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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국어사전

by 옥광



41. 국어사전



* 엄마인 '나'와 아들 '하준'이는 '로당않할' 2권 33화의 등장인물과 동일합니다.


"엄마, 은사가 뭐야?"

"은사?"

"응. 은사."

"뭐긴 뭐겠어. 은, 사. 은 은. 뱀 사. 은색 뱀."


아들 하준이와 동명 웹툰을 각색한 시리즈물 <스터디 그룹>을 보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이한경'이라는 선생님이 등장하는데 그녀가 가르치는 학생들 앞에서 본인이 학창 시절 존경하는 선생님을 언급하면서 나온 단어가 '은사'였다. 하준이가 자기 생각에도 은색 뱀은 아닌 것 같은지 제대로 말해 달라고 닥달을 한다.


"하준아 진짜 은사 뜻을 몰라?"

"어. 뭔데? 은사가 무슨 뜻인데?"

"아니, 어떻게 은사를 몰라? 너 이제 중학생 되잖아. 그런데 어떻게 은사를 모르냐고?"

"모를 수도 있지. 그래서 뭔데?"


궁금증을 가진 하준이의 얼굴은 평온했고 은색 뱀이라고 실없는 소리를 해댄 내 얼굴은 점점 험악해졌다.


"은사! 은사! '은혜로운 스승님'이라는 뜻이잖아. 어떻게 이걸 몰라?"

"오, 줄임말이야? 은혜로운 스승님. 은승. 은사."


하준이는 '결국 한자 단어란 '감다살', '감다뒤'같은 줄임말이구나.'라는 결론을 내리면서 <스터디 그룹> 즐겼고 나만 '아이고 저걸 어떡하지!'하고 콧김을 뿜어냈다.


'사전을 사야겠다!'


저 녀석은 핸드폰이나 노트북으로 단어 검색 하는 것도 귀찮아한다. 그게 귀찮아서 나에게 물어보는 거다. 물론 빛과 같은 검색 속도를 자랑하는 근사한 신형 핸드폰이나 비싼 노트북, 아이패드가 없기도 하고. 가지고 있는 전자기기는 전부 구형이다.

아직은 모자 지간의 대화가 원활한 편이니 다행이긴 하나 앞으로가 문제다. 지금처럼 '은사'는 어찌어찌 알고 넘기긴 했는데 또 무슨 단어가 어떻게 튀어나올지 모를 일이다. 나의 무지함이 바닥을 드러내기 전에 미리 방비책을 마련해야 한다. 그래서 사전을 사주기로 했다. 누구 맘대로? 내 맘대로. 단어 검색 기능이 있는 것 중에 종이 사전이야말로 가격대비 성능면에서 가장 저렴한 물건일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사전을 언급하니 옛날 옛적 내 친구 인숙이가 담배를 피우던 때 이야기를 잠시 해야겠다. 나는 인숙이의 작업실들 중 두 번째 작업실에서 사전이란 걸 마지막으로 보았다. 인숙이는 흙을 만져서 도자기를 빚어내던 친구로 처음 작업실을 얻고 세 번 이사를 다닌 후 극도로 힘들어져 고이 접고 집으로 기어들어갔다가 다시 기어 나와 재오픈, 지금은 은평구 구의동에서 작은 도자기 공방을 운영하고 있다. 첫 번째 작업실은 학교 다니면서 얻었던 터라 부모님의 손이 많이 탔었다. 그러니 실질적으로 졸업 후 얻은 두 번째 작업실이 첫 번째 작업실이라고 불러야 마땅하지만 편의상 우리는 두 번째 작업실이라고 부른다.


그 시절 우리는 술을 자주 마셨다. 아니 거의 매일 마셨다. 그렇게 마셔댄 이유는 따로 없다. 그때는... 그러니까... 술을 마시지 않아야 할 이유를 찾는 게 더 어려웠던 때다. 우리는 불행 배틀에 열심이었다. 회사에서 당한 서러움을 콸콸 쏟아내던 나와 작업실을 운영하면서 치인 괴로움을 쭉쭉 뿜어내는 인숙이는 불행을 달래줄 수 있는 건 술밖에 없다고 믿었던 어리석은 사회 초년생들이었다.


"야, 담배가 없다?"


인숙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 당연히 나도 담배를 피웠는데 그 시절 인숙이 두 번째 작업실의 어느 밤 담배가 똑 떨어졌다.


