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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에 당첨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100가지 일들

44. 스위치

by 옥광



44. 스위치



"엄마. 부엌에 불 좀 꺼라. 삼촌 봤지?"


오랜만에 마흔 줄에 접어든 남동생이 오밤중에 놀러 왔다. 말로는 엄마 심부름이라는데 속셈은 초로를 앞두고 막 중학생 된 아들 하나 데리고 이혼해 사는 누나의 살림 됨됨이 염탐이겠지.


"엄마는... 늙은 호박 이거 백날 가져다줘도 아무것도 안 해 먹는 거 알면서 꼭 이런다."

"안 해 먹는 게 아니라 못 해 먹는 거겠지"

일흔 넘은 노모는 꼭 이런 식이다. 챙겨 줘도 손이 많이 가는, 아니 아예 손을 댈 수 조차 없는 걸 챙겨 준다. 앞으로 이런 거 보내지 말라고 전해 줘라. 내가 말하면 안 듣는다. 꼭 전해 줘야 한다. 동생아 듣고 있지? 듣고 있니? 동생아, 나 누구랑 이야기하지? 늙은 호박을 코 앞에 두고 5분을 족히 투덜거렸는데 아무 대답이 없다. 조카랑만 떠드는 동생을 노려봤다.


"네 엄마는 어릴 때부터 그랬어. 불도 잘 안 끄고, 어질러 놓고 치우지도 않고, 못 말려, 못 말려."

"역시... 엄마는 원래 그랬구나."


동생은 내 말은 하나도 안 듣고 내 아들이자 조카인 소년과 함께 내 험담에만 한창이었다. 나는 그저 큼지막한 늙은 호박을 거실로 옮기느라 두 손이 묶여 부엌불 스위치를 못 건드렸을 뿐인데 아들 녀석은 기다렸다는 듯 쪼르르 달려가 자기가 부엌불을 끄고서 저렇게 유난을 떤다. 사춘기 소년의 특징인가 유난히 내 약점 찾아내는 데 열심이다.


"네 엄마 어릴 때 잠 잘 때도 불 안 끄고 잤어."

"헉! 진짜? 그러면 설마?"

"설마?"

"설마 엄마도 불 켜고 누워서 삼촌 불러서 불 꺼달라고 한 거야? 그런 거야?"

"이야, 그건 또 어떻게 아냐? 응 맞아. 누나들 특이야. 어떻게 알았어?"

"나 유튜브에서 봤지. 남동생 누나들의 특! 역시 엄마도 그런 누나였어!"


저 놈의 자식 요즘 들어 부쩍 유튜브 보는 시간이 늘었다 싶더니 저런 '특'만 찾아보고 있었구나!


"그뿐인 줄 알아. 누나가 그러니까 너네 엄마가 어릴 적에 나 엄청 부려 먹었어."

"어떻게? 엄마가 삼촌을 어떻게 부려 먹었는데?"

"자 들어 봐. 나는 내 방에 있었어. 그런데 갑자기 너네 엄마가 나를 큰 소리로 나를 불러. 무슨 집에 불난 것처럼 진짜 큰 소리로 다급하게."

"왜? 방에 불 꺼달라고?"

"아니, 그건 밤이고 낮에, 완전 대 낮에. 아니다. 아침이다 아침."

"아침에? 왜?"

"아휴..."


동생이 한숨을 푸욱 쉬고 나를 본다. 뭘 봐 이 자식아.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할지 다 알고 있어.


"화장품... 로션 같은 거. 뚜껑이 떨어져서 굴러갔는데 그거 주워달라고 부른 거지. 자기는 책상에 앉아서 얼굴에 로션 바르는데 뚜껑이 어디 멀리 간 것도 아니야. 그냥 조금 굴러갔다고 그거 주워 달라고 고래고래 소리 질러서 부르는 거야. 자기는 귀찮다고. 아파트 떠나가게 큰 소리로."

"우와... 삼촌 놀라지 마. 엄마는 지금도 그래."

"지금도 그래?"


동생 자식이 내 얼굴을 흘낏 쳐다본다. 어쭈?


"야 너 그런 눈으로 쳐다보면 네가 먹을 치킨은 없어!"

"누나 내가 없는 말 지어낸 것도 아닌데 왜 그래? 진짜 그랬잖아."

"엄마, 나 김치 가져올게. 그리고 잘 봐. 부엌 다녀오면서 따닥 불 끄는 거."


