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분리수거일
* 1권 21화와 동일한 등장인물입니다.
일요일, tvn에서 저녁 9시 20분에 하는 드라마를 보고 JTBC에서 밤 10시 30분에 하는 드라마까지 다 봤다. 이제 휴일의 마무리로 분리수거만 하면 된다.
나와 아들 하준이가 사는 M아파트 단지 분리수거일은 매주 수요일이고 옆 A아파트 단지 분리수거일은 매주 일요일이다. 옆 A단지와 우리 M단지는 웬만한 놀이터보다 작은 체육공원을 사이에 두고 붙어 있다. 가깝기가 거의 한동네로 봐도 무방할 만큼 가까우니 일요일인 오늘은 폐품이 담긴 봉지를 들고 옆 A단지로 향한다. 한 주에 분리수거를 두 번 할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결혼 전 종로의 어느 오피스텔에 혼자 살 때는 지하 주차장 한편에 공간이 있어 분리수거될 폐품들을 아무 때고 내키는 때 내놓아도 되었다. 따라서 지정 수거일이 없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내어 놓아도 된다는 여유는 나태함이 되어 되려 집안에 분리수거 내놓아할 폐품들을 마구 쌓아두곤 했었다.
가족들과 살면서 집안일을 제대로 거들어 본 적 없이 혼자 살기 시작한 '나'라는 젊은이는 폐품 내놓는 일이 마냥 귀찮았고 방치의 나날을 자주 지속시켰다. 택배상자의 접착테이프를 뜯어내 납작하게 접어 차곡차곡 정리해 놓을 생각은 전혀 안 했고 따라서 비닐 같은 건 대충 쌓아놓은 택배상자에 쑤셔 넣어놨으며 빈 플라스틱 통은 제때 물로 헹구지 않아 벌레가 꼬였다. 감당할 수 있는 때를 놓치면 집 안은 금세 쓰레기터로 변했고 그제야 마지못해 가지고 있던것 중 가장 큰 마트백에 닥치는 대로 쑤셔 넣어 지하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러고 나면 시장 볼 때 쓰려던 마트백에는 알 수 없는 악취가 풍기는 진득한 때가 묻었고 같은 용도로 몇 번 더 쓰고 나면 반드시 버려야 했다.
어릴 때 어른들로부터 지겹게 들었던 말이 있다. '사람은 먹는 일만큼 싸는 일도 중요하다.' 돌이켜 보면 사람은 확실히 그렇다. 한 번에 햄버거 세 개는 거뜬히 먹을 수 있었던 먹성 좋은 사춘기에 되게 걸린 변비로 수차례 피똥을 쌌을 때 확실히 깨달았다. 싸는 일은 (비워내는 일은) 삶의 질을 좌지우지할 만큼 정말 중요하구나!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피로 얻은 깨달음은 즉각적인 먹는 (채워 넣는) 즐거움 앞에서 바로 잊혔다.
"엄마, 플라스틱 라벨 이거 엄마가 안 뗀 거지?"
"아닌데? 나는 오렌지주스를 먹은 적이 없는데?"
"그래? 그러면 누구야?"
"글쎄, 내가 아니면 누구겠어?"
"..."
"너지, 너. 하준이 너."
"나? 내가 범인이라고?"
"그래. 네가 범인이라고. 너 어제 햄버거 먹으면서 주스 먹었잖아. 그리고 어떻게 했어?"
하준은 잠시 어제 햄버거를 먹었던 자신을 시뮬레이션해 봤다. 맛이 있었다. 맛이 있었고 또 맛이 있었다. 한 개로는 모자란 양이 아쉬웠고 다음엔 더 큰, 패티가 더블로 들어간 버거를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주스를 마시는 자신을 발견했다.
"아하!"