"아니야. 있어. 있는데? 여기 없어? 거기는? 거기도 없어? 없네!"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다. 소주를 마시는데 담배가 없다니. 내 가방을 탈탈 털고 걸치고 있던 모든 옷과 벗어 놓은 모든 옷의 호주머니를 뒤집었다. 안 나왔다. 인숙이의 연장통을 뒤지고 도구상자를 다 열어 봤다. 안 나왔다. 진짜 한 개비의 담배도 보이질 않았다. 갑자기 안개 낀 듯 뿌옇던 시야가 밝아지려 들고 들숨과 날숨의 공기가 맑아지려고 하는 것이 몹시 불쾌해지려 했다. 어서 다시 공기를 퀴퀴하게 오염시켜야 하는데.


"가위 바위 보."

"뭐?"

"가위 바위 보 하자고."

"싫어."

"... 하긴."


겨울이었다. 그것도 한 겨울. 그 시절 편의점은 너무 멀었으니 담배를 사러 다녀오기엔 몹시 가혹한 날씨였다.


"밖에 추워. 절대 못 나가."

"... 그건 그래."


인숙이의 두 번째 작업실은 와우산 기슭 창천동에 있었다. 홍대입구역에는 2호선 하나만 지났고 지금의 경의중앙선이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동교동과 연남동에 철길이 깔려 있었고 주변으로 노포가 즐비했다. 그리고 디스 한 갑에 2,000원이었다. 2,000원은 부담스러운 가격이 아니었다. 돈은 충분히 있었다. 카드도 있었다. 그런데 바깥의 살갗을 에이는 저 추위를 뚫고 다녀 올 용기와 기개 그리고 체력이 없었다. 술에도 취해 있었고.


"우리 재활용을 해 보자."


내가 인숙이에게 선물로 준 냉면 그릇이 있었다. 인숙이 첫 작업실에서 재미 삼아 물레를 차서 만들었는데 냉면 곱빼기 그릇 크기를 목적으로 만들었으나 가마를 거쳐 나오는 과정에서 수축이 되어 원하는 크기보다는 작아진 그릇이었다. 그래서 내 거는 다시 만들고 욕심보다 작아진 그릇은 선물로 줬더니 재떨이로 쓰였다. 원하는 크기가 아니었던 거지 그래도 꽤 큰 그릇이었으므로 담배꽁초를 버리고 버려도 쉬이 꽉 차지 않아 자주 비울 필요가 없는 훌륭한 재떨이가 되었다. 재떨이엔 버릇처럼 잔 바닥에 깔렸던 술 및 물 등을 찌끄려서 꾸준히 수분공급을 했던 터라 그릇 아래 꽁초들은 못쓰게 젖어 있었지만 윗부분엔 젖지 않은 꽁초가 꽤 수북이 쌓여 있었다.


"인숙아 너 저 사전 보는 거야?"

"사전? 여기에 그런 게 있었어?"

"저기 있잖아. 저기"


나는 재떨이를 끌어안으며 인숙이 작업실의 가장 그늘진 벽에 세로로 쌓여 있는 책 더미를 턱으로 가리켰다. 사놓고 얼마 보지도 않았을 흐물흐물한 도예잡지 및 외국 세라믹 화집들이 위아래로 켜켜이 올려져 있고 맨 위에 벽돌같이 단단한 '옥스포드 국어사전'이 묵직하게 눌러주어 쓰러지지 않게 잡아주고 있다.


"우리 저 사전으로 해 보자."

"이걸로? 뭐를 해보 게?"


인숙이가 사전을 들어 올리자 눌러주는 무계가 사라진 아슬아슬하게 쌓여 있던 책들의 탑이 쓰러지려고 했고 그녀는 언젠가 선반을 쌓는 데 사용하려고 주워 온 진짜 벽돌을 재빠르게 바꿔 올렸다. 그 사이 나는 재떨이 안에서 제법 최근에 피고 버려졌을 (아마도 불과 한 시간 여전) 젖지 않은 꽁초들을 골라냈다. 골라내면서 생각했다. 꽁초 필터 앞 길이가 꽤 길어 보이는 것이, 좀 더 빠짝 태워 버렸어야 했나. 너무 사치 부렸던 것은 아닐까. 아니지. 만일 빠짝 태우고 버렸다면 남아 있을 재가 없었을 거고 그랬다면 지금 하려는 걸 못 할 수도 있다. 그래 후회하지 말자.


"왜 꽁초는 까대고 난리냐? 그걸로는 또 뭐 하게?"

"인숙아 사전 좀 한 장씩 뜯어봐. 우리 잎담배처럼 해 보자."

"잎담배?"

"응. 자 들어봐."