나는 콧김을 세게 불어대며 부엌불이 켜졌다 꺼지는 걸 지켜봤다. 동생 놈이 온다길래 치킨을 주문했었다. 치킨집은 집에서 가까워 배달 없이 직접 방문해서 픽업해 오는 데 가는 길에 적당한 크기의 스뎅 반찬통을 가져가면 사장님이 기다렸다가 거기에 담아주신다. 이렇게 먹고 나면 치울 게 없다. 치킨은 순살이라 버릴 뼈가 없고 분리 수거할 케이스가 없으니 분리 수거일에 손이 가벼워진다. 분리 수거 할 거 잔뜩 만들어 쌓아 놓는 것도 성미에 안 맞고. 설거지... 설거지 거리가 다소 생기는 게 문젠데... 뭐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다.


"야, 너 가기 전에 먹은 거 설거지하고 가!"


동생 놈이 하면 된다.


"아! 누나!!"

"밥값은 하고 가라! 치킨 맛있게 먹었잖아!"


신기하게 이럴 때 아들 소년은 조용하다. 괜히 설거지 불똥이 자기한테 튈 까 봐 저러는 거다. 아무 말 없이 남은 치킨을 냠냠 먹는다. 그렇게 평화롭게 정리되는 줄 알았다.


"이럴 거면 흰 무라도 주던가. 누나는 그건 꼭 빼먹고 가져오더라. 나는 흰 무 잘 먹는데"

"그건 우리 집 특이다. 흰 무 안 먹어. 우리는 김치야! 너도 김치 먹어."

"삼촌 그건 그래. 나랑 엄마는 김치야."

"이야... 너는 이럴 땐 또 엄마 편이다."


아들이 잠시 내편이 되었다 금세 배신한다.


"삼촌, 엄마는 지금도 똑같애."

"똑같애? 뭐가?"

"리모컨 있잖아. 내가 방에 있는데 엄마가 갑자기 나를 큰 소리로 불러. 그래서 무슨 일인가 나와 보잖아. 그러면 소파에 누워서 책꽂이 앞에 리모컨 있는 거 가져다 달라고 그래. 진짜 우리 집 거실이 커? 운동장이야? 아니잖아. 그냥 몇 걸음만 걸어가면 되잖아. 그런데 그걸 안 하고 꼭 방에 있는 나를 부른다니까."

"헐... 누나..."


동생이 치킨 양념을 입가에 잔뜩 묻히고 나를 쳐다본다. 입안에 씹어야 할 치킨이 꽉 차서 뭐라 말도 못 하고. 아 마흔이 넘어도 여전히 동생은 동생이다.


"뭐? 뭐? 이제 와서 어쩌라고? 너는 입가에 그만 좀 묻히고 먹어라. 아직도 입을 못 찾아? 이제 그 나이 됐으면 네 입이 어디 있는지도 알 때 됐잖아."

"삼촌 휴지 줘?"

"왜 나한테만 그래? 그러는 누나도 입가 장난 아니야, 누가 보면 여기 있는 양념 치킨 누나 혼자 다 먹은 줄 알겠어."

"엄마 휴지 줘?"

"뭘 휴지를 써, 됐어. 먹으면 또 묻을 텐데 다 먹고 세수할 거야."

"삼촌은 괜찮아?"

"삼촌도 필요 없어. 주지 마. 박윤찬 설거지는 네가 해. 세수는 설거지하면서 하고."

"아! 누나!"


이혼하면서 짐을 대폭 줄였다. 30평대 집에서 20평대로 집 크기를 줄이면서 신혼살림 마련한다고 무리해서 구매했던 거실을 거의 채운 4인용 소파를 팔았고 안방을 꽉 채운 킹 사이즈 침대를 팔았다. 대용량 가전제품도 다 팔고 적당한 크기의 소형 가전으로 바꿨다. 그래야만 했다. 그래서 김치냉장고도 없다. 둘 데가 없었고 결정적으로 구매할 돈이 없었다. 그래서... 엄마가 보낸, 동생이 들고 온 반찬을 전부 둘 수는 없다.


"자 이거 이거 이거 이거. 다시 가져가. 가져와도 둘 데 없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아휴 엄마는..."

"아니 무슨 똥개 훈련 시켜. 엄마가 보낸 거 이렇게 다 돌려보내면 나는 뭐 한 거냐?"

"너? 넌 설거지를 했지. 잘했어. 아주 잘했어. 칭찬해. 그러니까 빨리 가. 늦었어."

"삼촌 잘 가. 늦었으니까 밤길 운전 조심하고."

"아들이 엄마보다 나아. 아주 나아. 진짜 애는 누나 안 닮았어. 천만다행이야."

"시끄럽고 너 다음부턴 오밤중에 오지 마. 나 피곤해."

