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귤
* 1권 22화와 동일한 등장인물입니다.
지연이 동네 작은 제과점에 스콘을 사러 간다. 막 유치원을 다녀온 정후와 동네 한 바퀴 돌면서 들렀다.
지연은 오랜만에 연차를 냈다. 덩달아 평소에 정후를 픽업해 주는 지연의 엄마도 오늘은 휴가다. 처음 계획은 남편이 출근하고 시후가 등교하고 정후까지 유치원엘 가면 '넷플릭스'에서 찜만 해 두었던 시리즈물 정주행을 하려고 했는데, 언제나 그랬듯 보는 중간에 딱 5분만 잤더니 정후가 하원할 시간이 됐다. 그런데도 느낌은 5분은커녕 3분도 제대로 못 잔 것처럼 피곤하니 시간은 상대적인 게 옳다. 세상의 3시간이 자신에겐 5분도 안 되는 때가 있는 것이다. 확실하다.
"엄마 여기는 저 해모양 때문에 햇빛 놀이터야."
"그러네. 그래서 햇빛놀이터구나."
"자 이제 ABC놀이터로 가 보자. 거기를 무슨 놀이터라고 부르는지 우리가 맞춰야 돼."
"우리? 아, 뭐야? 정후도 몰라?"
"아니, 나는 알아. 그래야 엄마가 정답을 맞히는지 틀렸는지 알 수 있으니까."
이미 정후가 ABC놀이터라고 말을 해버렸지만. 지난 주말, 지지난 주말, 지난달, 지지난 달에도 여기가 왜 햇빛 놀이터인지, 거기는 왜 ABC놀이터인지 또 저기는 왜 레고놀이터인지 한참을 떠들었지만 지연은 또 모른다고 대답해야 한다. 그게 지연의 역할이다. 정후가 내는 문제를 처음엔 몰랐다가 어렵게 겨우 가까스로 맞추거나 혹은 끝까지 못 맞추는 역할. 그리고 정후의 놀이터 지식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야 하는 역할.
"우와! 우리 정후 대단한데! 놀이터 척척박사야. 정후는 우리 동네 놀이터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구나. "
지연이 평소 내는 목소리에서 두 옥타브쯤 올려서 말하면 정후의 어깨가 으쓱 올라간다.
"엄마, ABC놀이터에서는 눈 크게 뜨고 잘 봐야 된다."
지연은 유치원 하원버스에서 정후를 픽업하면 바로 집으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정후의 계획 앞에선 한없이 무용하다. 바로 정후의 계획, 엄마와 함께 하는 놀이터 투어가 시작되었다. 지은 지 20년이 넘은 아파트 단지는 세대수가 많은 만큼 놀이터도 많다. 처음 여기로 이사한 이유가 많은 놀이터가 있어서 이기도 했는데. 이제 그 모든 놀이터마다 들러 미끄럼틀을 한 번씩 타줘야 한다.
"엄마 이 놀이터의 이름은?"
이 놀이터는 우주선 놀이터다.
"아,... 음... 글쎄? 이 놀이터는 이름이 뭘까? 엄마는 너무 어려워서 힌트가 필요해."
"아휴, 정말 또 몰라?"
모르냐고 구박하는 아이의 얼굴이 연신 싱글벙글이다.
"응, 정말 모르겠어. 너무 어려워."
"아휴, 우리가 방금 탄 미끄럼틀이 무슨 모양이야?"
"저거?"
"응!"
"어디 보자..."
우주선이란 대답을 하면 되지만 "로켓"이라고 대답했다.
"엄마, 그거 말고 세 글자. 세 글자. 우로 시작하는 거 우로 시작하는 세 글자."
"아... 알겠다."
"..."
"우리 집!"
"아 엄마 땡! 우주선이잖아!"
"아... 우주선이구나. 이런이런, 엄마가 또 못 맞췄네. 아휴 할 수 없지. 엄마가 아까 약속한 대로 스콘을 사 줄게. 스콘 사러 가자."
