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대방어회
12월, 대방어의 계절. 방어에 기름과 살이 가장 탱탱하게 오르는 시기인 11월에서 2월까지 방어가 제철이다. 특히 노화 예방과 골다공증, 성인병 질환인 고혈압이나 뇌졸중 등의 예방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겨울 대방어는 참치 뱃살만큼 고소하고 맛있어 맛과 건강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을 수 있다.
"다들 뭐 해? 6시야. 빨리 가자. 오늘 드디어 칼퇴다!"
“뭐야? 염팀장님, 컴퓨터 벌써 껐어. 내가 제일 빨리 끄려고 했는데, 진짜 너무 배고프다. 기다려라, 곱창전골!”
염팀장의 재촉에 다인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롱패딩의 지퍼를 올리고 2주간 지긋지긋하게 신었던 사무실용 크록스도 얌전히 벗어두고 따뜻한 방한부츠로 갈아 신었다. 류부장 저 놈 때문에 해야만 했던 지리멸렬했던 야근이 오늘부로 끝났다.
"더 비싼 거 먹자니까. 지금은 방어 철이라고."
"류부장님 자꾸 그러시네? 몇 번을 말씀드려요! 우리 선미씨가 회를 못 먹는다고요!"
다인이 자신의 이름을 언급하자 막 털목도리를 감기 시작한 선미가 화들짝 놀랐다. 대방어를 부르짖는 류부장의 눈치가 보였기 때문이다.
"그거야, 선미씨가 회를 안 먹어 봐서 그렇지. 애도 아니고. 먹어 보면 분명히 좋아할 거라고."
선미가 쓴 약을 삼킨 아이의 얼굴로 다인을 향해 고개를 젓는다. 선미가 보내오는 표정을 짚어낸 다인은 턱 밑까지 단단히 끌어올렸던 패딩지퍼를 다시 내렸다. 깊은 열불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아! 싫다고요. 공이사님도 우리더러 우리가 먹고 싶은 거 고르라고 했잖아요. 우리는 그냥 겸손하고 소박하게 곱창전골이 먹고 싶다고요. 그렇게 결정을 했고 또 그렇게 결정을 했다고 몇 번을 말씀드려요, 진짜! 정말! 대방어 아웃!"
"아니, 그건 아무 때나 먹을 수 있잖아. 대방어는 지금이 제 철이이니까."
"아 진짜! 곱! 창! 전! 골!"
다인이 롱패딩 자락을 펄럭이며 곱창전골을 외쳤다.
"왜들 그래?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에요?"
공진 이사다. 오후에 외부 일정이 있다고 나가길래 그대로 퇴근하는 줄 알았더니 퇴근 시간에 맞춰 다시 돌아왔다.
"아이고, 이사님 오셨어요? 저희는 이제 막 나가려던 참입니다."
