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가을밤
"택시! 택시!"
겨울 오밤중이었다. 후드를 쓰고 후드 입구에 달린 줄을 주욱 당겨 눈, 코, 입만 보도시 빼놓고 꽁꽁 묶었다. 칭칭 감아 두른 듯 롱패딩의 지퍼를 턱 밑까지 바짝 채우고 패딩부츠와 맞닿아 있는 하단 줄도 당겨 묶어 오므렸다. 보폭을 크게 늘릴 수 없었지만 전혀 괜찮았다. 바닥에서 쳐 올라오는 찬바람을 방어하는 게 우선이다. 손모아 장갑을 쓰고 패딩 호주머니에 푹 들어가 있는 손가락은 시리다 못해 아렸고 패딩부츠 속 두 발은 내 발이 아닌 것처럼 얼어가면서 오로지 발가락 끝의 간지러움으로 존재감을 발하고 있었다. 딛고 있는 땅이 차도 너무 차서 절로 오른발이 닿자마자 왼발이 땅에서 떨어졌다. 그렇게 잔걸음으로 동동 구르며 신촌역 도로 한복판까지 야금야금 뛰쳐나와 택시를 잡으려는데... 진짜 미치도록 안 잡힌다.
"은다. 택시 안 와. 그냥 포기해."
인도 끝자락에 겨우 걸터앉아 추위와 함께 졸음과도 사투를 벌이고 있는 규이가 다겸을 말려보았다.
"싫어. 너무 춥잖아! 아무리 겨울이어도 그렇지. 누가 사계절 뚜렷한 나라 아니랄 까봐... 해도 해도 너무하게 너무 춥잖아. 너무 추워서... 꼭 택시 잡을 거라고... 꼭... 꼭 잡아서 따뜻한 데로 갈 거야... 나 꼭 갈 거야... 꼭 가고 싶어."
은다. 은 씨 성에 이름이 다겸. 은다겸은 아까부터 코를 훌쩍이고 있었는데 빨갛게 언 코에서만 들락날락거리던 맑은 콧물의 양이 점점 많아지나 싶더니 이제 눈에서 흐른다. 주룩주룩. 이러면 콧물이 눈물이 되는데. 음, 너무 추워 눈알까지 얼어붙을 뻔했으므로 오히려 눈물이 흐르는 게 잘 된 걸지도.
"뭐야? 야, 은다? 너 울어?"
규이의 취기가 달아났다. 다는 아니고 고개만 슬쩍 들어 올릴 만큼만. 쓸데없이 과한 열기로 택시만 애타게 부르짖던 다겸이 우는 소리를 낸 것 같다. 확인 차 눈꺼풀을 열심히 들어 올려도 눈앞에 초점을 맞추는 게 힘겨웠다. 흐릿하게 보이는 다겸을 또렷하게 바라보기 위해 정신을 가다듬었다. 머리가 가만히만 있다면 더 수월할 것 같은데. 머리와 어깨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진자운동을 하고 있었다. 왼쪽으로 기운만큼 오른쪽으로 기울고 오른쪽으로 기운만큼 왼쪽으로 기운다. 좌우로 공평하게, 천천히. 완전히 무계중심이 넘어가 쓰러지지 않을 만큼만, 아슬아슬하게. 진폭을 줄여보기 위해 깊은 호흡을 해보았다. 후우, 스읍... 아, 날숨에서 나는 술냄새를 들숨으로 들이마시니 취기만 더 오른다.
"엉, 엉. 빡규. 너무 우우우 추, 추워. 엉, 엉. 택시도 드럽게 안, 아아아아 안 잡히고. 으허허어엉. 이이잉."
다겸이 제대로 울기 시작했다. 성이 박 씨요 이름이 규이인 빡규 규이는 다겸이 제대로 내는 울음소리에 아득해지는 정신을 가까스로 부여잡고 다겸이 했던 잘못된 선택을 되짚었다.
"그러니까 아까 경찰차 왔을 때 숨어 있지 말자고 했잖아. 걔네랑 같이 가자고 했잖아. 아무리 쪽팔려도 그러자고 했잖아."
"으어어엉, 쪽팔린 게 아니고 무서워서라고. 경찰 무섭잖아."
"경찰이 왜 무서워? 그리고 택시 있을 거라며!"