"아니야. 조금만 더 놀다 가도 돼."
"아니야. 엄마가 틀렸으니까 벌 받아야지. 벌칙은 꼭 지켜야 되는 거라고. 빨리 가자."
벌칙을 정한 것도 지연이었다. 자꾸 정답을 못 맞히는 스스로를 반성하면서 이번에도 틀리면 스콘을 사주겠다고 선언했다. 지연은 이 벌칙을 꼭 제대로 수행해 잠시라도 놀이터 투어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아휴, 그래. 그러면 엄마가 계속 틀렸으니까 스콘 먹고 힘내보자."
"그래! 힘 내 보자!"
간신히 스콘 가게로 피신 왔다. 단지 상가에 있는, 테이블이 없고 쇼케이스만 있는 작은 가게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어서 오세요. 이 시간에 오신 거 보니까 오늘 휴가 냈나 보다."
"... 안녕하세요."
"아니 정후, 거기 누가 있어?"
정후가 꼭 저런다. 인사를 하면 꼭 대상자의 위치와 상관없이 아무 데고 허리부터 숙인다. 시후도 어릴 때 그랬는데. 일단 인사할 타이밍이라고 여기면 냅다 고개부터 숙이고 영혼 없이 “안녕하세요.” 외치는 거다. 그래서 대부분 허공에 인사한다.
“정후 다시 인사해.”
지연은 정후가 허공에 인사할 때마다 꼭 인사를 다시 시킨다. 정확하게 목표물을 겨냥해서 제대로.
“왜? 인사 한 번 하면 됐지. 괜찮아.”
“아니에요. 정후 다시 해.”
지연이 인사에 집착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딱 정후만 한 나이에 올바르고 정확한 인사를 통해 확실한 이득을 취해봤기 때문이다. 귤. 지연은 인사를 잘해서 귤을 얻는 아이였다.
여섯 살 지연은 잠실의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 주공아파트에 살았다. 당시 집에는 외할머니가 함께 거주하셨는데 지금의 지연처럼 출퇴근하는 엄마 대신 여섯 살 지연과 세 살 남동생을 돌봐주기 위해서였다. 그때는 어린이집이라는 것이 없어서 지연은 하루종일 아파트 단지 주변에서 놀았다. 동네엔 키 작은 어린이 눈엔 엄청나게 커 보이는 나무가 많아 숲 같았다. 지연의 기억 속 어린 지연은 항상 숲 속에서 놀고 있었다. 낮에는 이끼 가득한 나무 사이를 누볐고 밤에는 박쥐를 쫓았다. 어떤 동의 일면식 하나 없는 어느 모르는 아저씨의 우렁찬 고함 소리가 들릴 때까지 매일 뛰어다니며 놀았던 것 같다. 그 아저씨는 거의 매일 똑같은 말을 외쳤다. "야 이놈들아! 네들은 잠도 없냐!" 핸드폰도 없던 어린아이들은 그제야 제대로 된 인사도 안 하고 헤어졌다. 어차피 다 내일 만날 아이들이니 굳이 인사를 하면서 헤어지고 또 인사를 하면서 만날 필요가 없었다. 인사란게 참 무의미했다.
그러던 어느 날. 뛰어다니느라 바쁘디 바쁜 여섯 살 지연에게 세 살 남동생도 데리고 나가라는 할머니의 으름장이 자주 놓여 이에 불만이 불끈불끈 솟아나던 어느 날, 지연은 갑자기 유치원에 보내졌다. 아마도 두 아이를 하루종일 돌보는 것에 할머니의 힘이 부쳐서 일거다. 지연의 기억 속엔 하루종일 밖에서 논 것밖엔 없지만 지연이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많을, 기억 못 하는 어린 시절 시간 속에선 집에서 놀며 할머니를 깜짝깜짝 놀라게 했겠지. 넘어트리고 쓰러트리고. 시후가 여섯 살 때 그랬던 것처럼 정후가 지금 그러는 것처럼. 또 지금은 아저씨가 다 된 남동생을 괴롭히기도 하고. 할머니는 바쁜 엄마를 대신해 집안 살림까지 다 해주셨고 그러려면 잠시라도 여섯 살 지연이 세 살 남동생을 데리고 놀아주기를 바라셨을 거다. 그러나 지연은 항상 남동생이 현관에서 신발을 신는 동안 홀로 도망갔다. 쏜살같이.