하준은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내자 바로 추궁을 멈췄다. 범인이 엄마라고 생각했을 땐 범행 자체가 이해가지 않았지만 범인이 자신이라고 밝혀지니 모든 인과관계가 납득 됐다. 무얼 먹고 나면 먹은 자리를 후다닥 치운다. 조금만 지체하면 치우는 일은 몹시 귀찮아진다. 그러니 햄버거를 먹고 남은 소스가 묻은 포장지며 감자튀김 봉투, 케첩 미니팩을 바로 버린다. 신속한 진행을 하다 보면 페트병에 라벨 떼는 일 따위 당연히 깜빡할 수 있다. 그렇다면 추궁보다 더 중요한 일을 해야 한다. 수습이다. 하준은 열세 살 완전히 여물지 못한 손으로 비닐 라벨의 뜯어달라고 표시되어 있는 톱니무늬 끝을 여러 번 뜯어내어 페트병의 비닐라벨을 깔끔하게 떼어냈다.
"종이랑 비닐은 내가 들게. 플라스틱이랑 스티로폼은 엄마가 들어."
"오케이."
나는 하준이의 지시에 따라 양손에 폐품 꾸러미를 들었다. 비닐 뜯는 걸 도와달라고 안 하다니 기특하다.
여기 20년은 족히 넘은 수도권의 M아파트 단지로 이사오기 전엔 연남동의 어느 작은 빌라에서 살았다. 거기에선 둘이 살았고 곧 셋이 되었지만 구성원 수와 상관없이 분리수거는 오롯이 내 몫이었다. 분리수거일은 매주 목요일 주 1회. 폐품 내놓는 일이 매일매일 가능할 때는 한 주고 열흘이고 언제든 미뤘었는데 주 1회로 바뀌고 나니 미루는 게 몹시 싫어졌다. 가족 구성원의 수가 늘어서일까? 세 사람의 살림살이로 충분히 포화상태인 집에서 택배박스는 생기면 바로 분해해 3차원에서 2차원으로 만들었고 페트병은 납작하게 찌그러트려 그 부피를 줄였다. 이 작업을 거의 매일 했다. 그래야만 아기 하준이가 거침없이 집 안을 돌아다닐 수 있었고 나는 그걸 원했다. 아기 하준이의 안전한 즐거움을 원했다.
나는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한 시점에서 한참이나 지난 후에, 클 만큼 크고 사회생활도 하면서 혼자도 살아 보고 둘 셋이서도 살아 보고, 피똥 싸듯 수차례 시행착오를 겪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필요한 생필품 및 가전가구 등등을 적재적소에 채워 넣어야 하는 만큼 필요하지 않은 것들은 빨리빨리 비워내야 한다. 집도 사람처럼 잘 먹고 잘 싸야 했다. 어리석은 내가 겨우 여기까지 깨달은 것이다. 그러니 주 1회가 더욱 못마땅했다. 그러던 중 분리수거일인 목요일을 포함 거의 매일을 외박 혹은 늦은 새벽 또는 이른 아침 귀가를 일삼던 구성원 중 한 명인 당시 남편이자 하준이의 아빠가 가족 탈퇴를 선언했다. 이사라는 기회가 왔다.
"읔, 담배 냄새."
하준은 얼른 코를 막았다. 일요일 분리수거 갈 때 반드시 지나가야 할 작은 체육공원 벤치에 남자 셋이 쪼르르 앉아 담배를 피우는 모습은 꽤 멀리에서부터 인지했다. 해서 냄새에 대한 마음의 준비는 일찌감치 하고 있었으나 막상 거리가 가까워지고 직접 맡게 되니 저절로 튀어나오는 부정적인 놀라움을 숨길 수는 없었다. 하준은 코를 더 세게 쥐고 엄마를 보았다. 자신은 양손에 들고 있던 종이폐품과 비닐폐품을 한 손에 모아 들 수 있었으나 엄마는 스티로폼 상자를 붙잡느라 코를 막을 손이 없다. 벤치와 거리를 두고 걸었음에도 희미한 담배 연기가 코를 막은 자신의 손등을 지나 엄마의 코 끝에 닿는 게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아오! 정말 너무 대 놓고 피네. 엄마 진짜 너무 한다, 그치?"
“애 좀 봐. 조용히 말해. 다 들려.”
"너무 냄새나니까 그렇지."