"내가 알았냐고? 내가 이렇게 택시가 안 잡힐 줄 알았냐고? 나도호오오오 이럴 줄 알았으면 경찰차 왔을 때 어떻게든 거기 타고 갔지. 으엉, 끄어억, 꺼억. 엉 엉."
다겸과 규이는 몇 시간 전 K대 체육학과 남자 애들 두 명과 급벙 술을 마셨다. 즉 오늘 처음 만난 녀석들과 술판을 벌였단 소리다. 22살 동갑내기들. 그들 중 한 명이 다겸에게 먼저 DM을 보냈다. 친구 하고 싶다고. 다겸이 올린 피드를 재밌게 보았다고. 반듯하게 세운 맥주병에 다른 맥주병을 살짝 기울여 크라운 뚜껑 모서리를 겹치게 쥐고 바닥에 탕 치면 위에 걸쳐진 병의 크라운 뚜껑이 로켓이 발사된 듯 천장으로 솟구친다. (그러므로 이 병 따는 방법은 실내에서 하지 않을 것을 권한다. 천장에 구멍이 날 수도 있고 조명이 깨질 수도 있으며 천장에서 다시 튕겨져 나와 누군가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도 기물 파손도 일으킬 수 있다.) 다겸은 편의점 앞에서 찍힌 이렇게 병 따는 모습을 자신의 SNS 계정에 올렸다. 이 모습에 K대 학생 중 한 명이 호기심을 보인 것이다. 다겸은 DM을 받자마자 같은 H대 술친구 규이에게 같이 놀자고 제안했고 바로 수락했다. 몇 시간 전 술판은 이렇게 성사되었다.
SNS계정 속 남자 애들은 얼굴이 엄청 하얗고 뽀얬다. 앱보정을 무지막지하게 한 건 줄 알았는데... 이목구비 생김새와 비율 같은 것만 손댔나 보다. 피부는 실물이 더 좋은 애들이 나왔다. 아니 체육학과라면서... O리브영 세일기간과 현재 가장 핫한 뷰티템들까지 줄줄이 꾀고 있었다. 다겸은 자신이 가졌던 얕은 선입견을 반성하며 술자리에 성실하게 임했다.
자칭 술 좀 마신다던 그 애들은 1차까진 어찌어찌 버티더니 2차를 시작하고 얼마 안 가 하나씩 하나씩 정신줄을 놓기 시작했다. 처음엔 원샷으로 들이키다가 중간부터는 잘 꺾어마시나 싶더니 다시 소주를 맹물 마시듯 원샷으로 들이키는, 어떠한 사건이 외부의 관측자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경계를 이르는 말 사건의 지평선 너머로 건너 갔다. 맛이 갔다. 완전히.
"얘네 진짜 둘이 친하긴 친한 가 봐. 아주 둘이 떨어질 줄을 모르네."
계산을 하고 나온 규이와 다겸은 찬 겨울 길바닥에 나동그라져 있는 두 사내 녀석들을 보았다. 술에 취해 저렇게까지 기절해서 그것도 동시에 잠드는 애들을 오랜만에 본 것 같았다. 그래도 괜히 이기지도 못 할 거 더 마시자고 큰 소리 내다 고꾸라져서 턱이 찢어진 애보다도 자기 성질 못 이겨서 모르는 사람 혹은 아는 사람에게 시비 걸다 예정에도 없던 깽값 물어대는 애보다도 낫다. 참 낫다. 낫긴 나은데...
"야, 이거 어떡하냐?"
쟤네, 그냥 내버려 두면 얼어 죽겠지. 다겸은 길에 사람이 쓰러져 있다고 경찰에 신고했다. 그리고 규이와 함께 적당히 거리를 두고 경찰이 오기 전까지 괜히 험한 사람한테 지갑이라도 털릴까 지켜봐 주었다. 곁이 아닌 거리를 둔 이유는 길바닥에서 뻗은 그들과 일행처럼 보이기 싫어서다. 경찰은 3분도 안되어 나타났고 그 두 녀석들은 거의 질질 끌려가다시피 경찰차로 실려갔다. 그렇게 보내고 바로 택시를 잡아타서 깔끔하게 귀가하려고 했던 건데 참 되는 일이 없다. 차라리 당당하게 일행인 척, 못 이기는 척 경찰차를 얻어 타고 안전하게 경찰서로 끌려(?) 갈 것을. 지금 너무 춥다. 다겸은 두 녀석이 창피하다고 한심하다고 걱정했던 수분 전 자신의 오만함에 더 서러워졌다.