어느 날 갑자기 엄마손에 붙들려 간 유치원에는 혼자 다녔다. 아무 어른도 지연을 데려다주는 이는 없었다. 지금은 상상도 못 할 일인데 그때는 가능했나 보다. 당시 유치원 통학버스도 없었으므로 집에서 유치원까지 매일 아침 혼자 걸어 다녔다. 유치원에 갔던 첫날, 그 길을 제대로 숙지해야만 했고 또 잘 해냈다. 심지어 나중에는 엄마가 알려준 길 말고 시장길이라는 새로운 길도 발굴해 냈다. 시장길은 아마도... 정확히 말하면 어느 큰 상가를 관통하는 길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지연이 곰곰이 생각해 보니 시장처럼 크고 긴 길이 가운데 있고 양쪽에 가게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건 시장이 맞는데 장소는 지붕이 있는 실내였다. 어쩌면 어린 지연의 눈에 엄청나게 커 보였던 아파트 사이 나무들처럼 상가도 엄청나게 커 보여서 시장 같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유치원은 심플하게 단지 밖으로 나와 큰길을 따라 걸으면 나오는 어느 상가 건물에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지연이 우산도 없이 집을 나선 아침에 비가 내렸다. 지연은 쏜살같이 달려 항상 호기심만 가지고 있고 들어가 보진 못 했던 아마도 상가 입구였을 시장입구로 들어가 비를 피했다. 오픈 준비에 한창 바쁘던 아줌마 아저씨들이 하나, 둘 지연에게 관심을 두었다. 이른 시간에 웬 꼬마 여자애가 혼자 비를 맞으며 들어왔으니 그럴 만도 하다.
지연은 자신을 바라보는 아줌마, 아저씨들이 처음엔 무서웠다. 확 울어버릴까도 싶었다.
'진짜 울까? 확 운다! 나 울면 장난 아니다! 울 거야! 나 진짜 크게 울 거야!'
울음보를 일발 장진해 막 터트리려던 찰나 매일밤 그만 놀라고 호통치는 그 이름 모를 아저씨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 놈! 어른을 봤으면 인사부터 해야지. 왜 멀뚱멀뚱 가만히 서 있기만 하냐!"
터지려던 지연의 울음보가 쏙 들어갔다. 호통소리는 무서웠지만 한편으론 익숙해 안심이 되었다. 그래서 얼결에 인사를 했다. 거의 머리가 땅에 닿도록 했던 것 같다. 고개는 아줌마, 아저씨들의 웃음소리를 듣고 나서 들었다. 어른들이... 그러고 보니 그때까지 지연이 알던 주변 어른들은 대부분 지연을 향해 인상만 썼다. 할머니도, 엄마도, 아빠도, 옆집 아줌마도, 옆집 아저씨도, 옆동 아줌마도, 옆동 아저씨도, 친구 엄마도, 친구 아빠도. 다들 말도 안 듣고 무어든 반대로만 하려는 어린 애에게 불친절하게 대하는 것은 당연한거라고 했다. 그런데 여기 어른들은 지연을 보고 무어가 재밌는지 키득키득 거리며 웃어 준다. 이내 지연이 맞은 비를 털어주고 왜 이 시간에 너 같은 어린애가 혼자 돌아다니는 거냐고 궁금해했다. 지연은 한치의 거짓 없이 사실을 말했다. 그들은 말도 잘 한다며 칭찬을 해 주더니 가운데 길을 따라 주욱 걸어가 만나는 출구로 나가면 다니는 유치원 앞일 거라고 알려줬다. "옜다." 지연의 손에 귤 두 개를 안겨주면서 말이다.