하준은 보폭을 넓혀 속도를 높였다. 담배 냄새로부터 최대한 빠르게 멀어지고 싶어서다.
"하준아 갑자기 빨리 걷지 마. 너 거기, 우유팩 떨어졌잖아."
나는 하준이가 떨어트린 우유팩을 주우며 속도를 높인 하준의 뒤를 쫓았다. 내 움직임이 빨라지니 옆구리에 감싸 들고 있던 스티로폼 상자가 날아가려 든다. 과유불급. 물건이 너무 무거워도 운반하는 게 힘들지만 너무 가벼워도 힘들다. 지금처럼 위아래로 포개어 걷고 있을 때는 더 그렇다. 위에 있는 상자가 무계감 없이 날아가려고 들어 턱으로 누르며 쫓았다.
"하준아, 같이 가자니까."
"엄마가 빨리 와."
하준이가 먼저 A아파트 단지 어느 아파트 앞 주차장에 일요일만 한시적으로 마련되는 분리수거장에 도착했다. 하준이는 비닐만 수거하는 큰 봉지에 가지고 온 비닐만 모아 온 비닐봉지를 꾹꾹 눌러 넣고 플라스틱만 넣어야 하는 거대한 포대자루에 들고 온 플라스틱폐품을 조심조심 넣는다. 더 어릴 땐 다짜고짜 때려 넣어 몇몇 플라스틱 통은 밖으로 튕겨내기 일쑤였는데 이제는 제법 힘조절을 해가며 넣는다. 튕겨나가는 플라스틱 통이 거의 없다. 나도 스티로폼 쌓아놓는 곳에 들고 온 박스를 포개어 두었다. 일정 높이가 되면 경비아저씨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노끈으로 묶어주신다. 종이 폐품도 버렸는데 여기서 종이폐품 구역이 가장 크다. 바닥에는 다음 날 파지를 수거하는 집게차에 아스팔트가 상하지 않도록 거대하고 튼튼한 시트가 깔려있다.
분명히 지난 수요일에 한 차례 버렸음에도 오늘도 상당한 량의 폐품을 버렸다. 분명히 또 다음 수요일까지 이만큼이 모일테고 다시 일요일까지 또 이만큼이 모일 거다. 이만큼에 이만큼을 주에 한 번만 버렸던 걸 생각하면 저절로 고개가 저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혼 후 이사 온 곳이 여기인 것은 신의 한 수다. 이사 오고 나서야 알게 된 주 2회. 이것이 어리석은 내가 내린 선택을 몇 안 되는 훌륭한 선택으로 만들어 주었다.
"엄마 다 했지?"
"응."
"가자."
하준이가 자기 몫의 폐품을 다 버리고 의기양양하게 빈 폐품 봉투를 펄럭인다. 얼마 전까지 분리수거일마다 아이의 뒤를 쫓으며 아이가 흘린 것들을 주워 담느라 허리도 맘대로 못 폈었는데... 아이의 자란 모습은 언제 보아도 감개무량이다.
"어?! 엄마 쟤네 아직도 있다."
"쟤네라니? 아무리 그래도 하준이 너보단 형들일걸?"
"그런가?"
분리수거하러 가는 길에 봤던 남자 셋을 돌아가는 길에 또 보았다. 아직도 같은 자리에서 담배를 피운다. 다시 본 그들은 상당히 어려 보였다. 얼핏 덩치도 하준이보다 작아 보였고. 하준이가 또래 친구들보다 큰 편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법적으로 성인이 아닐 수도 있겠다 싶을 만큼 작고 어려 보였다. 제발 심하게 동안인 어른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하준아, 너도 쟤들 미성년자 같이 보여?"
"어. 엄마도 그래? 나는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어."
흠, 하준이 눈에도 그렇게 보이는구나. 이 공원은 금연 구역이다. 법적인 강제성이 어느 만큼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분명히 금연할 것을 권장하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그러니 처음 봤을 때부터 계속 찝찝했다.
"하준아 저건 아니지? 엄마가 가서 한 마디 해 줄까? 여기서 이러면 안 된다고 혼내 줘?"
