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20241203 서울의 봄
2024년 2월 4일, 아들과 영화 <서울의 봄>을 봤다. 2012년생, 곧 초등학교 6학년이 되는 아들 눈에 <서울의 봄>은 참으로 희한했다. 대부분의 등장인물이 군인이고 탱크도 나오고 총격전도 나오지만 전쟁 영화는 아니었으므로. 왜냐하면 같은 편(?)끼리 싸웠기 때문이다.
아들이 혹시라도 보는 내내 허옇게 입김 서리는 겨울 배경인 영화의 제목에 왜 봄이 들어가는지 궁금할까 하여 이유를 설명해 보았다. 제목은 밀란 쿤테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원작을 각색해서 만든 <프라하의 봄>이란 영화에서 왔고 주인공이 아름답고 잘 생긴 ‘다니엘 데이 루이스‘인데 엄마에겐 중요하지만 너는 관심이 없을 테니 넘어가도록 하고... <프라하의 봄>에서 봄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짧았던 민주화시기를 일컫는 말로 그 시기는 고작 6개월이었다. 영화 속 서울도 봄을 기다렸다. 10.26 박정희 시해를 계기로 군부독재라는 시린 겨울이 드디어 끝이 나고 민주화라는 봄을 맞이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졌다. 그 봄을 기다리는 막바지가 영화 <서울의 봄>의 겨울이었다.
"그런데 쓰레기 차 겨우 보내 놨더니 더 한 똥차가 온 거지."
영화의 결말은 역사가 스포하고 있어 이미 알고 있었다. 하나 아들에겐 스포 당하는 게 중요하지 않았다. 봄도 궁금하지 않았다. 역사는 역사고 영화는 영화였다. 아들은 극 중 정우성이 분한 '이태신'이 수세에 몰려도 종국에는 악당 '전두광'을 물리치고 극적인 승리를 맞이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요 녀석은 지금까지 권선징악의 법칙에 따라 주인공이 고구마 백만 개를 먹고 또 먹어 목메는 개고생을 죽도록 하다가 결국 승리를 쟁취하고야 마는 이야기만 접해왔으니. 그러므로 마땅히 '이태신'이 승리해야만 했다.
"엄마, 영화 끝났어? 어라? 이렇게 끝난다고? 아직 주인공이 이기지도 않았는데."
주인공이 안 이겼는데, 아직 악당을 물리치지도 않았는데 영화가 끝이 난다. 아들은 어리둥절해하기만 했다. '전두광'과 그 측근들은 패배는커녕 주인공에게 끝끝내 지지 않고 원하는 바를 이뤄 기념사진까지 찍는다. 그리하여 <서울의 봄>은 아들 인생 주인공이 지는 첫 영화가 되었다.
2024년 12월 3일 밤 10시 반 무렵 지인들의 단톡방에 톡 몇 개가 올라왔다. 어서 뉴스를 보라고.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에이 말도 안 돼.'라고 콧방귀를 뀌었다. 이미 SBS에서 '유재석'이 나오는 예능을 보고 있던 터였고 그 정도 이슈라면 '긴급 속보'라고 하며 화면이 바뀌는 것이 마땅한데 감감무소식이었으니 말이다. 흠, 그래도 혹시나... 하여 채널을 바꿔 JTBC. 어라, 그놈이 나온다. 바로 답톡을 했다. 네가 보는 거 나도 본다 정도의 맞장구. 처음에는 크게 현실감이 없었다. 그냥 또 꼴값을 떠는구나 했지. 그런데 이거 장난이 아니었다. 편하게 누워 있던 나는 곧 벌떡 일어나 앉았다. 불쾌한 공포가 목덜미를 쓸었다. 처단이라는 단어를 몇 번 반복해 듣고 나니 머리가 띵해졌다. 낮에 팽팽 노느라 밤늦게 숙제를 하던 아들이 자세를 고쳐 잡은 내게 쪼르르 다가와 붙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엄마가 저러는 걸까.
"엄마 왜?"
"어, 너는 숙제나 해."
"뭔데? 엄마 왜 무슨 일인데?"