어린 지연은 아직 거절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대신 "고맙습니다!"라고 말할 줄은 알았다. 평소에는 그렇게 잘 안 했는데 동생보다 더 먹을 궁리만 했었는데 그때는 혼자 있어 그랬는지 고맙단 말이 절로 나왔다. 그리고 귤 때문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그 길이 끝날 때까지 만나는 모든 가게 사장님들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아줌마."
"안녕하세요, 아저씨."
"안녕하세요, 아줌마."
"안녕하세요, 아저씨."
허공에 보이지 않는 영혼에게 하는 것이 아닌 정확하게 목표물을 조준하고 눈빛교환을 한 후 제대로 고개를 숙였다. 간혹 바빠서 지연의 인사를 못 받는 사장님이 있으면 한 번 더 큰 소리로 인사했다. 그러면 옆 가게 사장님이 인사 못 들은 사장님한테 한 마디 해준다. “아가 인사하는데 안 받아주고 뭐 해?" 바빴던 사장님이 화들짝 놀라 지연을 돌아보고 어떤 사장님은 미안하다고 사과까지 해 준다. 지연은 그게 좋았다. 어른들이 양쪽으로 갈라져 줄을 서 지연을 반갑게 맞이하고 지연은 그 한가운데를 걸어간다. 공주님이 된 것처럼 어깨가 으쓱했다. 매일 이 맛에 큰길을 따라가는 짧고 빠른 경로를 놔두고 길고 구불구불한 시장길 혹은 상가길로 돌아서 돌아서 등원했다. 그러려면 집에서 조금 일찍 나서야 했지만 집안 어른들은 그걸 더 반겼다.
또 다른 맛도 있다. 인사를 하면 어떤 사장님은 만두를 줬고 어떤 사장님은 약과를 줬다. 가끔 뜨거운 닭강정 몇 조각을 꼬챙이에 꽂아주는 사장님도 있었다. 그러나 그 시절, 지연이 가장 득템 하고자 했던 아이템은 귤이었다. 귤은 받아서 바로 먹지 않아도 괜찮았다. 유치원 가방에 옷 호주머니에 넣어가지고 가서 유치원에서 친구들이랑 까먹기에 좋았다. 유독 친절한 선생님한테도 줬다. 몇 개는 아끼고 아껴서 집에서 먹었다. 동생은... 항상 할머니가 까주고 먹여주니 장롱에 숨어 혼자 몰래 먹었다. 꿀맛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연이 아팠다. 오전에는 유치원에서 저녁에는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 숲 속에서 정신없이 놀던 지연의 이마에서 열이 펄펄 끓었다. 코가 막혀 입으로만 숨을 쉬니 기침을 심하게 하고 가래도 끓었다. 할머니는 먹기 싫다는 죽을 억지로 떠 먹였다. 그래야 약을 먹을 수 있다고. 그래서 더 죽 먹기 싫다고 지랄발광을 했다. 약은 진짜 맛이 없기 때문이다. 아쉬운 대로 몰래 버리거나 동생에게 먹여 보려고 했는데 웬일로 할머니가 지연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동생이 칭얼거리고 할머니를 찾아도 지연을 바라보는 눈을 끝까지 옮기지 않았으니 하는 수 없이 죽을 먹고 약도 다 먹어야만 했다. 지연은 이 아프고 짜증 나는 상황에서 걱정이 됐다. 아파서 유치원엘 못 갔으니 오늘은 아무에게도 인사를 못 한다. 인사를 하면 얻을 수 있는 간식거리가 자꾸 눈에 밟힌다. 지연은 그 걱정이 태산인데 자꾸 눈커플이 내려온다. 할머니가 이마엔 찬 수건을 올리고 턱밑까지 두꺼운 이불을 덮어준다. 수건은 너무 축축해서 싫고 이불은 너무 무거워서 싫었는데 몰려드는 잠에 아무것도 못 하고 잠이 들었다.