"뚝! 은다, 그만 울어."
"으허허허허엉 어떻게 그만 울어. 으허허어. 너무 추운데. 이렇게 추운데."
규이는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눈높이가 그거 조금 높아졌다고 자칫 먹은 것을 다 토해낼 것 같은 어지러움이 몰려온다. 눈앞의 세상이 빙글빙글 돈다. 아무리 지구가 돌기로서니 자신을 중심으로 돌지는 않을 텐데. 자신은 태양이 아닌데. 눈을 감고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도는 게 아니 도는 건 아니지만.
"세은이한테 가자. 여기서 가깝잖아."
"세헤헤에에 으흐흐흐흔 이?"
"아, 그래 그러니까 좀 그만 흐더덕 거리고 진정 좀 해."
"안 돼헤에에. 세은이가 흐어어 우리 술 취해서 오면 죽인다고 했잖아."
제주도에서 와 혼자 사는 세은은 며칠 전까지 다겸, 규이와 함께 동트는 아침까지 달리던 친구였으나 최근에 함께 달리는 것을 중단했다. 지난가을 A형 간염에 걸려 입원했었기 때문이다. 하여 당분간 금주.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공식적으로 다겸과 규이도 자신의 집 출입을 금지시켰다. 얼굴 보면 술 생각이 절실히 나 안 된다고.
"은다. 은다겸아. 다겸아 너 여기서 얼어 죽을래? 따뜻한 세은이 집에서 맞아 죽을래?"
다겸의 눈물이 쏙 들어갔다. 바로 세은의 집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고 보니 그 겨울보다 앞 선 여름, 다겸은 명동에서 세은과 밤을 지새웠다. 명동역 3번 출구에 있는,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어느 노포에서 막걸리를 거나하게 마신 후였다. 영화 보는 걸 좋아하는 규이가 가입하자고 했던 어느 독립 영화 감상 소모임의 뒤풀이였다. 그래놓고선 하필 그 날 보는 영화가 땡기지 않는다며 규이는 빠진 날이었고. 영화는 뒷전, 술이 목적이었던 다겸과 세은만이 신나게 막걸리를 즐겼다. 얼마 안 있어 정신을 차려보니 다겸과 세은 둘 만 남겨졌다. 명동역 3번 출구 앞에 덩그러니. 뭐 괜찮았다.
열대야가 한창인 여름의 그 정중앙밤. 새벽 2시가 가까워진 시간 어차피 지하철도 시내버스도 끊겼겠다, 동교동에 있는 세은의 집으로 가려면 택시를 타는 수밖에 없었는데 둘은 그렇게 택시 탈 돈이 있으면 맥주나 더 마시자고 뜻을 모았다. 여름밤은 겨울밤과는 달리 비만 오지 않는다면 밖에서 얼마든지 버틸 수 있었다. 최소한 덥다고 죽을 일은 없지 싶었다. 바로 편의점에서 더위를 쫓기 위한 시원한 캔맥주를 샀다.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지열에 공기까지 끈적끈적했던 밤 편의점 앞 파라솔 의자에 앉아 조금이나마 시원한 맥주로라도 더위를 달래 보려는데 세은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다겸은 그런 세은을 이리 쳐보고 저리 쳐보다 포기하고 그냥 테이블에 자신의 가방을 두고 그걸 베개 삼아 엎드려 자게 했다. 그리고 차가운 맥주가 김 세기 전에 얼른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그때 거대한 위기가 닥쳤다. 오줌이 마려웠던 것이다. 필시 방금 전 목구멍으로 넘긴 맥주가 화근일 터. 자칫 큰 실수를 할 것 같은 두려움에 눈물까지 그렁그렁 차오른 뿌연 시선으로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을 쳐다봤다. 이런, 아르바이트생도 꾸벅꾸벅 졸고 있다! 저 자를 깨워 어떻게 하면 무사히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는지 물어보고 자시고 할 여유가 없었다. 다겸의 얼굴이 더워서인지 혹은 당황해서인지 모를 땀으로 흥건하게 뒤덮였다. 무엇이든 가만히 있어선 안되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 존재하는 골목이라고 부르기에도 애매한 좁은 틈. 할 수 없다. 컴컴해서 무어가 튀어나올지 모를 저 틈으로 들어가자. 무서운 건 잠깐이라고! 할 수 있다!'