염상호 팀장이 어색한 미소로 공진 이사를 맞이했다. 지난 2주 간 매일 막차가 끊길 때까지 작업을 하고 택시를 타고 퇴근해야만 했다. 그리고 잠깐 눈 깜빡이듯 잠만 자고 다시 출근했다. 류부장이 외주 업체로부터 덤터기를 얻어맞았기 때문이었다. 계속 거래해 오던 애니메이션 외주 업체 단가보다 30% 저렴한 회사를 찾아냈다며 큰 소리 뻥뻥 칠 때부터 여엉 미덥지 못했다. 일단 그 회사가 중국 업체였다. 절대 중국이라서 못 미더웠다는 말이 아니다. 외국 업체였기 때문에 중간에 에이전시가 꼈는데 그게 한 군데도 아닌 두 군데나 꼈기 때문에 못 미더웠다. 어떻게 에이전시를 두 군데나 껴놓고 단가가 더 저렴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니나 다를까 기다리던 작업 마감일, 우리는 아무 파일도 받지 못했다. 회사에서 지금 진행 중인 게임의 베타버전을 공개하겠다고 한 일시가 한 달 여 밖에 안 남은 상황이었고 도대체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를 류부장은 환전 문제 때문이라는 에이전시의 말만 곧이곧대로 믿고 작업료는 진작에 지불 완료 했다고 하고… 총체적 난국. 외주 맡겼던 애니메이션은 게임에 들어가는 브리지 영상이었다. 그래서 임원들끼리 대책회의에 들어갔는데 그 대안이라고 나온 게 하필이면 사내 조직도에서 류부장 밑에 있는 다인과 선미, 염상호 팀장의 사내 애니메이션 연출팀이었다. 이미 게임 오프닝 영상, 스토리 영상, 티저 영상 등등으로 탈탈 털리고 있는 그 연출팀 말이다. 류부장은 염팀장 및 팀원들과 아무런 상의도 없이 내부 인력으로 일정을 맞출 수 있다고 대표님에게 선언했다. 그렇게 시작된 누군가에겐 철야와 다름없었던 2주간의 야근. 그 기간 동안 있어도 아무 쓸모없었을 류부장은 평소보다 더 칼 같이 칼퇴했다.
이 모든 것의 첫 번째 원흉이 류문주 부장이라면 두 번째 원흉은 공진 이사다. 모든 팀원이 이런 야근은 못 한다고 공진 이사에게 류부장을 말려달라고 건의했다. 그때 알았다. 류부장에게 외주 업체 에이전시를 소개해 준 게 공진 이사라는 걸.
"우리 연출팀이 그간 그 고생을 했는데 그냥 갈 수 있어야죠. 회식 저도 같이 가려고 왔습니다."
"네? 이사님도요?"
다인은 공이사가 법인카드만 깔끔하게 주고 빠져주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어쩐지 카드를 류부장이 가지고 있더라니. 이게 함정이었구나.
"그럼요. 오늘 회식비 걱정하지 마시고 2차, 3차 달리셔도 좋습니다."
"네? 오늘도 늦게 들어가라고요?"
"아, 이게 말이 그렇게 되나요? 하하하하하."
"하하하하, 진짜 같이 가시려고요?"
"다인씨, 왜 그래요? 형 가자."
류부장이 공이사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저 두 사람 대표님과 같은 대학교 같은 전공이다. 공이사는 동기, 류부장은 그들의 후배. 전공은 사진. 그래서 의문이다. 대표님이야 직접적인 게임 제작과는 관련 없으니 그러려니 하는데 제작부 담당인 공이사와 류부장은 참으로 의아한 일이다. 실질적인 제작 지식이 제일 없는 문외한들.
"더 비싼 걸 먹지. 겨우 곱창전골이야?"
공이사 입에서도 겨우라는 단어 나왔다.
"한우라도 먹으러 갔어야지. 아니면 요새 무슨 철이지?"
"형, 지금은 대방어지."
"그래, 대방어. 이렇게 찬바람이 두 뺨을 스칠 땐 두툼하게 썬 대방어를 먹어줘야지. 문주야, 우리가 저번에 방어 낚시 갔던 데가 어디였지?"
저 두 놈들, 대방어철이 되기 전에 죽은 어디 낚시광 귀신이라도 붙은 게 분명하다. 다인은 저들의 대화를 귀에 담지 않으려 노력했다. 곱창전골에만 집중했다.