아, 그렇구나. <서울의 봄>은 주인공이 지는 영화가 아니었다. 어떤 이들에게 <서울의 봄>은 주인공이 이기는 영화였다. 그들에게 주인공은 '이태신'이 아닌 '전두광'었다. 그저 이기는(?) 자가 주인공이었다.
2018년,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이 방영되었고 상당히 즐겁게 보았다. 당시 유치원에 다니던 일곱 살 아들은 일제 강점기가 무엇인지 독립운동이 무엇인지 물어 왔다. 나는 장난기가 발동했다.
"일제 강점기는 아주 슬픈 거야."
"왜? 왜 슬퍼?"
"왜냐면 우리가 그 시대에 있었다면 엄마는 독립운동을 아주 열심히 했을 거거든."
"그 운동을 하면, 그러면 어떻게 되는데?"
"독립운동을 하게 되면 엄마는 멀리 떨어져 살 거야. 한 번 나가면 집에 못 들어올 거야."
"몇 날 밤? 세 밤?"
"아니. 더 오래."
"..."
"그러다가 잡혀 갈 수도 있어. 잡혀가서 맞을 수도 있고. 그러다 보면 너 유치원 졸업하고 학교 갈 때까지도 우리 못 만날 수도 있어."
"..."
마침 TV에서는 <미스터 션샤인>의 일본군에 맞서 싸우는 이름 없는 의병이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벅차게 처절했고 슬펐다. 곧 아들의 콧구멍이 벌룸거리기 시작했다. 이내 코가 빨개졌고 눈에서는 눈물방울이 하나 둘 뚝뚝 떨어졌다. 의병 때문에 우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유치원에서는 제일 형아라고 어깨가 솟아 있던 아이가 신생아 때처럼 두 주먹을 꼬옥 쥐고 끅끅 울었다. 엄마가 멀리 가는 게 싫다고 밖에서 자면 안 된다고 울먹였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처음 만난 이래 지금까지 단 하룻밤도 떨어져 있어 본 적이 없었구나. 이렇게까지 울 줄 몰랐던 내가 더 당황해서 아이를 달래주었다. 아들이 너무 구슬피 울어 차마 어미가 자식에게 멋져 보이고 싶어 부려보는 허세라고는 말해주지 못했다.
'아니야. 사실 엄마 진짜 그렇게는 못 해.'
제법 친해진 회사 후배 앞에선 허세를 부리지 않아도 되었다. 기대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기대를 해버려서 전체적으로 실망했던 <경성 크리쳐>를 보고 나서였다.
"나는 그냥 때리려고 손만 움찔해도 다 불어버릴 거야. 분명히 그럴 거야."
"에이, 그래도 지킬 건 지켜야죠. 독립운동, 우리도 해야죠."
"아니야. 나는 나를 잡아가려고 하는 순간 다 술술 말해버릴 거야. 눈 마주치자마자."
"아니, 그건 좀 그런데. 적어도 할 수 있는 데까지는 버텨야죠!"
"아니야. 그냥 제발 잡아가지 말아 달라고 하면서 물어보지 않는 것도 알아서 척척 말해 버릴 사람이야 나는."
"진짜요?"
"응. 그러니까 알겠지? 절대로 나한테는 기밀 사항 같은 거 알려주면 안 돼. 무슨 전체적인 조직도라던가 그런 거 절대 알게 하면 안 돼. 명심해."
"네... 그런데 그거 외울 수나 있을까요? 지금은 다 핸드폰에 저장해 놔서 저 우리 엄마 아빠 핸드폰 번호도 가끔 못 외우는데. 옛날엔 어떻게 그랬을까요? 기억력 짱."
"그렇다. 어머나 진짜 그렇다. 내가 아니라 핸드폰을 갖다 바쳐야 되네. 안 잡혀가고 안 맞으려면 진짜 그래야겠다. 아오 상상만 해도 너무 무서워."
"그러게요."
"나는 절대 무슨 큰 일은 도모하면 안 돼. 나는 안 돼."
