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로또 같은 유산
평소 출근시간보다 늦게 나왔다. 늦잠을 자버린 내 탓이다. 타야 하는 마을버스는 이럴 때면 꼭 늦게 온다. 보통 10분 내외로 기다리면 보이는 버스가 15분, 20분을 기다리니 도로 끄트머리에서 얼굴을 내민다. 마음이 슬슬 조급해진다. 도착한 버스에 서둘러 올라타고 빨리 출발하기만을 기다리는데 창문 밖 너머로 어느 할아버지가 힘겹게 달려오는 게 보인다. 저 할아버지 저 속도로는 분명히 못 타시지 싶다. 가뜩이나 늦은 나는 버스가 그냥 출발하기를 바랐지만... 짧은 한숨과 함께 출발하려는 버스 운전사님께 기다려달라고 말을 건넸다. 퉁명스럽게 말하는 나와는 달리 운전사님은 친절했고 다소 늦은 속도로 뛰어오던 할아버지는 내 덕분에 무사히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저 할아버지 나 때문에 탈 수 있었다는 건 모르실 텐데. 내가 내 입으로 말하기는 쑥스럽고 그렇다고 다른 알려주는 이는 하나 없고. 아무것도 모르는 할아버지의 뒤통수만 바라보며 괜스레 섭섭해만 하던 나는 결국 간발의 차로 지각하고야 말았다. 만일 버스가 그냥 출발하게 놔뒀더라면 가까스로 지각은 면할 수도 있었을 텐데. 여전히 어떤 선의에 아무런 이득은 없다.
"인간은 섬이 아니다."라는 명대사로 유명한 <어바웃 어 보이>라는 영화가 있다. 2002년 개봉한 영화로 '로맨틱 코미디'의 탈을 쓴 성장물이다. 성장하는 두 주인공 중 주인공1 어른 아이 '윌'은 리즈 시절 막바지에 다다르는 휴그랜트가 연기했고 또 다른 주인공2 어린 아이 '마커스'는 이제는 완전히 장성한 니콜라스 홀트가 연기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백수인 '윌'은 결혼은 무덤이라고 생각하며 책임질 필요 없는 가벼운 상대와 즐기기만을 원한다. 그리고 이런저런 궁리 끝에 '혼자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의 모임'에 나가기로 결정한다. 혼자 아이를 키우는 여자들은 데이트 상대를 원하면서 한편으로는 아이 때문에 결혼까진 바라지 않을 거라 여긴 것이다. 모임에 참여하면서 순조롭게 계획을 진행시키던 '윌'은 그곳에서 12살 왕따 소년 '마커스'를 만나게 되고, 어딘가 센스 부족한 어린아이 '마커스'에게 유사 아빠 역할을 수행하며 '멋진 남자가 되는 법'을 가르쳐 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윌'은 성장하는 것은 '마커스'가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걸 느끼게 되는데...
결말은 로코답게 해피엔드다. 인간관계에 서툴러 고립되 있었던 두 섬 '윌'과 '마커스'는 서로 믿고 애정하는 친구가 되고 그 친구의 친구들로 관계를 넓힌다. 주요 등장인물이 모두 모인 마지막 '점심식사 준비 씬'에서 어른 아이 '윌'은 레이첼 와이즈가 연기한 '레이첼'과 건강하고 안정적인 연애를 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어린 아이 '마커스' 또한 여자 친구가 생길 가능성을 보여준다. 우울증을 심하게 앓았던 '마커스'의 엄마도 '윌'의 친구와 그린 라이트 눈빛을 주고받으니 로맨틱 코미디의 해피엔드답게 주요 등장인물들이 '커플'과 '그 이상의 것'을 이루면서 흐뭇하게 끝난다. 그러나 나는 '윌'의 "모든 인간은 섬이다."로 시작해서 '마커스'의 "인간은 섬이 아니다."로 끝나는 이 영화에서 "섬"보다 다른 데에 눈길을 더 줬다. 바로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고 영화 이후에도 주욱 '윌'이 여유롭게 놀고먹기만 할 수 있었던 이유.
'윌'은 금수저보다 더 좋은 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났다. 극 중에서 '윌'은 한 번도 먹고살기 위한 직업이란 걸 가져 본 적이 없는 사람으로 그 모든 것은 그의 아버지가 물려준 유산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윌'이 설명하기를 작곡가였던 아버지가 만든 노래 '산타의 슈퍼 썰매' 한 곡으로 연금처럼 돈이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무엇하러 일을 하냔 말이다. 굳이 따지자면 다소 지루한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인데... 지루? 아니 지루하면 어때. 이렇게 유유자적 여유로운 삶을 즐길 수 있는데. 충분히 매력적이다. 소박한 공무원이셨던 아버지와 평범한 회사원이셨던 어머니를 둔 내 인생으로서는 100% 불가능한 삶이니 영화 보는 내내 마음껏 부러워 했다.
사실 유산의 대표적인 상징은 '저작권료' 보다 '부동산'이다. 건물, 아파트, 땅 등등. 미리 밝혀두자면 나에게는 물려받을 '부동산'도 없다. 그렇다고 내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만큼 자수성가 하지도 못 했고. 부자 배틀에는 출사표도 못 내밀어 볼 테고 반대로 가난배틀에서도 상위권에 등극하지 못할 적당히 아등바등한 경제 환경에서 자라왔고 살고 있다. 다소 아쉬움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만스럽지도 않은 삶.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란 인간, 어떤 기적이 일어나서 공짜 '부동산'을 받을 수만 있다면 묻고 따지지도 않고 분명히 좋아할 텐데. 물론 이런저런 세금을 생각하면 완전한 공짜가 아닐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어디선가 돈 되는 '부동산!'을 물려준다면 무조건 쌍수 들고 환영할 거다.