"엄마, 지연이는 좀 어때? 자? 괜찮아? "
"네가 들여다봐라. 열은 내린 것 같던데."
자신이 흘린 땀에 흥건지 젖은 지연이 퇴근한 엄마 목소리에 눈을 떴다. 안 아프다. 아직 코는 좀 막힌 것 같고 목은 침 넘길 때 좀 따갑지만 오늘 아침처럼 아프진 않다. 어쩐지 몸에 기운이 넘치는 것 같다. 지연은 힘껏 자신을 짓누르는 무거운 이불을 걷어찼다.
"송지연! 이불 덮어야지! 이놈의 계집애가!"
엄마는 지연을 보자마자 소리부터 질렀다. 지연은 여보란 듯이 이불을 더 발로 찼다. 막 찼다.
"송지연 그만해! 먼지 나잖아! 그만!"
지연이 발길질을 멈추자 그제야 엄마가 지연 곁에 앉았고 땀에 젖은 지연의 얼굴을 맨손으로 닦아 주었다.
"아휴, 이 땀 좀 봐. 내복까지 다 젖었네."
"거 봐라. 내가 땀 쫘악 빼면 열 내릴 거라고 했지.
"..."
아침에 할머니랑 엄마랑 투덕거렸나 보다. 아마 지연의 간병 방법을 두고 의견차가 낫겠지. 지금의 지연이 그때는 할머니 딸이었던 엄마와 육아 방법을 두고 투덕거리는 것처럼.
"엄마 나 바나나 먹고 싶어."
"바나나?"
지연은 엄마의 친절한 모습에 이때다 싶어서 바나나 사 줄 것을 요구했다. 아플 땐 바나나가 최고다. 여섯 살 지연이가 사는 때는 1990년대 초로 바나나의 위상이 지금 같지 않을 때다. 흡사 애플망고급. 아니 그보다 더 높을 수도 있다.
"엄마, 나 바나나 사 주라. 바나나."
엄마는 바나나를 사달라는, 오늘 낮까지 열이 펄펄 끓었던 자신의 아이 지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연은 엄마가 바나나를 사 줄지 안 사 줄지에만 관심이 갔다. 그러니 아무 대답 없이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는 엄마를 참을 수 없어 이불 차던 발을 동동 구르고 팔도 휘둘렀다.
"바나나 없어. 귤 먹어."
"귤?"
"그래 귤. 네가 그랬다며 귤이 세상에서 제일 좋다고. 바나나보다 최고라고."
흠, 그러긴 그랬지. 지연은 등원길에 인사를 잘하고 귤을 받으면서 사장님들께 바나나보다 좋아하는 최고의 과일이라는 말을 자주 남겼다. 그런데 엄마는 어떻게 알았을까?
"너 아침마다 유치원 갈 때 가게 앞으로 다녔어?"
"가게 앞?"
가게 앞이란 말을 쉽게 이해 못 한 지연은 무슨 소리지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아침마다 인사하는 사장님들의 가게를 말하는 건가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응!"
나중에 알았는데 지연은 그 등원 시장길을 처음 간 게 아니었다. 엄마가 주말에 장 보러 갈 때 자주 따라 간 장소인데 동행인 없이, 가는 시간대가 바뀌고 오픈 준비하는 모습에 풍경이 다르니 완전히 처음 갔던 장소로 착각한 것이다. 인사를 잘하는 수다쟁이 꼬마 지연은 엄마랑 갔을 땐 엄마 뒤에 숨어서 다닌 수줍은 아이였다.