극 중에는 김해숙이 분한 '나월댁'과 박지환이 분한 '구갑평'의 고문에 관해 나누는 대화와 또 모진 고문을 당하는 모습이 나온다. 손톱, 발톱을 생으로 뽑고 (손톱, 발톱은 어디 틈 같은데 조금만 걸려 들리기만 해도 아픈데 아니 그냥 손가락 끝을 살짝 베이기만 해도 소름 끼친다.) 불에 지지고 전기 고문을 하고 (계란 프라이 하다가 기름만 조금 튀어도 화들짝 놀라고 뜨거운 물이 손등에 몇 방울 튀기만 해도 아프다고 엄살 피우는 자가 나다.) 사람을 거꾸로 매달아 콧구멍에 고춧가루 탄 물을 부어 넣는다. (이미 어디 매단다는 것부터 사고는 정지한다.) 나는 그들처럼 못 할 것이다. 정확하게는 그들의 반의 반의 반만큼도 견디지도 못할 것이다. 고문의 '고'자를 맞닥뜨리기도 전에, 당장 눈앞에 벌어질 고통을 면피할 방법만을 찾을 것이다. 나는 몹시 하찮은 사람이기에.
"그러니까 큰 일은 네가 다 해. 나는 끌어들이지 말고."
"왜 전부 저한테 떠넘겨요?"
"누가 하긴 해야 되니까 너는 하는 거로 하자. 나는 글렀고. 혹시 모르니까 그렇게 되면 나한테 연락도 하지 말고. 절대 톡도 보내지 말고."
"무슨 연락까지 하지 말라고 해요?"
"내가 너를 밀고하면 어떡하냐. 나는 아픈 것도 무섭고 네가 나를 원망하는 것도 무서워. 그러니까 큰 일은 꼭 하되 나는 끌어들이면 안 돼. 알았지?"
운. 나는 얼마나 운이 좋은 사람인지. 저러한 무서움과 고통은 실없는 상상 속에서만 느끼면 되는 시대에 살고 있으니 말이다. 현실에서는 최소한 무지막지한 고문을 피하기 위한 선택은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무사무탈. 꽤 여러 해 전, 초등학교 친구들이 모인 단톡방 톡게시판에 별생각 없이 걸어놓은 문구였다. 사고가 없이 별 탈만 없으면 꽤 살만하지 아니한가. 그래서 그 톡방은 꽤 오랜 시간 조용했다. 서로 소소한 일상 속에서 공유해야 할 만큼의 사건 없이 무사무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2월 3일 밤은 서로의 안부를 계속 물었다. 머리로는 각자의 집에 잘 있으리란 걸 알았는데도 손가락은 마음은 그러지 못했다. 한 친구는 회사 업무로 싱가포르 출장 중이었고 거기서 자신의 안부를 알렸다. 서로가 잘 있는지 궁금했을 뿐만 아니라 내가 잘 있는지 알려주어 상대방을 안심시켜주고 싶었다. 그러면서 국회의 비상계엄 해제 표결은 왜 더디게 진행되는지 불평하고, 국회 앞에서 또 안에서 실랑이를 벌이는 군인들이 어서 사라지기를 바라고, 제발 누구 하나 다치는 이 한 명 없기를 빌었다. 와중에 연말을 맞이해 '이승환' 콘서트를 예매했다는 친구가 혹시라도 예정된 공연이 취소될까 걱정했고 우리는 한 마음 한 뜻으로 이 밤이 무사히 넘어가 그녀가 '이승환' 콘서트를 누구보다 충분히 즐기기를 소망했다. "내 친구! 이승환 콘서트 갈 수 있어!!"
여러 다른 단톡방들도 톡이 도도도독 울렸다. 그날 밤이 생각났다. 2022년 10월 29일 밤. 늦은 시간이어도 좋으니 어찌 되었든 보면 아무 답톡만이라도 꼭 보내달라고 했던 그 밤.
윤의 비상계엄 선포 수분 후, 유난히 윤석열 정부에 향해 강한 비판을 담은 댓글 달기를 즐겼던 한 대학 선배는 바쁘다는 톡이 왔다. 이제 와서 부랴부랴 자신이 써왔던 댓글을 지우는 중이랜다. 쓸 때는 몰랐는데 쓰고 보니 너무 많이 썼다고 이거 언제 다 지우냐고 우는 소리까지 해댔다. 갑자기 현웃이 터졌다.