많이 자란 거 같아도 그래도 아직 어린이인 하준이 앞에서 눈앞의 불의를 못 본 척 지나쳤던 것이 창피해졌다. 반사 심리로 멋진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욕심도 불끈 솟았다. 그들 주변을 빠르게 관찰했다. 저 사람들 술까지 마시고 있나? 주변에 맥주캔이 보인다. 오, 맥주. 소주가 아니고 맥주니까 아주 취하진 않았을 수도. 아닌가? 딴 데서 마시고 2차나 3차인가? 그렇다면 만취의 가능성이 크다. 성년이냐 미성년자이냐는 어떡하지? 만약 저들이 미성년자가 아니고 미친 동안 어른이라면? 오히려 젊게 봐줬다고 좋아하려나? 어쨌든 여긴 금연 구역이니까 흡연을 자제해 달라는 나의 의견에 동의해 주겠지? 갑자기 생각이 많아졌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생각에 도달했다. 괜히 말 걸었다가 해코지라도 당하면 어떡하지? 눈을 깜빡일 때마다 상상하기도 싫은 무서운 뉴스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순식간에 무서워졌다.
"아니야, 엄마."
"어?"
"그냥 가자!"
당연히 응원해 줄 줄 알았던 하준이가 나를 말린다.
"엄마."
나도 모르게 발끝의 방향을 그들 쪽으로 옮겨졌나 보다. 하준이의 오른손이 내 왼손을 잡는다. 덥석.
"..."
"그냥 가자니까."
열세 살 하준이의 손은 내 손보다도 여실히 크다. 그 손에 힘도 단단히 들어가 있다.
"... 그, 그래. 집에 가자."
"빨리 와."
하준은 손에 힘을 주면서 생각했다. 엄마는 참, 진짜 몰라서 그러는 걸까? 저런 형들은 어차피 말 한마디 한다고 해서 곧이곧대로 알아들을 사람들이 아니다. 하준은 엄마의 손을 더 세게 쥐었다. 그런데 엄마도 지지 않고 세게 쥔다. 심상치 않은 기운. 이것은 분명, 신호다. 한 번 겨뤄 보자는 신호. 하준이도 지지 않고 힘을 더 줬다. 이제 조금만 더 크면 엄마만큼 클 수 있다. 잘하면 엄마를 이길 수 있다. 분명히 하준 자신은 예전보다 키도 크고 체중도 많이 나가고 엄마보다 손도 크고 발도 크고 힘도 훨씬 훨씬 세졌는데 엄마를 이기기는 영 수월하지가 않다. 하준은 팔뚝이 달달 떨릴 만큼 더 세게 힘을 주었다.
"어라?! 진정 해 보자는 것이냐!"
하준이가 잡은 손아귀에 잡힌 만큼 힘을 썼더니 이 녀석 더 힘을 쓴다. 제법이다. 그러나 아직 아니다. 아직 너는 역부족이다. 지금보다 훨씬 어릴 때는 일부러 많이 져 줬지. 그렇게 져 줄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러나 슬렁슬렁 져줬다간 안 되겠다 싶은 나이를 지나더니 지금은 제대로 안 하면 아차 하는 사이에 내가 질 수도 있을 만큼 훌쩍 자랐다. 지금은 진심으로 겨뤄야 이길 수 있다. 그건 인정한다. 그러나, 그러므로, 그래서 진심으로 져주기 싫어졌다. 제법 동등해진 상대방이 전력을 다해 덤비면 나도 전력을 다해 방어한다. 이것이 서로에 대한 예의다. 집으로 가는 길 내내 자랄 만큼 다 자란 어른과 아직 열세 살 아이와 전력으로 승부를 겨뤘다. 엎치락뒤치락 승부가 진지해지면 진지해질수록 깔깔깔깔 웃음이 빵빵 터진다. 휴… 가까스로 나의 승리로 끝났고 나는 오늘은 더 이상의 힘 겨루기는 없음을 선언했다. 꽤 많은 힘을 소진해 다음 판에선 나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나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하준이는 계속 겨루자고 조른다.