"엄마 퇴근하면서 장 보러 갔더니 아침에 너 안 보였다고 무슨 일인지 걱정하시더라. 이 귤은 건어물가게 사장님이 너 주라고 주신 거야."
건어물가게 사장님 누군지 안다. 엄청 퉁퉁하게 생긴 목소리 큰 아줌마인데 시간에 여유가 있을 땐 지연의 머리를 예쁘게 따아주는 분이다. 그 덕분에 등원길의 지연은 한껏 더 예뻐질 수 있었다. 물론 집에 올 때즈음엔 다시 헝클어진 머리로 돌아왔지만.
"뭐 해? 동생이랑 나눠 먹어야지."
지연이 비닐봉지채 들고 혼자 까먹으려고 하자 엄마가 동생을 챙기랜다. 동생은, 동생은 외할머니가 갈치를 발라줘서 밥을 먹고 있었다. 갈치... 지연은 갈치를 못 먹는다. 가시 때문이다. 지연도 가시 발라주는 어른이 있었다면 반찬투정을 안 할 수 있었을 텐데.
"싫어. 귤은 내 거야! 준호는 귤 싫어해!"
엄마는 심통 부리는 지연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평상시 같으면 저 물색없는 모습에 벌써 혼내고도 남았을 텐데 오늘은 그렇게 안 됐다. 오늘 딸 지연이 아프다는 말에 오랜만에 이른 퇴근을 했고 그래서 오랜만에 장을 보러 들를 수 있었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과일가게 사장님이 지연이 엄마를 걱정했다.
"지연이 엄마 괜찮아?"
"네?"
"아니, 너무 참고만 살지 말어."
미용실 사장님도 지연이 엄마를 걱정했고 상표가 안 붙은 연고를 줬다.
"이거 멍든 데 바르면 좋아."
건어물가게 사장님은 걱정도 해줬지만 싫은 소리도 했다.
"그래도 그러는 거 아니야. 하나밖에 없는 딸인데 아침에 좀 더 신경 좀 써 줘. 힘든 거 아는데 그래도 그러는 는 거 아니야."
외국과자 사장님도 걱정해 줬다.
"저기... 지연이 엄마 힘내. 좋은 시절도 올 거야."
그들은 남편의 외박이 잦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가 어쩌다 집에 오는 날엔 자신이 맞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간혹 밥상 다리가 부러져 바닥에 신문을 깔고 밥을 먹어야만 했던 것도 알고 있었고 지연이 잠들고 나서 엄마와 서로 붙잡고 운 것도 알고 있었다. 온 가게 사장님들이 알고 있었다. 아침마다 요 쪼끄만 게 들러서 미주알고주알 떠들어 댄 거다. 그리고 이 말도 덧붙였다. 다들 지연이 예쁘다고. 예쁘고 야무지고 인사도 아주 잘한다고 칭찬했다. 그러면서 다들 하나같이 자신의 손에 귤을 쥐어줬다. 지연이 갖다 주라고. 세상 사람들 모두 자신의 딸 지연이에 대해서 아는 걸 자신만 모르는 것 같았다.
"지연아, 일루 와."
내복바람에 땀에 붙은 헝클어진 머리로 귤봉지를 끌어안고 누가 뺏어 갈까 등까지 돌리고 있는 자신의 딸을 안아보았다. 분명 많이 자랐는데도 많이 작았다. 품 안에 쏙 들어오는 아기 때 안아 보고 처음 안아 본 것 같다. 그만큼 기억에 남도록 안아 준 적이 없었나 보다.