"엄마 뭐가 그렇게 웃겨?"
국회의 비상계엄 해제 표결 결과까지만 보고 잘 거라고 버티는 아들이 나의 웃음을 궁금해했다.
"있어. 웃긴 거. 그렇지, 일단 살고 봐야 해. 크크크크."
키득키득, 여진처럼 잦아드는 웃음소리를 내며 답톡을 보냈다.
[포기해. ㅋㅋㅋ 너무 늦었어. 그냥 받아들여!]
[안 돼. 내가 딸린 식구가 몇인데 그럴 수 없어!]
[늦었다니까 ㅋㅋㅋㅋㅋ 포기해! ㅋㅋㅋㅋㅋㅋ]
여기에 몇 마디 더 보태서 놀렸다. 쫄보라는 둥, 선배가 댓글 추적을 당할 만큼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아니라는 둥. 선배는 톡으로 윤석열 욕을 하다가 또 인터넷에 남기지 말아야 할 것을 남겼다고 후회하다가 다시 댓글 지우기 너무 힘들다고 이게 다 저 윤석열 때문이라고 욕을 하다가 또 후회하기를 반복했다. 그게 어찌나 웃기던지. 크크크.
"아휴, 살았다. 엄마 나 이제 잘 수 있어."
아들은 이 사태로 인해 자신의 졸업식 일정이 미뤄지는 건 아닌지 우려했다. 이미 지난주 폭설로 예정되었던 금요일에서 그다음 주 월요일로 연기되었기 때문에 더 미뤄지는 건 싫다고 했다. 그런 마음으로 국회 상황을 바라보던 아들은 새벽 1시경 재석의원 190명 전원이 비상계엄 해제를 요구하는 안건을 만장일치로 가결하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안심하고 잠을 청하러 들어갔다. 아들은 스포츠를 즐기지 않는다. 그러나 그날 밤은 응원하는 팀이 수세에 몰렸다가 극적으로 역전 골을 넣은, 야구로 치면 9회 말 2 아웃에 역전 만루 홈런을 때렸을 때나 나올법한 응원을 하고 잠들었다. 아직 윤이 계엄해제 선언을 하지 않았기에 게임이 끝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들에겐 다 끝났으니 빨리 자라고 했고 나는 새벽 5시가 되어서 겨우 잠들 수 있었다. 친구들 몇몇과 서로 잘 자라고 주고받으며.
'한강'. 지난 10월 고등학교 친구 세 명이 있는 단톡방이 울렸다. 소설가 한강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거다. 한 친구가 축하한다는 이모티콘을 날렸다. 나는,
[뭐야? 너 한강 알아? 여기 한강 있어? 너 누구한테 축하해?]
라고 남겼다가 좀 혼났다. 아주 살짝 조금 많이... 대략 'T발 너 C야?!' 이런 류의 혼이었다. 다행히 이 친구들의 권유로 작년에 <채식주의자>를 읽은 터였고 <소년이 온다>는 더 여러 해전에, 그때도 이 친구들의 권유로 읽은 터였다. 왜인지, 그저 읽어보라고 해서 읽어 그런 건지 두 책이 같은 작가의 책인 것을 이번에 알았다. 친구들이 이것도 몰랐냐고 뭐라고 할까 봐 노심초사했으나 다행히 그냥 넘어가줬다. 고마워. 어쨌든 덕분에 다들 '한강', '한강' 이야기를 할 때 적당히 찻숟가락 한 스푼 정도 얹을 수 있게 되었어.