물론 곱창전골이 아무 때나 못 먹는 희귀한 음식은 아니다. 비싸고 고급진 메뉴도 아니다. 여기 '작은 이모 황소 곱창 구이'는 얼마 전에 입사한 선미씨의 환영 회식을 했던 집이다. 이어서 이 회사를 선미에게 소개해 주고 퇴사한 배경미술팀의 정경호 팀장 송별 회식도 여기서 했다. 무슨 건 수만 잡히면 항상 이 집을 찾았다. 이유는 단 하나. 맛있어서다. 부디 어느 TV의 맛집이나 유명 인플루언서의 SNS에 소개만 안 되길 바랄 만큼 맛있다. 그러니 회사 법인 카드로 얻어먹는 건 이 정도면 되었다. 직원들, 작업자들이 먹을 건데 공짜라고 하면 뭐든 좋아할 거라 여기는 그 꼬락서니가 너무나 눈꼴시었다. 대충 비싸고 맛있는 것만 사주면 마치 대단한 복지라도 베푸는 양 으스대는 임원들이 몹시 꼴 보기 싫었다. 흥, 그들이 말하는 비싸고 맛있는 거 어차피 다 똥 된다.
"우리 가볍게 곱창전골 대(大)자 하나 놓고 모둠곱창 두 개 깝니다."
"좋다, 콜! 그럼 가볍게 소맥 한 잔씩 돌려볼까?"
"오, 염팀장님이 돌리면 그다음 턴은 제 턴입니다."
다인은 친형제 못지않게 우애가 깊은 두 선후배는 신경을 안 쓰기로 했다. 어차피 낚시광 귀신에 빙의되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도 못한다.
"앗! 저 곱창 튀김도 하나만."
"염팀장님, 선미씨 곱창 튀김도 추가요."
"오케이!"
다인이 맥주와 소주를 챙겨 오는 염팀장에게 외쳤고 염팀장은 바쁜 이모님에게 다가가 메뉴를 추가했다.
"어?! 저도 메뉴판 잠시 읽어봐도 돼요?"
귀신이 벌써 물러갔나? 공이사가 선미가 들고 있던 메뉴판을 보고 싶어 했다.
"뭐... 네."
다인은 공이사가 불편했다. 다인과 공이사, 173cm로 키가 같다. 입사 후 회사에서 받았던 건강 검진 때 알게 됐다. 그때 체중도 61kg, 같다는 걸 알았다. 다인의 신체검사 결과지를 대놓고 훔쳐본 류문주 부장 때문이었다. 덕분에 다인은 키가 큰 체격 좋은 여자사람이 되었고 공진 이사는 호리호리한 옷빨 잘 받는 남자사람이 되었다. 뭐 상관없었다. 어차피 둘 다 싫은 사람들이고 싫은 사람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거 귓등으로 튕겨 버리면 그만이다. 다만 그게 마음처럼 돼야 말이지. 싫은 사람 류부장이 타 부서에까지 가서 다인과 공이사의 건강검진 평행이론이 어쩌고 하며 떠드는 건 쉽사리 튕겨지지가 않았다. 그래서 류부장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할 때면 되도록 싫은 티를 내려고 노력 중이다. 그게 너무 잦아서 티를 내는 것도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닌 게 되었지만.
"사장님! 사장님!"
"부장님, 사장님은 왜요?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물이 떨어졌나?"
류부장이 갑자기 이모님을 찾는다. 사람 좋은 염팀장이 류부장을 챙기려 들자 방금 만 시원한 소맥 한 잔을 꿀꺽 들이켠 다인이 셀프바 옆에 정수기를 가리켰다.
"물이 왜요? 부장님. 여기 물은 셀프예요."
"아니 다인씨는 내가 그런 것도 모를까 봐."
"그럼 부장님이 사장님을 왜 찾는 건 데요?"
"아니, 나는 사장님 좀 찾으면 안 되나? 주문 좀 더 하려고 그러지."
이모님이 무슨 일이냐며 오셨다.
"사장님, 저희 곱창전골 대(大)자 하나 더 주시고요. 돔베고기도 큰 도마로 하나 주세요. 양이랑 막창 구이도 하나씩 주시고요. 또... 여기 옛날 순대 대(大)자 하나랑 도가니 계란찜도 두 개 주시고... 또 어디 보자."
"못 보던 형님들이네. 나야 많이 시켜주시믄 좋은디, 또 그렇게 시키믄 테이블에 다 깔지도 못 할 거 같은디?"