결심이 선 순간 찰랑찰랑 고여 있던 눈물이 땀과 땀 사이로 흘러 내렸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사라진 눈물과 함께 찾아온 또렷한 시야에 P시픽 호텔이 마치 존재하지 않던 건물이 짠하고 솟아난 것처럼 나타났다.
"은다! 그때 나만 두고 가버린 줄 알고 내가 얼마나 놀랬는지 알아?"
규이가 세은의 집 화장실 변기에 저녁에 먹은 걸 도루 입 밖으로 꺼내는 내내 다겸은 세은으로부터 술 먹고 오밤중에 찾아왔다고 혼이 났고 지난 수업시간 지각에 관한 잔소리도 들었고 처음 만났던 OT에서 담배 피운다고 빌려갔다가 돌려주지 못 한 라이터를 가지고도 이미 여러 번 했던 소리를 또 들었고 여름 P시픽 호텔 앞에서의 섭섭함도 계속 들어야만 했다. 아휴, 차라리 맞아 죽고 말지. 세은은 잔소리로 말려 죽일 기세다.
"그때는 진짜 화장실만 간 거였다니까. 진짜 오줌을 너무 참아서 시간이 오래 걸린 것뿐이야."
"뻥치시네. 너는 무슨 오줌을 똥보다 오래 싸냐?"
"왜 내 말을 아직도 안 믿어 주냐? 진짜라니까."
오줌이 급해 좀비 떼에 쫓기듯 달려들어간 한밤중의 호텔 1층 로비엔 아무도 없었다. 하긴 누가 있었다 한들 제대로 양해를 구하지도 못했을 거다. 다겸은 본능적으로 화장실 픽토그램을 찾아냈고 거의 텔레포트하듯 변기 앞으로 이동했다. 건물과 건물 틈까지 고려했던 순간을 생각하면 호텔의 공용 화장실 변기는 오성급 호텔의 스위트룸과 맞먹는 자리였다. 사방이 뻥 뚫린 열대야가 지글거리는 야외보다 사방이 꽉 막히고 에어컨이 가동되는 실내가 훨씬 쾌적했다. 이대로 지하철 첫 차 시간까지 머무르고 싶었다. 그러나 세은이... 잠든 세은이가 밖에 있었고 자신의 가방도 거기 있다. 다겸은 큰 선택의 갈림길에서 눈을 평소보다 길게 감았다가 떴다. 정말 딱 한 번 깜빡이고 호텔 밖으로 나섰다. 로비에는 여전히 아무도 없었고 편의점 앞에 있어야 할 세은도 없었다.
“은다겸!"
세은은 그 잠깐 사이에 잠에서 깨어났고 가방만 남겨두고 사라진 다겸 때문에 명동 골목을 헤맸다고 한다. 큰 소리로 다겸의 이름을 외치면러. 다겸이 핸드폰까지 가방에 넣어두고 가 연락이 닿을 수 없었으니 당연히 놀랄 수밖에.
"이제 그만 인정해. 깜빡 잠들었었다고 인정하라고. 나는 길바닥에 내버려 두고 너는 쾌적한 변기에서 잘 잤다고 인정하라고."
규이가 화장실에서 나왔다. 양볼은 홀쭉해졌지만 안색은 맑아 보였다. 결정적으로 졸음까지 싹 달아난 얼굴이 되었다.
"아니라니까. 진짜 오줌을 기일게 아주 기일게 쌌을 뿐이야."
별도 달도 잠들법한 새벽인데 셋 모두 눈이 말똥말똥 해졌다.
"진짜 니들은 언제 철 들래?"
잠시 잠정적 금주중인 세은이 마치 10년 금주인생을 살아온 큰 어른처럼 으스댔다.
"그러다 밖에서 객사하면 어떡하려고 그래. 겨울은 추워서 죽고 여름은 더워서 죽는다고."
"뭐래? 봄은?"
"봄은... 바빠. 봄은 그냥 뭐든 바빠. 너무 휙 왔다가 휙 가서 겨울에 마시던 술자리가 여름에 끝나는 것 같애."
"나는 알러지 때문에 봄은 반대. 황사 때문에 안돼."
"밖에서 마시는 밤은 그때 그 우리 연극 보고 대학로에서 마셨을 때, 그때가 제일 좋았어."
"언제? 그 마로니에?"
"10월 달에?"
"응."