노벨상을 계기로 '한강', 그분으로부터 나온 여러 가지가 회자되었다. 그중 유난히 꽂히는 말, 문장, 질문.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작가님이 <소년이 온다>를 쓰는 일을 더 이상 진척할 수 없겠다고 체념했을 때 1980년 오월 광주에서 죽음을 맞이한 한 젊은 야학교사의 일기 중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렇게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를 읽고 뒤집었다고 한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친구가 '이승환'을 걱정할 때 나는 <매불쇼> '최욱'을 걱정하고 있었다. '최욱!' 그가 가방끈 길고 먹물향 짙은 게스트를 모셔놓고 마침맞게 내 눈높이에 맞는 질문들을 참으로 야단법석 요란하게 딱딱 해주니 가려운 데가 박박 긁혀 어찌나 시원한지. 아마 이 계엄이 성공했다면 진행자 '최욱'도 분명 어딘가로 끌려갔을 것이다. 최소 <매불쇼>는 막힌다. 다행히, 천만다행으로 다음 날 요란스럽기 그지없는 그의 <매불쇼>를 무사히 들을 수 있었다. 즐겨 듣는 유튜브 방송을 못 들을까 봐 전전긍긍했던 것이 억울해 더 정성스레 챙겨 들었다.
그리고 12월 10일 <매불쇼>에 '전우용 교수님'이 나왔다. 그분이 ‘한강’ 작가님의 질문에 대답했다. 물론 방송이라 멘트는 '최욱'이 선수 쳤지만.
"과거가 현재를 도왔어요!"
'전우용 교수님'은 70년대 민주화 운동을 도와준 게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이라고 했고 80년대 민주화 운동을 도와준 게 70년대 민주화 운동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민주화 운동도 무슨 유행하는 패션인가? 패션처럼 어떤 주기를 두고 돌고 도는 건가? 그래서 과거인 줄 알았던 전두환이 윤석열이 되어 현재로 나타난 것인가? 하마터면 희망이 없는 자괴감이 들 뻔했다. 이어서 말하는 '전우용 교수님'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한국에서 형식적이나마 민주제가 형성된 건 이제 40년도 안 돼요. 그 앞에 3천 년을 왕 한 명 밑에서 살았어요. 그러니 사람들의 의식은 잠재의식까지도 왕조 시대에 대한 생각이 워낙 강해요... (중략)...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우리가 여전히 왕조 시대를 그리워하는, 왕조 시대의 이런 개돼지 백성처럼 살던 이런 시대에서 한 걸음씩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돼야 하고 된다고 생각을 하고요."
민주제 40년, 그렇다 민주제는 나보다 어리다. 한 명의 사람도 버릇 하나 고치는 게 잘 안되고 어렵다고 이번생은 글렀다며 다음생 기약을 운운하는데, 한 사회 한 나라가 운영체제 자체를 바꾼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겠지. 거기다 3천 살 vs 40살이라니. 무언가 납득이 가고 찝찝하면서도 자괴감은 가셨다. 그렇구나. 그럴 수밖에 없는 거였구나. 그래서 과거의 도움을 받아 이렇게라도 넘어가는 거구나. 이미 꽤나 엉망진창이 되었지만.
사실... 내가 '최욱'을 걱정한 것은 그 걱정의 한계값에 '최욱'을 두었다는 말도 된다. 걱정의 범위를 더 넓히는 것이 무서웠다. 만일, 만일 말이다. 그 댓글을 단 선배가 어떤 선동자로 몰려 조사를 받게 된다면, 그것에 관해 톡을 나눴던 나에게도 연락이 온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지? 그와 나의 친분에 관해 사실대로 어디까지 어떤 식으로 말할 수 있을까? 계엄이 실행되고 나의 다정한 이웃집에 내가 모르는, 처음 보는 사람과 마주치고 그 처음 보는 사람이 군인이 찾는 사람이란 걸 알았을 때 나는 어떻게 행동할까? 걱정의 한계를 넓히니 경우의 수가 끝이 없다.
아들, 내 아들이 계엄 상황에서 잘못된 역사를 배워 오고 그것이 진실인양 믿음을 가질 때 나는 무슨 말을 해줘야 할까? 너의 배움과 나의 기억이 다르다는 걸 당당히 알려줄 수 있을까? 그리고 진짜 반대로, 반대로 말이다. 내 아들이 내 기억에 부합하는 진실을 알아 오고 그 신념에 따라 그가 옳다는 길(계엄 정부와 반대되는 길)로 나아가가겠다고 말할 때 나는 내 안위와 그의 안위를 위해 무엇을 할까? 응원할 수 있을까? 그가 나아가려는 길을 가로막지는 않을까? 가로막아 그를 안전한(?) 자리에 주저앉히려 들지 않을까? 아이가 되어 떼를 쓸 것 같다. 다 싫다고. 다 다 다 싫다고. 이 상황 자체가 그저 전부 싫다고.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으니 상황 자체를 바꿔 달라고 지랄발광을 할 것만 같다.