"아, 괜찮으니까 그냥 내주세요. 전부 맛있어 보여서 그래요."
"맛있어 보여도 그렇죠. 왜 이렇게 많이 시키세요?"
"회사 법인 카드 쓰는 건데 너무 간소하게 시켜서 나중에 어디 가서 욕먹을까 봐 그래요. 오늘은 마음껏 드십시다."
공이사는 평소에 순대에 간도 못 먹는다. 거기다 위도 벼룩의 위만 해서 엄청 소식한다. 애초에 곱창전골집에 따라온 것부터가 의아할 일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엄청나게 시키다니. 다인은 못마땅했다. '어떻게든 으스댈 구실을 만들어내는구나.' 다인의 표정을 읽었는지 염팀장이 소맥을 한 잔 더 말아내 주었다. 이왕지사 먹는 거 기분 좋게 배부르게 먹자고.
"하아... 언니 더 이상 못 먹겠어요."
선미가 젓가락 한 짝으로 잘 구워진 대창 한 점을 꿰어 입에 넣으려다 도루 내려놨다.
"왜?"
그런 선미를 류부장이 걱정한다. 처음부터 기름진 음식이 지나치게 차려져 있긴 했다. 이전엔 이렇게 한 번에 왕창 시킨 적은 없었다. 전골은 천천히 보글보글 끓이면서 곱창이나 막창구이는 먹을 만큼만 여러 번에 나누어 주문했었다. 지금처럼 처음부터 왕창 구워놓고 먹은 적은 없었다. 가장 맛있게 구워졌을 때 바로바로 먹고 불판이 비워지면 또 시키고. 이렇게 천천히 먹다 보면 결국 배가 불러 마지막에 시키자던 돔베고기까지 간 적이 드물었다. 오늘은 돔베고기가 처음부터 나왔는데도 반이상이 남아있다. 아니 테이블에 있는 대부분의 모든 음식이 그만큼 남아있다. 심지어 전골에도 아직 국물이 남아 있다. 자작자작하게 남아 있을 전골 국물에 김가루 팍팍 올려 냄비 바닥에 바삭바삭 눌러 볶는 밥을 너무 좋아하는 다인마저도 "볶음밥 추가요."라는 말을 못 하고 있다.
"나도. 너무 배 불러서 술도 안 들어가. 보통 대충 불러도 맥주로 눌러주면 쑥쑥 꺼졌는데. 뱃속에서 다시 뿌나봐. 내 내장이 다른 내장으로 꽉 찼어."
"다인씨도? 이렇게 많이 남았는데 그런 약한 소리를 하면 어떻게 해?"
공이사는 아까부터 계란찜만 깨작이며 퍼먹고 있었고 류부장은 돔베고기만 한 점씩 한 점씩 꼭꼭 씹어 먹고 있었다. 이렇게 잔뜩 시킨 게 저 둘인데 가장 소극적인 자세로 먹고 있었던 것이다.
"안 되겠다. 우리 2차 가자."
류부장이 갑자기 박수까지 쳐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2차요? 무슨 2차를 가요?"
"왜? 이제 겨우 8시잖아. 2차 가자. 나가요, 염팀장님. 우리가 또 이렇게 헤어지면 섭섭하잖아."
류부장은 이럴 때 유난히 염팀장을 더 찾는다. 제일 마음이 여린 사람이란 걸 아는 거다. 류부장, 저 인간의 외형으로 태어나 여시로 사는 금수 같으니라고. 다인은 곱창을 계속 먹을 거라며 투덜거리며 뭐라고 한 마디 하려 나서는데 어라, 몸이 붕 뜬다. 동시에 누군가가 자신에게 롱패딩을 입혀주는 걸 느꼈다. 아뿔싸, 연거푸 쏟아 넣은 소맥의 취기가 예상보다 훨씬 빨리 올라왔나 보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바로 어제까지 야근을 한 몸으로 그렇게 마셔댔으니. 선미가 다인의 롱패딩을 단단히 여며주고 함께 일어섰다. 염팀장은 어쩔 수 없는 얼굴로 다인과 선미의 앞에 서서 류부장과 공이사의 연결 고리가 되어 장소를 이동했다. 이 회사의 창립멤버로 류부장, 공이사와 그만큼 만나 온 염팀장은 이들이 어디로 향 할지 알 것만 같았다.