그날 대중교통이 잠시 멈추는 새벽, 10월의 마로니에 공원은 조용했다. 낮만큼 사람이 바글바글하진 않아도 삼삼오오 제법 있었는데도 조용했다. 아니 분명히 두런두런 소리는 나는데 고요했다. 바람은 딱 좋게 선선했고 다겸, 규이, 세은 세 친구는 가장 좋은 날씨에 가장 조용하게 술잔을 기울였다. 초록병에 든 소주를 각자의 텀블러에 담아 홀짝였고 빈 초록병은 핸드폰 라이트를 켜고 그 위에 올려놓았다. 예쁜 그린라이트. 유난히 왁자지껄하지 않았는데 유난히 즐거웠다. 돌아가면서 각자의 플레이리스트에 있는 음악을 틀었는데 규이와 세은은 다겸의 플레이리스트에 적잖이 술렁이기도 했다. 매번 음악차트 Top100을 백색소음처럼 듣던 다겸이 샹송가수 <파트리시아 카스 Patricia Kaas>의 [Mon mec a moi]를 플레이했기 때문이다. 사실 샹송이라곤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의 [La vie en rose]밖에 모르던 규이와 세은은 파트리시아 카스라는 가수가 있는지도 몰랐고 당연히 그녀의 목소리도 처음 들었다.
"뭐야? 은다. 네가 어떻게 샹송을 들어?"
"어떻게가 어딨어. 그냥 듣는 거지."
다겸은 고등학교 때 음악선생님이 어느 날 그냥 들려준 노래라 아는 거라고 했다. 세은이 그 음악선생님에게 어리둥절하는 사이 규이가 먼저 노래에 적응했다.
"오, 이 목소리 인순이와 이은미의 그 중간 어디쯤이다."
규이가 리듬을 타면서 노래를 따라 아기 옹알이 하듯 흥얼거렸다. 세은은 무언가 검색했고.
"은다. 이거 1988년 노래야. 옛날 노래. 좋은데?"
세은도 텀블러의 소주를 조금씩 홀짝이면서 얼굴을 씰룩거렸다. [Mon mec a moi]에 이어서 <파트리시아 카스 Patricia Kaas>의 [Kennedy Rose]가 나왔기 때문이다. 이 노래를 들으면서 얼굴을 무표정으로 두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일 것이다. 셋은 각자의 박자와 속도로 어깨와 표정을 꿈틀거렸다.
"근데 이거 뜻은 알아? 가사 내용 같은 거."
"설마... 알아야 돼?"
"아니 당연히 몰라도 돼."
"나만 그래?"
"뭐가?"
"프랑스 사람이 영어로 부르는 노래는 영어가 더 잘 들려. 막 쏙쏙 들어 와."
"어?! 나도."
"어?! 너도?"
조금 떨어진 벤치에 기타 연습을 하는 일행이 있어 서로 방해가 안될 만큼만 음악의 볼륨을 두고 시간을 보냈다. 당연하게도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의 [La vie en rose]를 검색해 듣고 의식의 흐름에 따라 영화 <스타 탄생>의 주인공 <바브라 스트라이샌드(Barbra Streisand)>의 음반도 찾아 들었다. 물론 다른 사람 흉도 보면서. 서로 싫은 사람이 겹치면서 또 그 이유가 겹칠 때마다 어찌나 반갑던지. 지하철 첫차 다니는 시간이 다가오는 게 아까울 정도였다. 밀린 잠은 지하철에서 충분히 잤다. 4호선 혜화역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야 할 동대문역사박물관역을 자느라고 지나쳤고 사당역에서 겨우 갈아탔지만 그대로 2호선을 타고 한 바퀴를 돌았다. 계속 쿨쿨 잠들었기 때문에.
유난히 과거사를 잘 기억하는 세은은 그 가을밤을 완전히 좋다고 말할 순 없다고 한다.
"다 좋았는데 가을 모기가 너무 거슬렸어. 나 진짜 태어나서 그 밤에 제일 많이 물린 것 같애. 더위가 가면 모기가 난리라니까."