그러나, 그러니, 그러므로 언제까지 운에 기댈 수만은 없지.
12월 7일 윤석열 탄핵소추안이 부결되었다. 혹시나 했던 기대만큼 크게 실망스러운 마음으로 기지개를 켰다. 역시 쉬운 길은 없구나. 여의도에 가야겠구나. 어떻게 알았는지 아들도 여의도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아들은 오래전 마술쇼에서 샀던 '스타워즈 마술봉'을 꺼내 들었다.
처음 집회에 나섰던 것이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였다. 이후 '이명박' 시절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집회에도 열심히 나갔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노무현 대통령'때도 친구 따라나선 것이고 '이명박'때도 친구 따라나선 것이다. 그곳에 가면 일종의 동창회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옛날 회사 동료를 만났고 다른 학교로 편입해 갔던 입학 동기 친구도 만났다. 집회가 끝나면 모르는 어르신께 술도 한 잔씩 얻어 마셨다. 어떤 신념 삼 분의 일, 그리고 어떤 재미가 삼 분의 이였다.
'박근혜' 국정 농단 때는 다섯 살 아들을 데리고 갔다. 높이 높이 올려달라는 아이의 요구를 100프로 수용해 어깨 위에 목마를 태우고 행진했다. 아이가 어찌나 즐거워했었는지. 일전 집회에서 우연히 만나고 약속하고 만났던 친구들도 나의 아들보다 어리거나 혹은 더 나이가 많은 2세를 데리고 나오기도 했다. 헤어진 커플이 새로 만난 남자 친구, 여자 친구를 데리고 쿨하게 재회하는 현장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다. 그러니 '스타워즈 마술봉'을 높이 뽑아 든 아들아, 이번에도 우리가 빠질 수는 없었던 거다.
12월 14일 토요일, 아들의 학원 수업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아들은 학원은 결석하고 싶지 않다고 했고 나도 학원비 본전 생각이 나서 네가 원한다면 수업은 듣고 가자고 합의했다. 그렇게 다소 느지막이 2시 즈음에 우리가 사는 안양에서 출발하니 여의도역, 국회의사당역에 지하철이 정차를 하느냐 안 하느냐가 문제가 아닌 것이 되었다. 5호선 공덕역에서 아예 사람을 안 태우는 것이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상황이었다. 내가 봐도, 아들이 봐도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나는 발을 동동 굴렀다. 아들과 여기까지 와서 결코 포기할 수는 없는데.
"아줌마, 걸어가요. 할 수 있어요."
환승하는 곳에 있던 델리만쥬 가게 아저씨였다. 스마트폰 앱 지도를 보여주며 공덕역에서 충분히 걸어갈 수 있다고 희망을 주는 것이다. 나는 아들이 아직 어려서 안된다고 거절했다. 그런데,
"엄마, 나 할 수 있는데."
"안돼. 마포대교도 걸어서 가야 된단 말이야. 너 한강다리 건너본 적도 없잖아."
"왜? 이번에 하는 거지."
열세 살 아들을 바라봤다. 언제 이렇게 컸지? 아이의 키가 이제는 나와 엇비슷하다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다. 그래도 애였다. 애였는데 분명히 애였는데. 덩치가 아무리 커져도 키가 아무리 자라도 애는 애였는데, 언제 이렇게 컸지.
"너 뛸 수도 있어?"
"응."
뛰었다. 공덕역에서 마포역을 지나 마포대교 앞까지 뛰고 거기서부터 걸었다. 추운데 춥지 않았다. 대교를 건너니 친할 뿐만 아니라 몹시 존경해 마지않는 '홍지흔' 언니까지 만났다. 이 언니 어제 '이승환'이 여의도에서 한 무료 공연까지 봤다고 한다. 역시 서울사람, 부럽다!
