림 초능력자지만 직접 그 능력을 마주하기 전에는 절대 그 능력을 짐작조차 못 하게 할 지극히 평범한 얼굴. 그 얼굴로 계속 같이 있던 사람처럼 웃으며 맞은편에 앉는다.


"내가요, 이 결혼식 축의금 내기 싫어서 퇴사한 거잖아요."

"으헤에! 정말요?!"


그의 퇴사 사유를 모르는 선미가 혼자만 놀라니 다인이 오래간만에 편안한 얼굴로 웃는다.


"정팀장님 퇴사 사유는 이게 좀 긴데, 내 깜냥으로 짧게 요약할 수가... 음... 선미씨가... 음, 선미씨 이건 알아야 돼. 정팀장님 진짜 많이 참고 참고 참고 참고 참다가 그만둔 거야. 일단 그것만 알아줘. 나머진 천천히 이야기해 줄게."

"왜 그래, 다인씨?"

"네? 정팀장님 왜요?"

"그것도 왜 염팀장님더러 이야기하라고 하지. 그건 왜 자기가 말해준다고 해?"

"에이, 정팀장. 왜 정팀장까지 그래? 그거 뭐 좋은 이야기라고. 나중에, 좀 나중에 정팀장이 직접 이야기해."


[삐이이이! 마이크 테스트. 롸, 롸, 롸, 마이크 테스트]


익숙한 목소리. 진짜 연예인이다. 곧 식이 시작하려나보다.


선미는 축의금 생각으로 잠시 멍하게 있었다. 그러다 곧 두 눈에 발걸음을 옮기는 신랑의 반질반질한 구두와 신부의 반짝반짝거리는 치맛자락이 보였다. 딱 거기까지. 선미는 일부러 수고를 들여 시선을 더 높이고 싶지 않았다. 어쩐 일인지 정팀장님의 퇴사 사유도 처음만큼 궁금하지 않았고 천장의 별도 전부 사라졌다. 웅장하면서도 로맨틱한 음악은 그냥 기계음으로 들렸다.


선미는 갑자기 집에 가고 싶어졌다. 사실 방금 전까지 다인과 염팀장의 대화를 들으면서도 곧 먹을 코스요리를 상상하며 부푼 기대감을 품었었다. 다인과 염팀장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최대한 조용한 몸짓으로 예쁜 꽃 사진도 찍고 천장에 은하수 사진도 찍고 고급진 수저, 포크, 냅킨 사진도 찍었다. 식이 끝나고 요리가 나오면 그것도 다 하나하나 찍을 작정이었다. 안내장에 적힌 긴 이름의 요리들.


* 아마씨드 라보쉬와 매콤한 아이올리를 곁들인 아까미 참치 타르타르

* 모듬 버섯 크림수프

* 브랙커런트 셔벗'

* 샬롯 소스를 곁들인 블랙 앵거스 안심구이와 버섯 으깬 감자, 제철야채

* 백년가약 국수

* 피스타치오 무슬린 크림을 곁들인 라임 케이크

* 비벤떼 커피


낯설지만 고급진 긴 이름의 메뉴들. 기대가 컸다. 그래서 선뜻 축의금으로 약소하나마 진심을 담은 성의표시도 하고 싶었는데... 긴 코스의 이름들은 한 글자 한 글자 눈에 담기에 피곤한 이름이 되었다. 설사 법으로 잘잘못을 따져서 내가 옳고 그들이 틀리다고 하더라도 결코 사라지진 않을 불쾌감이 선미의 위장을 꽉 채웠다.


'겨우 이까짓 거...'


"그래서 정팀장님은 축의금 어떻게 했어요?"


식이 진행되는 중에 다인이 물었다.


"축의금?"

"네, 축의금. 설마 호텔에서 하는 식이라고 십만 원, 이십만 원 막 이렇게까지 낸 건 아니죠?"

"내가? 왜? 안 했는데. 나 그냥 여기 직원이라고 하니까 그냥 들어가라던데?"

"네? 진짜요?"

"응, 진짜야. 여기 직원이라고 하니까 그냥 들여보내 주더라고. 그래서 그냥 들어왔어.

"아. 크크크크크."

"왜 웃어?"

"아니, 그게 아니라 정팀장님이 여기 직원이라고 그냥 들어온 게 너무 웃겨서 그렇지, 크크크."

"나도 좀 웃겨. 축의금은 그래서 안 했고 또 안 할 거야."

"크크크, 진짜네, 진짜야. 진짜 정팀장님 축의금 안 내려고 그만둔 거네."

"그렇다니까. 나 그러려고 그만둔 거야."


정팀장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신랑 신부를 바라봤고 다인도 그에 못지않은 큰 미소를 날리며 신랑 신부를 바라봤다.


어제 선미는 다인에게 퇴사한 정팀장님이 초능력자 같다고 말했었다. 그래서 다인으로부터 들은 대답은 다인도 초능력자란 사실이었다.


"선미씨, 미리 말해주는데 나도 초능력자야. 여기 사람들은 대부분 알고 있지."

"네? 언니도요? 어머, 언니도 그림 잘 그리세요?"

"아니 난 정팀장님이랑은 다르지. 정팀장님이 일종의 염력 계열이면 나는 정신계, 텔레파시 쪽이거든. 텔레파시."


그리고 다인은 양 엄지검지를 자신의 관자놀이에 갖다 대고 인상을 썼다. 그땐 이 무슨 엉뚱한 소리인가 싶었는데.


"나는 머릿속 생각을 전이시킬 수 있어. 다른 사람들한테 내 생각을 소리 없이 전달하는 거지. 이렇게 시선을 두고."


다인은 그 말을 하고선 대놓고 낚시 쇼핑몰 구경을 하고 있던 류문주부장을 향해 시선을 두었다.


"내가 지금 류문주부장한테 뭐라고 뭐라고 험한 말을 보냈거든. 진짜 보통 사람이 들으면 안 될 그런 험한 말. 몹시 저렴하면서 험한 말. 그런데 아무 반응이 없어. 그렇지? 왜 그런지 알아?"

"네?... 왜요?"

"나는 능력자인데 저 인간이 무능력자거든. 진짜 여러 가지로 능력이 없는데 텔레파시 능력마저 없네. 그냥 하는 말도 못 알아듣고 텔레파시로 하는 말도 못 알아듣고 그렇다고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정말 저 인간은 대단한 무능력자인거지."


그때는 다인이 너무 유난이라고 생각했는데. 선미는 다인을 바라봤다. 공이사를 바라보는 다인은 어제 류문주 부장에게 텔레파시를 보낼 때와 같은 표정이다. 선미는 시선을 옮겨 공이사의 구두를 바라봤고 한껏 고개를 쳐들어 신랑 공이사를 바라보는 류문주 부장의 얼굴도 바라봤다.


'아 저 인간들에게 제발 최소한의 텔레파시 능력이라도 있었으면!'


선미도 간절한 텔레파시를 보냈다.


정팀장은 자신의 몫으로 나온 요리를 깨끗하게 먹고서 선미가 끝내 못 먹은 '샬롯 소스를 곁들인 블랙 앵거스 안심구이와 버섯 으깬 감자, 제철야채'까지 말끔하게 비워주었다. 이후 '비벤떼 커피'를 두 번 리필해 마시면서 타 부서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고 다인과 선미, 염팀장과는 다음 주에 '작은 이모 황소 곱창 구이'집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고 신랑, 신부가 2부 드레스로 갈아입고 나오기 전에 돌아갔다. 선미는 그전에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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