"그만. 그만."
하준이가 '띠리링' 현관문 잠기는 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팔씨름을 하자고 덤빈다. 오른손으로 한 판만 해볼까 싶었으나 그보다 먼저 해야 할 급한 일이 있다.
"그만. 엄마 전화부터 먼저 하고."
[네. 감사합니다. 긴급신고 112입니다.]
"안녕하세요. 저기, 저희 집 앞 공원에서 미성년자로 보이는 친구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어서 전화드렸는데요."
나는 처음부터 그들에게 직접 말 걸어볼 생각이 없었다. 당연하게도 혼꾸녕을 내 줄 용기도 없었다. 손이 자유롭지 않았으니 분리수거만 끝내고 112에 전화를 할 참이었다. 다만 돌아오는 길에 그들이 떠났을 수도 있으니 아직 있나 확인해 보려 했었던 거고, 다행보다 불행 쪽에 가깝게 그들은 계속 그 자리에 있었고. 잠시 아들 앞에서 혼내줘 보려는 척 폼이라도 잡아보려 했으나... 하나도 먹히질 않았고.
"네 저희 집 주소가요. 여기가... 네? 네. 폰 위치추적 좋습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네, 그럼 위치추적 동의하셨고 바로 확인하겠습니다.]
112는 항상 친절하다. 통화를 마치고 나니 사건 번호와 함께 접수가 완료되었으니 곧 경찰관이 출동할 거라는 문자가 왔다. 귀하의 휴대전화 위치도 조회 했다는 문자도 왔다. 일전에 오밤중에 편의점에 들렀다가 그 앞 인도에 곤히 주무시던 아저씨를 신고했던 내역도 보인다.
"봐라. 너도 엄마를 본받으란 말이야."
"엄마를? 어떤 거?"
"신고 정신."
“신고 정신?”
"응. 일단 지나쳐. 그냥 다 지나치라는 게 아니라 네가 감당할 수 없는 건 지나치라고.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못 본 척 무시하라는 소리도 아니고 112에 신고를 해. 지금 엄마처럼 신고를 하고, 또 당연히 무슨 일이든 엄마한테 말해줘야 되고."
하준이가 자랄수록 내가 말이 많아진다. 잠시 후, 1층인 우리 집 베란다 바깥으로 경찰차 지나가는 게 보인다. 이제야 아까 잡아보고 싶었던 폼을 의기양양 양껏 잡았다.
"엄마 이제 팔씨름!"
하준이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팔씨름을 하자고 자세를 잡는다. 그러다가 내가 다가가니 다시 자세를 푼다.
"왜? 팔씨름 안 해?"
"엄마 이거 우유 마시고 안 치웠어?"
테이블에 빈 플라스틱 우유통이 놓여 있었다. 내가 냉장고에 있던 걸 꺼내 탈탈 털어 말끔히 마시고 물로 헹구고 나서... 깜빡 테이블 위에 놓은 것이다. 전적으로 나의 실수다. 바로 분리수거함에 넣어놨어야 했는데.
"이걸 빠트리면 어떻게 해? 아까 분리수거 갈 때 못 버렸잖아."
"아! 어떡하지? 엄마가 다시 갔다 올까? 엄마만 가?"
"뭘 다시 가?"
"아니 그 사람들 갔나 안 갔나 궁금하기도 하고. 이것도 버려야 하잖아. 빨리 다녀와?"
"아니야. 그냥 수요일에 해. 겨우 이거 하난데. 괜찮아."
"아... 그런가? 괜찮아?"
"응. 괜찮아."
진짜 다녀오라고 하면 내가 먼저 수요일에 하겠다고 말 바꾸려 했는데 요번엔 하준이가 내 마음을 알아줬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 봐도 분리수거를 한 주에 두 번이나 할 수 있다는 것은 크나 큰 행운이다.
"하준아 그 사람들, 그래도 최소한 미성년자는 아니었으면 좋겠다."
"나도. 나도 그래 엄마."
하준이의 오른손을 잡았다. 팔씨름. 승부다. 절대 봐주지 않겠다.
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