지연은 엄마가 갑자기 안아보자고 하자 어리둥절했다. 아팠다가 나아서 그런지 배가 고파 맛있는 귤로 배를 채우려던 참인데 엄마가 감은 팔을 쉬이 풀어주지 않는다. 그런데 기분은 나쁘지 않아 잠시 가만히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엄마가 우는 것 같다. 어른이 울다니 말도 안 된다. 말도 안 되는 일이기 때문에 지연은 엄마가 우는지 물어볼 수는 없었다. 엄마는 한여름에도 목까지 올라오는 옷을 자주 입는다. 살짝 귀아래 옷을 내려 보니 파란 멍이 보인다. 지난번 아빠가 다녀간 이후로 생긴 거다. 그전엔 없었으니까. 지연은 가만히 늘어트려 놓기만 했던 자신의 팔을 들어 엄마의 목을 감았다. 그러니까 엄마의 어깨가 바들바들 떨린다. 떨지 말라고 감았던 팔에 힘을 주어 꽉 잡아주었다.
하필이면 그날 밤, 아빠가 왔다. 지난주에 오고 처음 온 것 같은데. 지연은 그동안 아빠가 엄마한테 소리치는 것만 들어왔는데 그날 밤엔 엄마도 아빠한테 소리쳤다. 여느 때처럼 아빠가 엄마한테 뭘 던지는 것 같았고 이번엔 엄마도 아빠한테 뭘 던지는 것 같았다. 와장창창, 무언가 깨지고 박살 나는 소리가 났다. 그게 무얼까 궁금해 고개를 들었는데 할머니가 또 여느 때처럼 지연의 머리를 감쌌다. 그럴 때 할머니의 힘은 정말 세다. 남동생은 지연이 꽉 안았고 지연이는 할머니가 꽉 안았다. 셋은 그렇게 여느 때처럼 화장실에 조용히 있었다. 그날 여느 때 같지 않았던 건 엄마뿐이었다.
며칠 후, 지연이네는 이사했다. 잠실이 있던 서울을 떠나 경기도 수도권으로 나온 것이다. 이사하고 나서도 한참을 아빠가 안 보이길래 여느 때보다 아빠의 외박이 길어진 걸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새로 이사 간 집은 아빠가 가끔 찾아오는 집이 아닌 아예 찾아오지 않는 집이 되었다. 항상 남동생만 감싸고 놀던 할머니도 지연이를 예뻐해 주기 시작했고. 아니 지연 생각엔 동생 준호보다 자신을 더 예뻐하는 게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였다. 새로운 집은 그만큼 좋았다. 단지 마음에 단단히 걸리는 게 하나 있을 뿐.
유치원 등원길 가게 사장님들에게 작별 인사를 못 하고 왔다. 어느 날 갑자기 아프지도 않았는데 유치원에 가지 말라고 했고 그날 모르는 아저씨들이 우르르 찾아와 집안 가구를 모두 들고나갔다. 하긴 그 전날 옷가지며 잡동사니를 라면박스에 넣을 때부터 뭔가 두근거리긴 했다. 뭐가 뭔지 모르는 지연은 왠지 신이 났다. 내일 유치원에 갈 때 이 사실을 사장님들한테 이야기할 생각에 마구마구 흥분됐다. 그런데 그날 저녁 모르는 집에 와 있었고 다음 날 모르는 집에서 눈을 떴다. 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에도 계속 모르는 집에서 눈을 떴다.
새 동네에선 다시 유치원을 안 다니게 되었다. 그냥 원래 하던 데로 무작정 밖으로 나갔고 모르는 애들이 뛰고 있길래 같이 뛰었다. 어느새 그 친구들과 여기저기 탐험하러 다니느라 매우 바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유치원 따위 갈 시간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렇게 바쁜 가운데에도 문득문득 사장님들 생각이 났다. 가끔 할머니나 엄마한테 옛날동네 사장님들 보고 싶다고 말하면 엄마와 할머니는 아직은 아니라고 조금 나중에, 많이 조금 나중에 데려다준다는 말만 했다. 어떤 날은 그들이 너무 보고 싶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런데 옛날집 이야기를 하면 언뜻언뜻 할머니와 엄마의 얼굴에서 너무 가고 싶다는 말을 하면 안 될 것 같은 눈치가 보여 눈물을 삼키고 생떼도 참아냈다. 더 열심히 친구들과 놀았다.