"뭐래? 낮에 오면 집에는 있고?"


부엌을 돌아봤다. 동생의 특징은 설거지 후에 남은 물기를 싹 없앤 다는 거다. 어릴 때부터 해와서 그런가. 참 잘한다. 그런 동생이 다시 가져가는 반찬통이 너무 많아 차마 늙은 호박까진 들려 보내질 못 한 것이 아쉬울 뿐.


"엄마 나도 들어가서 잔다."


삼촌이 가고 나서 씻으러 들어갔던 아들이 입가에 하얗게 치약 자국을 묻히고 나왔다. 내 동생을 닮은 부분이 있다면 그 녀석의 설거지 실력을 닮길 바랐는데 입가에 뭘 묻히는 걸 닮았네. 아닌가? 제 아빠 닮은 건가? 아니... 나를... 닮은 건가?


"너 양치질하고 세수 안 해? 입에 왜 자꾸 치약을 묻혀."

"어차피 내일 세수하면 지워질 거야. 나 들어가. 엄마 잘 자."


아들이 안 그런 척 소매자락으로 입가를 슥슥 닦으며 방문을 닫았다. 거실에는 늙은 호박과 나만 남았다. 거실불은 끄고 TV만 틀어놨다. 역시... 맥주를 한 캔 깠어야 했나. 오밤중에 운전해야 할 동생 약 올리기 싫어서 참았던 건데... 너무 의리 있었나. 백색소음처럼 틀어놓은 OCN영화채널에선 서로 총 쏘고 폭탄 터지고 난리도 아니다. 며칠 전에 봤던 거 또 보는 거니 다 아는 내용이라서 그런가 난리도 아닌 소리가 나도 거실은 조용하다. 쾅쾅 시끄러운데 정적이 흐른다. 졸린 건가... 방에 들어가기 귀찮은데... 소파에서 잘까...


"엄마! 엄마!"

"왜?"

"엄마아!!"

"왜? 왜 불러?"


갑자기 나를 부른다. 아니 자러 들어간 애가 갑자기 나를 왜 찾아? 그새 꿈이라도 꿨나?


"왜 무슨 일인데?"


깜짝 놀라 아들방을 활짝 열었는데 눈이 부시다.


"엄마 나 방에 불 꺼줘."

"뭐?"

"나 자려고 누웠는데 방에 불을 못 껐어. 엄마가 꺼 줘."


어라 이 자식 봐라. 정말 나를 닮아 보려고 하네.


"네 방불은 네가 꺼. 왜 잘 있는 나를 불러 가주고 난리야."

"난 이미 누워 있잖아. 지금 이 시간에 방불 스위치랑 가까운 건 엄마니까 엄마가 꺼 줘."


틀린 말은 아니다. 물리적으로 방금 방문을 활짝 연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50cm 안 되는 지점에 방불 스위치가 있으니... 이것은 삼촌을 위한 복수인가?


"꺼 줘? 엄마가 꺼줬으면 좋겠어?"

"응. 빨리 꺼 줘."


이불 위로 쏙 나와 있는 소년의 눈이 웃고 있다. 재밌어 죽겠다는 눈이다.


"알았어. 꺼 줄게. 꺼 준다."


-탁-


아들의 방이 깜깜해졌다. 이제 조용히 문만 닫으면 된다. 조심조심. 깜깜할 때는 유난히 아무 소리도 내고 싶지가 않다. 숨도 살살 쉰다. 아무 소리도 안 내려니 행동이 신중해지고 느려지고. 문을 천천히 공들여 움직이니 열 때 와 비교해서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대략 10cm 정도의 틈만 남길 수 있었다. 지금이다.


다시 -탁-


"아! 엄마!!"


잽싸게 아들 방 불을 켜버렸다. 아주 환해졌다. 깜깜한 게 밝아지니 남은 10cm의 틈은 빛의 속도로 닫아버릴 수 있었다. 아들은 빛과 함께 나를 부른다. 아 안 들려 안 들려. 아무 소리도 안 들려. 총소리도 정적으로 여기는 귀였다. 안 들을 수 있다. 거실 소파에 날아가서 누워 버렸다.


"엄마! 엄마! 불 꺼줘야지!! 엄마!"


안 들려 안 들려. 아들아... 나는 네 엄마이기 전에 꽤 오랜 시간 한 소년의 누나였단다. 그러니 아직은 내가 한 수 위여야 하지 않겠니.


"엄마!"


나를 찾는 아들의 목소리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알아서 일어나 불 껐나 보다. 그동안 확신이 없었는데... 어느 정도 나를 닮은 게 분명하다. 더 분발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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