"여기가 어디야?"
횟집이었다. 다인은 방금 전까지 교대입구역 근처 곱창집에 있었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 잠깐 두 뺨을 에이는 찬바람을 맞고 서 있었다. 꼿꼿하게 바른 자세로 서 있진 못 하고 좌로 삼삼 우로 삼삼 기우뚱거리면서. 그때마다 오른쪽은 선미가 왼쪽은 염팀장이 잡아준 게 기억이 난다. 그러다 따뜻한 택시를 탔다. 거기서 10분? 15분?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을 뿐인데. 총신대 입구, 이수역 근처 어느 횟집에 당도해 있었다. 깜깜한 오밤중에 구름 한 점 없이 뙤약볕이 내리쬐는 대낮 신을 찍어도 될 만큼 실내가 밝은, 밝아도 너무 밝아 두 눈을 제대로 뜨기가 힘든 그런 횟집. 다인의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쏟아지는 실내등의 밝기를 가늠하고 나서야 횟집의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온다.
"뭐야? 우리가 왜 여기 있어?"
실눈을 뜬 다인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니 이내 낮게 깔린 염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인씨 미안해. 류부장이 끝까지 공이사랑 대방어 먹어야 된다고, 우리 전부 여기로 끌고 왔어."
"네에? 아니 팀장님! 끌고 왔다고 이렇게 끌려 오면 어떻게 해요?"
"언니, 팀장님한테 뭐라고 하지 마세요. 팀장님은 우리 그냥 집에 가겠다고 안되면 언니랑 저만이라도 보내주라고 여러 번 말씀드렸는데, 류부장님이 그러면 회식이 아니라고 진짜 억지로 등 떠밀어서 온 거예요."
"아이... C... 정말... 그래서 그 사람들은 지금 어디 있는데?"
"몰라요. 여기 사장님이 뭐라고 뭐라고 하니까 자기들끼리 카운터로 가서 뭐라고 뭐라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카운터 쪽에 시선을 두고 희미한 초점을 맞추니 뭐라고 뭐라고 열심히 떠드는 류부장이 보였다. 공이사는 한 발작 물러서 서 있고. 횟집 주인으로 보이는 사장님은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굽신굽신 거리며 떠들고.
"아 진짜 저 사람들... 이건 도대체 무슨 거지라고 불러야 돼? 진짜 어마어마한 집념이다."
그래서 그랬던 거였다. 앞선 곱창집에서 그렇게 메뉴를 시켜댔던 이유가 이거였던 거다. 1차를 그런 식으로 대충 시켜서 빠르게 마무리하고 2차를 대방어 횟집으로 가려고. 왜냐, 자기들이 대방어회가 먹고 싶으니까. 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 사람들 지난주에도 대방어회를 먹었다고 묻지도 않는 자랑을 해댔었다. 신토불이 어쩌고를 들먹이며 계절 타는 땅에 살고 있으면 계절 타는 음식을 먹어줘야 한다고 엄청 가르쳐댔다. 다인은 참치회를 좋아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대방어회도 좋아한다. 처음 맛을 봤을 때 세상에 머 이런 고소한 고기가 다 있나 깜짝 놀라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저 사람들의 방어회 방어회 하는 소리에 몹시 질려 올 겨울엔 대방어회 따위 맛보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한 참이었다. 이 횟집, 실내 온 사방에 각종 대방어회 사진으로 도배가 되어 있다. 아 사진만 봐도 질린다.