언젠가 봤던 서부 영화 속 주인공인지, 악당인지, 주인공 친구인지가 주머니에서 말린 담뱃잎을 꺼내 종이에 돌돌 말아 피우던 것을 말하고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행동을 설명했다.


1. 필터 끝에 남아 있는 담뱃속을 모은다.

2. 그걸 뜯어낸 얇은 사전 종이에 가지런히 깐다.

3. 김밥 말듯이 말고 그 끝은 침을 발라 붙인다.

4. 양쪽 끝은 사탕 끝처럼 베베 꽈준다.

5. 불 붙이고 핀다.


"오! 해 볼만 한데. 그런데 잠깐만."


인숙이는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해보자며 아무 페이지나 뜯지 않고 한 장 한 장 꼼꼼하게 사전을 넘겼다


"이응. 이. 피읖 받힘. 디귿. 우와, 있다 있어. 잎담배. 명. 썰지 않고 잎사귀 그대로 말린 담배. 엽연초. 엽초. 그러면 우리가 하는 건 잎담배는 아닌 것 같은데..."


나는 굴러다니던 빈 그릇에 담뱃속을 열심히 모으며 인숙이를 노려 봤다. 빨리 사전 종이나 뜯으라는 뜻이다.


"아 눈알로 사람 때리겠다. 그만 봐. 뜯을게. 뜯을게."

인숙이는 화장실이 너무 급해 휴지가 필요한 사람처럼 사전 종이를 뜯어냈다. 생각대로 진행하니 곧 그럴싸한 사전담배들이 완성되었다. 누구는 책 속의 지식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꼭꼭 씹어서 먹기도 한다는데 우리는 씹어 먹기는커녕 한 줌의 재로 불태우는데 열심이었으니. 아니... 여러 줌의 재인가. 현실은 영화 같지 않아서 부푼 희망을 갖고 만든 사전담배는 끄트머리에 불을 붙이니 정말 불이 붙었다. 그러니까 진짜 불만 붙었다. 너무 놀라 꺅꺅 소리를 질러대며 아무 물컵에 던져 불을 끄고 다시 도전했다. 필시 빨아들이는 타이밍을 못 맞춰서 그럴 것이라 위안했지만 끝에 붙은 불 때문에 얼굴 가까이 가져와 보지도 못하고 바로 물컵행이 되었다. 끄트머리 꽁지가 너무 길어 그런가 싶어 짧게도 해 봤고 담뱃속을 최대한 노출시키기도 해 봤다. 혹시나 해가며 시도했고 역시나 하고 불만 붙었다. 덕분에 술도 깨고 더워지기만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날 밤만큼은 더 이상의 흡연을 포기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41,400원입니다."


'삐비빅' 소리와 함께 카드 IC칩에서 돈 빠져나가는 소리가 난다.


2025년의 국어사전은... 비쌌다. 정가 46,000원에서 10% 할인된 가격인데도 비쌌다. 서점 사장님은 책 계산을 할 때면 항상 고객이 구매한 책의 가격을 말해준다. 여러 권 살 때는 여러 권의 합을 말해주는데 사전 한 권 값이 웬만한 여러 권의 합한 가격보다도 비싸다. 옛날 나와 인숙이가 연기만 피우려다 불태워 버렸던 사전도 지금과는 가격이 다르겠지만 물가 대비 시세를 반영하면 꽤 고가의 책이었을 텐데. 하긴 사전 한 권의 두께가 여러 권 책 합친 두께와 맞먹으니 이것이 당연한 가격일 지도. 게다가 종이는 일반 책 보다 훨씬 얇고 활자는 더 작고 더 많이 들어 있다.

"너 그거 비싼 거야. 살살 넘겨 봐."


하준이가 사다준 사전을 거칠게 넘기는 듯 보이니 자동으로 조심히 다루라는 잔소리가 튀어나왔다. 처음엔 거들떠도 안 볼까 봐 걱정이었는데 막상 현실로 닥치니 달라진다. 보겠다고 덤비니 되려 책 상할까 걱정이다.


"회부. 진짜 '회'의의 '부'름인지 봐야지. 이상하잖아. 은색 뱀처럼."

"앞 뒤 맥락을 봐 봐. 학폭위에 불려 가는 거니까. 어떤 회의의 부름을 받은 거지. 그래서 회부. 그걸 꼭 찾아봐야 알아?"