그리고 204! 아들과 나는 많은 이들과 함께 204! 를 들었다. 함께 큰 함성을 지르고 각자의 응원봉을 높이 쳐들었으며 노래도 따라 불렀다. 맙소사, 이 모든 게 아들 너의 운이 좋아서라고 마구 칭찬해 줬다.
다시 '최욱'으로 돌아가면, '최욱'도 <매불쇼>에서 우렁차게 외쳤다. "운이 좋았습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모두 여러분 덕분입니다! 고맙습니다, 여러분!" 결코 이번 계엄이 윤과 그의 작당들이 허술해서 실패한 게 아니었다. 이후 속속들이 드러나는 뉴스를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운이다.
지난겨울 아들은 <서울의 봄>을 봤다. 관심 밖의 일이 흥미 위주라 할지라도 관심 안의 일이 되었다. 덕분에 나는 과거라는 시간에 밀려나 시야밖에 두었던 것을 잠시나마 초점거리 시야에 들여놓을 수 있었다. 마침 '한강' 작가님의 수상 소식이 몇 달 전 있었고 책 <소년이 온다>가 널리 회자되어 80년대 광주의 과거가 더 제대로 된 형체를 갖추어 가깝게 만나게 해 준 것도 고마운 일이고 내 친구들, 가족, 이웃이 같은 선택을 해주는 것에도 고마웠다. 이 나라 도대체 왜 이러지? 하고 찌푸려지다가도 과거 '노무현 대통령'이 있어 순간 반짝반짝했던 때도 있었던 것에 안심됐고 그리워졌다. 그 밖에도 많다. 이 하찮은 내가 모르는, 결코 알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이 운에 작용했을 것이다. 이중에도 단 하나라도 없었으면 아니 되었다. 역시 운이 좋았다. 그리고 이 운에 작게나마 내 운도 보태진 것 같아 솔직히 뿌듯했다.
그런데 운. 이 모든 게 운 덕분이라면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운이 필요할까? 그러다 운이 바닥나면 어떡하지? 어떻게 모자란 운을 채워 넣어야 하지?
"엄마 신원식이라고 알아?”
“신원식? 네가 그 사람을 어떻게 알아?”
“엄마 진짜야? 계엄버거가 진짜 나와?"
아들의 유튜브 알고리즘에 이번 사태 관련 뉴스가 자주 뜨고 있다.
"없어. 너는 진짜 그런 게 나오겠냐?"
"그래? 하긴 나오면 시장 파괴지."
"그런 거 신경 끄고 너는 숙제나 좀 하시지. 또 낮에 안 하고, 지금 몇 시야? 이러다 언제 자려고 그래?"
"쨔쟈안."
아들이 내 잔소리가 무색하게 다한 숙제를 들이민다.
"이미 다 했거든요."
흠, 그렇게 나온다면 할 말이 없다.
"그런데 계엄 버거가 뭐야?"
"뭐긴 뭐야?"
"그런 버거 이름이 뭐냐고? 왜 있냐고?"
"..."
아, 운이다. 운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 버거 이름이 어떻게 나왔냐면 말이야..."
일단 알자. 아는 것이 틀리면 고쳐 알고 다시 알면 된다. 판단도 마음껏 해 보자. 네 판단이 틀리고 내 판단이 틀리면 반성하고 사과하고 다시 하면 된다. 그러니 어설프게 중립인척 신중한 척 입다물지 말자. 최소한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고 밝히면서 살자. 말할 수 없는 금수가 아닌 사람의 언어를 배우고 말할 수 있는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물론 그렇다고 눈치 없이 굴지는 말고.
"뭐야? 그런데 너 수학 숙제 이건 안 했네?"
"아!"
"뭐가 '아!'야?"
"지금 하면 되지. 그러니까 엄마는 내가 이거 할 동안 옆에서 계엄 버거 계속 말해 줘."
"무슨! 계엄 버거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증말!"
나는 투덜거리며 아들 옆에 앉았다. 계엄 버거, 내란 버거, 롯데리아를 설명해 주려고.
이미 결과가 나와 있는 과거보다 수시로 결과 값이 바뀌는 현재가 훨씬 더 복잡하고 어렵지만 지금 일어나는 현재를 놓칠 수가 없다. 과거가 현재를 도왔다면 현재가 미래를 도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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