졸업을 앞둔 4학년 가을. 의외로 학점 관리를 가장 못 한 즉 대학교 성적표에 등수가 매겨진다면 당당히 꼴찌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을 다겸이 가장 빨리 취업했다. 선릉역에 있는 다큐멘터리 영상을 만드는 어느 스튜디오에 막내 카메라로 들어간 것이다. 타이틀은 카메라였지만 하는 일은 올라운더였다. 정확하게는 카메라 잡는 일 빼고는 다 했다. 장소 섭외, 문서 작성, 섭외 연락, 다시 장소 섭외, 문서 작성, 섭외 연락 그리고 커피 심부름, 식사 주문, 커피 심부름, 식사 주문, 심부름, 주문, 심부름, 주문. 매일매일 아직 졸업 전인 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스튜디오로 향했고, 거기서 야근이 끝나면 밤밥을 빙자한 술자리로의 연속이 반복되는 나날이었다. 다겸은 취업과 동시에 월세 관리비를 반반 부담 하는 조건으로 세은의 집으로 들어갔으니 이 밤도 평소와 같이 카메라 빼고 시키는 일은 뭐든 다 하고 밤밥 메뉴 감자탕에 소주까지 들이키고 나서야 홍대 입구역 2번 출구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나오자마자 마을버스를 기다렸다. 지금 기다리는 버스가 막차다. 바람도 선선하니 걷기에 딱 좋은 날씨였는데 딱히 다리힘을 쓰지도 않았는데 이상하게 걸을 힘이 하나도 없었다.
[은다. 어디야? 늦어? 오는 길에 햇반 사와.]
세은에게 답톡할 기운도 없이 버스 정류장 기둥에 이마를 대고 서 있었는데 길 건너 영업종료를 알리는 깜깜한 삼성플라자 건물 앞에 어떤 아저씨가 보였다. 그는 보도블록 한가운데에 대자로 뻗어 누워 있었다. 정말 한문 큰 대(大) 자의 인간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피해 가고 몇몇 사람들은 그를 살짝살짝 넘어 다닌다. 사람인데 밟히지만 않을 뿐 그냥 튀어나온 돌부리 취급을 당하는 것 같았다. 다겸의 코 끝이 문득 시큰해졌다. 절대 술기운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어쩌면 술기운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고. 아무튼, 다겸의 코끝이 시큰해지고 미간에 주름이 잡히면서 눈가가 찡해졌다. 양 입가는 한껏 끌려내려가니 도저히 저대로 못 본 척할 수가 없었다. 그가 이름 모를 돌부리가 아닌 온전한 사람대접받기를 바랐다.
"아저씨? 아저씨?"
조심스레 그 아저씨 곁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오 마이 갓. 왜 사람들이 이 사람을 돌부리 취급을 했는지 알 것 같기도. 아마도 그가 했을, 대왕 파전만 한 구토물이 그가 걸친 양복 앞판을 뒤덮고 있었다. 다겸은 그 냄새에 콧구멍을 찔려 저절로 자신의 엄지 손가락과 검지 손가락으로 양 콧볼을 꽉 쥐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측은지심이 들었다. 나이는... 막내 삼촌뻘쯤 되려나. 누가 봐도 40대 혹은 50대 초반으로 보일 아저씨가 어쩌다 술을 먹고 이 지경이 되었으려나. 그래도 딱딱한 바닥이 불편할 법한데도 얼굴만큼은 편안해 보여 안심이다. 다만 어쩐 연유인지 그의 왼발에 신겨져 있는 구두와 짝을 이룰 오른발의 구두가 안 보이고 그 오른발도 맨 발이다. 아무래도 술에 취해 누군가와 시비도 붙은 것 같았다. 뭐 보이는 얼굴이나 손, 오른 맨발에 눈에 띌만한 큰 상처는 안 보이니 어떤 시비가 아니면 말고. 그가 코를 골고 있었기 때문에 더 가까이 다가가지 않아도 숨 쉬는 것은 확인되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다겸은 그를 위해 경찰에 신고했다. 아무리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은 가을밤이라지만 길거리에 사람을 이대로 방치해 두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경찰이 올 때까지 그리 멀지 않은 거리를 두고 앉아서 그 아저씨를 지켰다. 혹시나 모를 일을 위해. 그의 지갑이 양복 재킷 안에 온전히 있는지 없는지 혹은 이미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아무것도 모르지만 최소한 왼발에 남아 있는 짝 잃은 외로운 구두라도 지켜주고 싶었다. 장다겸. 이제 경찰이 무서울 나이가 아니라도.