아주 가끔 혼자 찾아가 볼까 싶은 계획을 세우기도 했지만 과자를 사 먹느라 다행히 차비를 모으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자칫 미아가 될 수 있는 역대급 사고를 칠 뻔한 것이다.
아빠는... 초등학교 입학할 때는 못 봤고 중학교 입학할 때 즈음 비로소 만날 수 있었다.
"정후 이거 먹을래?"
지연의 강요로 정후가 깔끔한 90도 인사를 해내자 스콘집 사장님이 예쁘다고 '무화과 휘낭시에'를 건넨다. 심지어 방금 오븐에서 따끈따끈한 걸 내준 거다.
"아니요. 괜찮아요."
지연이 속으로 탄성을 내질렀다. 왜 괜찮다고 하는가! 그냥 고맙습니다 받아오면 엄마인 자신이 맛있게 먹을 텐데! 그렇게 아쉬운 찰나,
"그건 우리 엄마가 좋아하고요. 저는 저 초코, 저 초코를 좋아해요."
정후가 너무나도 뻔뻔하게 공짜로 받는 아이템의 메뉴 변경을 요청한다. 사장님의 웃음보가 터졌다.
"와, 너 누구 아들이길래 이렇게 뻔뻔한 거니?"
"누구 아들이긴, 시후 엄마 아들이지. 아니 어쩜 하는 짓도 시후 어릴 때랑 똑같네."
"아빠 닮았어. 아빠 닮아서 그래."
"아니야. 껍데기는 아빠 닮았는데 멘탈은 딱 엄마네요."
초코마들렌. 정후는 자신이 요청한 초코마들렌이 손에 들어오자 90도가 아닌, 120도 인사를 했다. 정확하게 사장님이란 목표물을 조준해서, 한 치의 어긋남 없이.
"그런데요. 형은 옛날에는 저처럼 초코 좋아했었는데요. 지금은 젤리가 더 좋데요. 그래서 형이랑 옛날에는 엄청 싸웠는데 지금은 옛날보다 덜 싸워요. 그런데 제가 젤리를 같이 먹으려고 하면 옛날처럼 싸울 수 있어요. 그런데 저도 언제는 젤리가 먹고 싶을 때도 있거든요. 그러면 제 초코를 엄마가 다 먹어서..."
지연은 눈이 동그래져서 아들 정후의 볼을 쭈와악 쥐었다. 갑자기 정후의 입이 터져 미주알고주알 집에서 있었던 일들을 말하기 시작하는 거다.
"정후야, 우리 할머니한테 전화해 볼까? 할머니 뭐 하고 계시나 궁금하니까."
"아? 그럴까?"
지연은 스콘에 휘낭시에 몇 개와 마들렌 몇 개를 더 얹어 사고 가게를 나섰다.
'사장님 말이 맞나?'
분명 이목구비가 너무 신랑 얼굴이라 항상 섭섭하다고 투정 부렸었는데 지금 보니 확실히 지연의 DNA도 심어져 있는 것 같다. 어릴 때 엄마한테 혼날 때면 "너도 꼭 너 같은 자식 낳아봐라."라는 말을 듣곤 했는데 진짜 엄마말대로 꼭 '나'같은 자식을 낳은 것도 같다. 왠지 쑥스러우면서 기분이 좋다.
"엄마 할머니가 전화 그냥 끊었어."
"응? 왜?"
"할머니 영화 보고 있데. 끝나면 전화한데."
"아, 그렇구나. 할머니 무슨 영화 보는데?"
"그거야 모르지. 극장이라 할머니가 엄청 빨리 끊었단 말이야. 엄마는 극장에서 전화하면 안 되는 거 몰라?"
"우와! 엄마는 몰랐지. 앞으로 엄마도 꼭 그럴게."
다시 놀이터로 향했다. 오늘 정후 학원은 제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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