또 <스터디 그룹>을 볼 때였다. 극 중 '유성공업고등학교' 최고 빌런 피한울이 드디어 학폭위에 회부되었다는 대사가 나오는데 하준이가 여기서 '회부'가 무슨 뜻인지 궁금하단다. 회부. 아니 어떻게 회부를 모를 수가 있지. 그런데... 솔직히 나도 회부의 뜻을 말하려고 드니 회의의 부름이란 말 밖에 안 나온다. 이에 나를 믿지 못하는 하준이는 사전을 퍽퍽 넘겼고 나는 옆에서 노심초사 비싼 책을 염려했다.


"회부. 물건이나 사건 따위를 어떤 대상이나 과정으로 돌려보내거나 넘김. 이거 봐. 회의의 부름이 아니잖아."

"아니 왜? 그게 그거지."

"어떻게 그게 그거야. 부른다는 의미가 안 나오잖아."


괜히 자존심을 세우는 나 때문에 우리는 아웅다웅거렸고 이런저런 앙금 속에서 국어사전은 그 쓸모를 해냈다. 주로 TV를 함께 볼 때.


"엄마, 근친상간이 뭐야?"

"근친상간... 어..."


주말에 즐겨 보는 <차트를 달리는 남자> 일명 <차, 달, 남>에서 최악의 가족 BEST12에서 3위를 차지한 자들을 소개하는 두 진행자가 이루 말할 수 없는 똥 씹는 표정을 하고 근친상간 단어를 언급한 것이다. 근친상간은 분명하게 아는 단어다. 그런데 회부와는 달리 설명을 하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음에도 말문이 막혔다. 나까지 곤란한 표정을 얹으니 하준이는 별거 아니라는 듯 사전을 들어 휘리릭 넘겼다. 내심 예전에 허망하게 태워버렸던 사전이 이렇게 대단한 건가 싶었다. 만일 이 단어를 인터넷에서 검색해 봤다면 굳이 알지 않아도 될 이런저런 연관 자료들까지 보게 될지도 모를 일인데 사전은 근친상간 단어에 대해서만 알려줄 터였다. 참으로 깔끔 담백하다.


"엄마, 근친이 '가까운 친족, 특히 팔촌 이내의 일가붙이. 근족.'이래. 그래서 근친상간이 '근친 사이인 남녀가 간음하는 일. 상피 붙음.'이래."


알고는 있었으나 단어로는 정리가 안 됐던 뜻이 사전을 통해 깔끔하게 해결됐다. 나에게도 이로운 일이다.


"응. 그런 뜻이야."


하준이는 사전의 페이지를 더 뒤적였다.


"이거 간음이 나쁜 거네. 간음이 '부부가 아닌 남녀가 서로 성적 관계를 맺는 일.'이잖아. 근친이 아니라 상간에 간음이 나쁜 거였어."

"그렇지. 맞아, 맞아."


하준이는 페이지를 또 넘기다가 '개꿀'이란 단어를 발견했고 사전 속 '개꿀'이 자기가 아는 '개꿀'이 아니라서 실망이라며 사전을 덮었다. 왜 저러나 싶어 찾아봤더니 진짜 '벌집에 그대로 들어 있는 꿀'로만 설명되어 있었다. 나도 내심 '완전 개이득'이라는 말을 기대했는데 없어서 실망했다. 사전에게는 이게 당연한 일일 텐데도 말이다. 그래도 한 번 만진 사전의 페이지는 계속 넘겨 본다.


단어를 찾아보지도 않을 거면서 사전 종이는 계속 만지작 거린다. 어째서 사전담배는 성공할 수 없었던 걸까? 간혹 실패의 이유가 궁금해지지만 이제 그만큼의 똘끼는 부리지 않는다. 못 부리는 게 아니라 안 부리는 거다. 종이독서를 권장하는 사람들 중에 촉감의 힘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지금 사전 앞에서의 나도 촉감의 힘만큼은 그들에게 동의한다. 그 밤 사전 덕분에 흡연과 관련된 혹은 흡연하고 싶어 애걸복걸한 기억만큼은 더 짙어졌고 그 충만감으로 현재 만 12년 금연을 유지 중이다. 인숙이는 3년째. 물론 각자 금연의 트리거는 사전과는 관계 없지만 유지라는 면에서 결과적으로 사전은 이롭다.


오늘은 하준이가 마동석 주연의 영화 제목 <거룩한 밤>에서 '거룩'의 뜻을 물어왔다. 나는 "거대한... 룩?"이라고 어물쩡거렸고 하준이는 내 대답에 귀 기울이지 않고 사전을 펼쳐 스스로 원하는 지식을 얻었다. 그래서 역시 사전은 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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