"자 여러분, 간단하게 광어회, 우럭회 반반 시켰고 또 우리 선미씨가 회를 못 먹는다고 해서 매운탕도 하나 시켰어요. 괜찮죠?"
'엥? 대방어가 아니라 광어, 우럭이라고?'
카운터에서 한참을 떠들던 류부장이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공이사는 핸드폰을 받으며 잠시 횟집 밖으로 나가는 게 보였다. 다인은 류부장 귀에 안 들리게 염팀장에게만 조용히 속삭였다.
"뭐야? 왜 대방어가 아니에요?"
"그러게. 택시 안에서 여기 대방어 맛집이라고, 자기들 덕분에 좋은 경험 하는 거라고 노래를 불렀는데 저 냥반들."
이때 옆테이블에 새로운 손님들이 들어오면서 왜 대방어를 안 시킨 건지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안 시킨 게 아니라 못 시킨 거다. 오늘 들어온 대방어가 벌써 매진이 되었다고 한다. 방금 전에 마지막 접시가 나갔다고.
"진짜 잘하는 집이긴 집인가 보네요. 아직 10시도 안 됐는데 솔드 아웃이 된 걸 보면."
"언니,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횟집 안 간다고 했던 거죠?"
"아니야, 선미씨.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절대 절대 아니야."
"그냥 그렇다고 말하지 그랬어요. 아까 전에 언니가 다 고백했단 말이에요."
"뭐? 내가 무슨 고백을 해?"
"사실은 회 좋아한다고. 오는 길에 택시 안에서 계속 중얼중얼 거리던데..."
"아, 진짜..."
다인은 난감했다.
"회, 회 좋아하긴 하는데. 회도 그러니까 좋아는 하는데."
그러고 보니 괘씸하다. 저 사람들 이렇게까지 끌고 왔으면 더 좋은 걸 시켜줘야지. 겨우 광어에 우럭 그리고 매운탕? 다인은 얼른 메뉴판을 쳐다봤다. 전복 버터구이가 있고 문어숙회, 참소라 숙회도 있다. 매운탕 말고 도미찜도 있었고 그리고 새우튀김, 모둠튀김도 있다. 선미와 상의를 해봐야겠다.
"문주야, 류문주. 나 지금 가 봐야겠는데. 와이프가 빨리 들어 오래."
다인은 새삼 깨달았다. 마흔세 살, 공진. 올 초에 결혼한 새신랑이었지. 지금 간다고? 갈 거면 진작 갈 것이지.
"아, 형. 그러면 대방어회 포장한 거 지금 달라고 할게. 계산은 미리 했으니까."
류부장이 바지런하게 일어났다. 공이사는 먼저 가서 미안하다며 자기 혼자 사람 좋은 척 작별 인사를 하고. 염팀장은 엉덩이를 들썩이며 배웅을 나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래야 하나 저래야 하나 온몸으로 몸 둘 바를 몰라하고 있었고 선미는 주섬주섬 일어나 인사만 했다. 다인은... 술이 확 깼다.
'뭐라? 대방어? 무슨 대방어?'
"지금 대방어라고 했어요?"
다인의 눈에 류부장이 제법 큼지막한 박스모양의 형태가 잡혀 있는 뽀얀 비닐봉지 꾸러미를 소중히 챙겨 공이사의 손에 쥐어주는 게 보였다.
"그거 설마 대방어예요?"
"아, 으, 응."
"아니, 여기에 우리한테 대방어 먹여 주겠다고 끌고 왔던 거 아니었어요?"
"응?"
공이사는 슬그머니 한 발짝 물러서고 류부장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다인의 물음에 꼬박꼬박 대답해 나갔다.
"아, 응. 대방어 먹으러 왔지. 오늘 같은 날 제철 대방어 먹어줬어야 하니까. 그런데 딱 이만큼 밖에 안 남았다길래. 그런데 다들 이사님 사모님 알지? 저번에 뵜잖아. 우리 추석 때, 기억나지 다들? 아니 왜 그때 우리 커피도 사주고 그랬잖아. 안 그래? 염팀장 우리 잘 마셨잖아."