부동산. '부동산'하니 이번엔 이 영화가 생각난다. 2020년 개봉한 <작은 아씨들>.
<작은 아씨들>은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때 '마치'가의 네 자매들 중심으로 펼쳐지는, 극 중 주인공 '조'의 표현을 빌리자면 가족이 투덕거리고 웃고 하는 그런 이야기다. 나이 순으로 '메그', '조', '베스', '에이미'가 가난, 사랑, 우정, 타지에 가 있는 가족에 대한 걱정 등등 여러 가지 시련을 맞닥트리고 극복하는 과정이 아름답게 펼쳐지고 이야기 끝에는 결국 온 가족이 모여 행복한 시간을 갖게 된다는 해피엔딩으로 끝맺음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두 사람은 끝까지 함께 할 수 없었다. 성홍열로 크게 앓았던 셋째 '베스' 그리고 메릴 스트립이 연기한 이루 말할 수 없이 꼬장꼬장했던 '고모'.
극 중 '고모'는 어마어마한 재산을 가졌지만 물려줄 자식이 없는 독신이었다. 시얼샤 로넌이 연기한 주인공 '조'는 이 만만치 않은 '고모'의 비위를 맞추려 꽤나 노력하지만 좀처럼 마음대로 되지 못하고 결국 '고모'의 눈에 들어 프랑스로 함께 갈 수 있는 기회를 기간은 짧지만 '조'보다 더 시중을 잘 들었던 막내 '에이미'에게 뺏기게 된다. 티모시 샬라메가 연기한 '조'의 첫사랑 '로리'도 '에이미'와 결혼하게 되고. 그러나 '조'는 사랑하는 가족의 격려와 응원 속에 모든 슬픔을 씩씩하게 이겨내고 이를 디딤돌 삼아 결국 훌륭한 소설을 써 내려가 출판사와의 계약을 따내 작가로서 성공한다. 이것만으로도 훌륭한 성공스토리다. 그런데 영화의 엔딩의 엔딩에서 '조'는 한 번 더 도약한다. 바로 고약하다고 여겼던 '고모'가 자신 소유의 시세가 꽤 되는 고급 '부동산' 대저택을 '조'에게 물려준 것이다. '조'는 시대를 앞서 달려 나갔던 여성답게 이 대저택을 학교로 만들게 되고...
내 눈에는 '조'에게 두 개의 선물이 주어진 것으로 보였다. 한 손에는 소설가로서의 성취감,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빚 하나 없이 학교 하나를 떡 하니 세울 수 있는 고가의 대저택 건물. 물론 학교를 건립하는 데 있어 소소한 작은 빚 정도는 발생할 수도 있겠으나 영화상에는 언급되지 않았으므로 그런 건 없는 걸로 치자. 그게 훨씬 더 부러워지는 결말이니. 그러니까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이거다. 소설가가 된 '조'보다 '고모'의 유산 덕분에 고가의 '부동산' 소유자가 된 '조'가 더 부러웠다는 것.
가끔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어르신에게 도움을 드릴 때가 있다. 폐지를 리어카에 싣는 데 손을 보탤 때도 있고 더 소소하게는 카페나 식당에서 키오스크 주문을 어려워하는 어르신을 대신해 주문해 드릴 때도 있다. ... 고백하건대 여기에는 항상 혹시나 하는 사심이 조금씩 들어 있다. 혹시, 이 어르신이 길에서 우연히 만나 도움을 준 이름 모를 한 행인에게 고맙다며 어마어마한 재산을 물려줄 수 있는 알려지지 않은 어느 대기업의 회장님은 아닐까? 아니면 평생 혈혈단신 외롭게 살며 우연히 어느 행인으로부터 받은 친절에 따뜻함을 느끼게 된 명동의 뒷골목을 평정한 일수계의 큰 손은 아닐까? 하는 그런 기대감. 전혀 순수하지 않은 자본주의에 짙게 오염된 사심. 안타깝게도 바라는 일은 절대 일어난 적이 없고 주변에서도 구경해 본 적이 없으니 미련한 나는 로또보다도 더 어려운 확률을 희망하는 것이다. '조'와 '윌'을 부러워하면서.
더 어릴 때는 혹시 내가 병원 신생아실에서 뒤바뀐 아이는 아니었을까 상상했던 적도 있었다. 부모님께는 죄송하지만 어딘가에 내 친부모님이 따로 있을 거라고, 그들은 외국 이름 모를 나라의 왕족이거나 혹은 지방의 부유한 땅부자 이거나, 아니면 강남의 재벌이라고.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이 쓸데없는 공상이었다. 이 상상은 사춘기와 맞물려 한없이 증폭되었다가 점점 부모님과 똑 닮아가는 외모의 접점을 발견하면서 자연스럽게 사그라들었다. DNA는 참으로 무서운 거다.
일전에는 드물게 길을 묻는 어르신을 뵈었다. 핸드폰의 지도 앱을 보며 어느 건물의 위치를 찾으시는데 지도 속 방향 찾는 게 어려우셨나 보다. 목적지인 건물이 꽤 좋아 보였다. 순간 사심이 많이 들었다. 그러나 최대한 티를 내지 않고서 가시고자 하는 곳 근처까지 안내해 드렸다. 혹시나 사례를 하고 싶다고 연락처를 물어오면 어떻게 할까 고민도 했는데 시원섭섭하게 그분은 내 연락처 따위 일절 궁금해하지 않으셨다. 사실 이게 당연한 건데 왜 그토록 긴장했는지.
유산을 로또처럼 여기는 속물적인 나는 여전히 혹시 모를 횡재수를 꿈꾸며 선의를 베푼다. 좀 부끄럽긴 한데 그래도 혹시... 혹시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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