역시 밤은 가을밤이 최고다. 여름이 공기 속 불쾌한 습기를 다 가져갔으니 가을 공기는 이렇게나 뽀송뽀송하고 간혹 은행 꾸릉내가 진동을 하지만 이 또한 가을 냄새라 생각하니 반갑다. 곧 다가올 겨울을 예고하는 찬 공기가 가끔 섞여 들어올 때면 기분 좋게 마음이 개운해지고 뭐든 시작해야 하는 혹은 해야만 할 것 같아 괜시리 조바심 나는 봄과는 다르게 지난 시간 내달렸던 결과물을 죽이 되었든 밥이 되었든 한 번쯤은 내려놔야 할 것 같은 가을에 마음이 편안해진다.
'아, 경찰이 왔나 보다. 경찰아저씨의 무전기 소리 같은 그런 소리가 들린다. 치지직 치지직. 그런데 소리는 가까운데 왜 불빛은 안 보일까... 눈앞이 깜깜하네.'
"내가 못 살아! 내가 못 살아! 은다! 은다겸! 일어나 봐! 일어나 봐 쫌!"
세은이다. 세은이 다겸의 멱살을 쥐고 격렬하게 흔들어서 다겸은 자신의 뇌가 날달걀 속 노른자가 된 것만 같았다.
"왜? 왜? 그만해 봐. 왜 그러는데?"
세은 덕분에 마구 흔들렸던 다겸이 잠에서 깨어났다. 다겸은 두개골 속 노른자를 진정시키고 주변을 파악했다. 음, 여기는 경찰서? 왜?
"나 왜? 왜 여기 있지?"
"네가, 네가 너를 신고했다며! 길바닥에 사람 쓰러져 있다고! 네가 신고하고 경찰서 왔다며!"
"뭐?"
겨우겨우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파악했다. 경찰이 신고자가 말한 장소에 도착했을 때 그 구토물을 덮고 있다던 아저씨는 눈을 떴다고 한다. 그는 정신을 차렸고 안전하게 가지고 있던 지갑 속에서 신분증을 꺼내 적법한 확인까지 마친 후 머리에 베고 있던 오른 구두 속에서 오른 양말을 꺼내 신고 구두까지 잘 신어 안전하게 귀가했다고 했다. 문제는 신고자였다. 신고자가 길바닥에서 새우잠을 자고 있었다는 것이다. 경찰 아저씨가 집이 어딘지, 함께 사는 이는 없는지 계속 물으니 알 수 없는 잠꼬대 중간중간 세은이한테 연락하라고 했다는. 세은이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가 되어 경찰서로 출동했다. 큰일 난 줄 알고 잠옷 차림으로.
"자 여기 이름이랑 작성하시고 귀가하시면 됩니다."
경찰 아저씨가 몇 가지 작성해야 할 서류를 내밀었다. 무언가를 써야 하는 게 귀찮았지만 집에 가려면 반드시 해야 할 일. 다겸은 세은에게 옆구리를 수차례 꼬집히면서 빠르게 글씨를 채워 넣었다.
"아휴, 요새 날이 이래도 새벽 되면 추워요. 입 돌아간다고. 신고자 분 다음부턴 그러지 마세요. 아셨죠?"
경찰서는 소란스러웠다. 인사불성이 되어 여기가 어딘지 상황 파악도 못 하고 삿대질에 발길질하는 사람들이 5할. 말리는 경찰들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 싸우느라 정신없는 사람들이 4할. 나머지 1할은 앞 뒤 재지 않고 무조건 고성방가 소리 지르는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다. 사실 몇 할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냥 개판이었다. 그 가운데 다겸은 그나마 자신은 양반이구나 싶어 안심했고 한편으론 많이 창피하여 버젓이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으니 괜스레 입맛만 다셨다. 그런 다겸을 대신해 세은이 연신 90도로 인사를 해댔다. 여기에 넙죽, 저기에 넙죽. 고맙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다시는 안 올 거예요.
세은과의 집으로 걷고 있는 다겸은 알 수 없는 기운이 솟는 것이 자신의 가벼워진 발걸음에 새삼 놀랐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천근만근 무거운 발걸음으로 양발목에 우루사곰 네댓 마리쯤 매달려 있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날아갈 것만 같다.
"근데 세은아 나 너무 잘 잤어. 완전 개운해. 나... 경찰서랑 잘 맞나 봐."
"어이구. 미쳤어, 미쳤어. 정말 미쳤어."
아, 역시 은행 꾸릉내. 역시 밤은 가을밤이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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