“네? 네, 네네."
“마침 그 형수님이 대방어가 드시고 싶으셨다네. 이럴 땐 우리가 한 번 양보해야지. 안 그래? 응? 그렇잖아."
"무슨 양보예요? 그렇게 은혜 갚고 싶거든 부장님이 커피로 사 드리세요. 그리고 언제부터 그런 건데요? 언제부터 짠 거냐고요?"
다인은 진심으로 어이가 있길 바랐다. 그 나무로 만들어진 맷돌 손잡이로 저 치사한 사람들을 때려주고 싶어서.
"짜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일 잘 마무리하고 회식도 하는 좋은 날이잖아. 형, 아니 이사님이 형수님한테 대방어 이야기 했더니 형수님이 먹고 싶다고 한 거지. 알잖아, 우리 이사님 애처가인 거. 다인씨랑 선미씨도 나중에 우리 이사님 같은 남자 만나서 결혼해야 돼. 그래야 인생 피는 거야."
"그게 왜 인생 피는 거예요?"
"아니, 세상에 이런 남자 없다니까."
"네. 진짜 이런 남자 없었으면 좋겠네요. 아니 그냥 단 한 명도 없었으면 좋겠어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다인은 생각했다. 저 치사한 거지 같은 사람들은 법인 카드로 회식을 한다고 한 순간부터 집에 싸갈 것까지 계산했을 것이다. 분명! 그러고도 남고도 남을 인간들. 하나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마지막에 남은 게 한 접시라면 이렇게 해선 안 되는 거지. 인간의 외형으로 태어나 여시 같은 금수로 살아가는 게 류부장이라면 저 어물쩍 어물쩍 뒷걸음질 치는 공이사는 아주 여시 중에 여시 불여시 금수다.
"내놔요!"
다인은 성큼성큼 류부장을 지나쳐 공이사의 손을 덥석 잡았다.
"대방어 내놔요!"
"아니 다인씨 이거 왜 이래?"
"대방어 내놔. 우리가 먹을 거예요."
"다인씨, 아까 곱창집에서 배 터지게 먹었다며. 이거 양 엄청 많아."
공이사의 얼굴이 한껏 당황해졌다. 유부남 새신랑인 자신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부하 직원에게 손 잡힌 게 부끄러워 그런 건지 아니면 자신의 손을 잡은 여자사람 다인의 손 악력이 너무 쎄 쉽게 물리지 못해 그런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몹시 당황한 얼굴로 옴짝달싹 못하고 있었다.
"갈 거면 그냥 가시라고요. 대방어는 두고."
"언니, 언니."
염팀장은 입만 어버버거리며 가만히 서 있었고 선미는 발을 동동 구르며 다인의 팔을 붙잡았지만 그 손에 힘은 들어가 있지 않았다. 선미도 생각했다. 저 대방어회 분명 법인카드로 결제했을 거다. 거지들!
"대방어 두고 가시라고요. 우리가 먹을 거라고요."
다인은 남은 한 손으로 공이사가 잡은 대방어 봉지의 입구를 틀어쥐었다. 그리고 당겼다. 공이사가 손을 놓지 않으면 그대로 당겨서 끊을 기세로. 류부장도 이때만큼은 공이사를 거들지 못했다. 류부장이 한 발짝 다가서려고 했을 때 다인이 노려봤기 때문이다.
"부장님은 가만히 계세요."
173cm, 61kg 평소에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는 체격 좋은 여자 사람 다인의 완력을 똑같은 173cm, 61kg 호리호리한 체격으로 가끔 와이프 티셔츠도 빌려 입는 패셔니스타 남자사람 공이사가 좀처럼 당해내기 힘들었다. 류문주가 평소에 같은 사이즈라고 할 때마다 공진은 생각했다. 그래도 자신은 남자고 다인은 여자이니 제대로 힘겨루기를 하면 당연히 자기가 이길 거라고. 그런데 지금 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을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아휴, 네, 네."
공진은 손을 놨다. 대방어회가 들어 있는 비닐봉지는 공진 손에서 다인 손으로 넘어왔다. 공진이 갑자기 손을 놔서 하마터면 다인이 뒤로 넘어질 뻔했지만 다인은 금세 균형을 잡고 섰다.
그러고 보니 많은 사람들이 공진을 바라보고 있다. 공진은 창피해졌다.
"저, 저는 이만."
"형! 형! 진이형!"
류부장이 급하게 나가는 공이사를 쫓아가려고 가방과 옷을 챙겼다.
"아니, 그럼 나도 이만 가볼게요. 다인씨, 다인씨는 오늘 일 회사에서 이야기합시다."
"아니, 싫은데요. 지금 아니면 이야기 안 할 건데요."
"다, 다인씨!"
"왜요? 회식하라고 준 법인 카드로 일개 이사님 집에 야식거리나 사 가려고 했던 일을 회사에서 뭐라고 이야기하실 건데요!"
여유롭지 못 한 류문주 부장은 잠깐 뒷목을 잡더니 그대로 자리에서 벗어났다. 어쨌든 지금 그는 공진 이사를 쫓는 게 먼저라고 판단한 것이다. 다인과 실랑이 벌여봤자 좋을 게 없다. 분하지만 윤다인 말발이 보통이 아닌 것을 이미 잘 알기에.
류문주가 가게 밖으로 나오니 공진이 큰 대로변에서 택시를 잡는 것이 보였다. 순간 못 본 척하고 다른 방향에서 택시를 탈까도 싶었지만 딱 그 찰나에 형과 눈이 마주쳤다. 공진이 택시를 잡으려고 들고 있던 팔을 내리는 게 보인다. 류문주는 공진을 향해 종종걸음으로 걸어갔다. 이때, 누군가 류문주의 뒷 목덜미를 잡아채는데,
"부장님!"
다인이었다.
"아! 깜짝이야! 왜요? 왜?"
"카드는 주고 가셔야죠. 저희 2차 회식 아직 마무리 안 됐다고요."
"아니, 겨우 그것 때문에 쫓아 나온 거예요? 그냥 염팀장한테 계산하라고 해요. 나중에 영수증 처리 해 주면 되잖아."
다인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진짜 이럴 땐 몇 년 전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워 버릴까 싶은 기분이 든다. 말보로 레드쯤 되는 거에 불 붙여 피워낸 연기를 단전 아래께까지 꽉꽉 채웠다가 땅을 푹푹 꺼트릴 기세로 한숨 쉬어 뱉어내고 싶다. 아오, 속 터져.
"주시라고요. 카드."
대방어회는 횟집 사장님의 배려로 새로운 봉투에 새로 포장되었다. 비닐봉지 손잡이가 너덜너덜해졌기 때문이다. 새 술은 아니지만 부대만큼은 새 부대인 대방어회는 한사코 가져가는 것을 거절했던 염팀장님 손에 들렸다. 지난 시간 주말에도 나오고 또 적어도 5번 이상 회사에서 밤까지 지새웠던 염팀장님의 아내 되시는 분도 대방어회를 좋아한다. 선미씨가 먹으려고 주문했던 새우튀김도 염팀장님이 가져갈 꾸러미에 추가 포장되었다. 염팀장님 아이들이 새우튀김을 좋아한다.
다인과 선미는 편의점에서 가장 비싼 H겐다즈 아이스크림을 입가심으로 사 먹었다.
어차피 입으로 들어가면 다 똥이 돼서 나온다. 그걸로 대단한 인심을 쓴다고 착각하는 생색내는 거지들이 회사에 다니고 있다. 진짜 해야만 하는 일이 무언지도 모르는 그 거지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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