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로또에 당첨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100가지 일들

43. 나를 위한 축하가 아니고 나를 위한 위로가 아니고

by 옥광



43. 나를 위한 축하가 아니고 나를 위한 위로가 아니고



꽝!


큰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깼다. 눈을 떠보니 차가 옆으로 돌고 있다. 터널 안, 전면 유리창으로 너머로 터널의 오른쪽 옆면이 보인다. 곧 차가 역방향으로 향하여 이미 지나왔을 터널 입구가 보였고 이내 왼쪽 옆면 터널 출구 다시 오른쪽 옆면. 나도 모르게 차의 회전 수를 셌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그리고 콩!


같은 과 선배의 아버지 장례식장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선배와는 그다지 친한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적당히 안 갈 핑계를 궁리하고 있었는데 그 선배와 제법 친했던 친구 지윤이는 가야겠다며 아빠한테 차를 빌리겠다고 했다. 지윤이는 그당시 어울리던 친구들 중 운전면허를 가장 먼저 딴 친구였고 그래서 운전도 지윤이만 할 수 있었다. 곧 같이 갈 친구 모집, 선착순 4명. 인원수는 빠르게 찼고 나는 세 번째 멤버로 차에 탑승했다. 우리는 장례식장에 간다기보단 교외로 놀러 가는 것 같았다. 매일 청바지에 티셔츠 쪼가리만 입는 것만 봐왔는데 제법 각이 나오는 검은색 정장을 갖춰 입으니 서로 조직원 같다 첩보원 같다 하며 낄낄 거렸다. 안 그러려고 했지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신이 나 있었다. 그래도 장례식장에 들어섰을 땐 다소 긴장되었으나 이마저도 이내 풀렸다. 선배의 일가친척 어르신들이 대학 졸업을 앞둔 조카의 학교 후배들이라며 반갑게 맞이해 주었고 선배의 흑역사를 알고 있는 동네 친구들 또한 이 자식 학교는 잘 다니냐며 장난스럽게 반겨주었기 때문이다. 병상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셨던 선배의 아버지도 분향이 먼저인지 상주에게 하는 목례가 먼저인지 고인께 올리는 절이 먼저인지 우왕좌왕 헷갈려하는 우리를 보며 편안하게 웃어 주셨다. 무겁고 슬플 줄로만 알았던 장례식장은 의외로 유쾌했다.


"우리 할머니 돌아가셨을 때는 난리도 아니었지."


선착순 두 번째 멤버인 수영이가 어릴 때 갔던 할머니 장례식장도 지금 같은 가족 모임 같았다고 했다. 오랜만에 아버지 어머니 혹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된 사촌 육촌 혹은 더 먼 사돈의 팔촌들까지 모두 모였다는 거다. 그동안 살아왔던 이야기부터 지금 살고 있는 이야기까지 그들의 수많은 이야기가 오가고 중간중간 서로 섭섭했던 이야기로 또는 안 해도 될 말들로 소리가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제법 시끌시끌한 식.


"그런데 무슨 난리가 났다는 거야?"

"정확하게는 우리 식 말고 다른 식장. 거기가 난리였어."

"거기가 왜?"

"위층에 특실이 있었는데 무슨 연예인들이 계속 오는 거야. 아이돌도 들락날락거리고. 기자들도 엄청 오고."

"연예인? 기자들까지?"

"응. 거기 상주가 S* 엔터 이사였어."

"진짜? 야 민수영! 그러면 우리를 불렀어야지! 왜 우리는 안 불렀어?"


나는 갑자기 할머니 장례식장에 부르지 않은 수영이를 원망했다.


"뭔 소리야? 나 고등학교 때였는데. 우리 알기도 전이였다고."

"아... 그렇지..."


수영이 포함 우리는 대학교 입학하고 만난 사이여서 친구 먹은 지 이제 3년째인데 5년 전에 돌아가신 할머니 장례식장엘 안 불렀다고 땡깡 부린 꼴이 되었으니… 몹시 머쓱했다.


"우리 이제 가야 돼."

"벌써?"

"그럼, 지금부터 가도 집에 도착하면 9시 넘을 거야."

"9시면... 한 시간만 더 있다 가자. 버스 끊길 일도 없잖아."

"안 돼. 우리 아빠 늦으면 다음부터 차키 안 줄 수도 있단 말이야."

"진짜? 그러면 빨리 가자!"


우리는 서둘러 일어섰고 적당히 취기가 오른 어느 어르신이 용돈을 주신다는 걸 극구 사양하고 식장을 떠났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사고가 난 것이다. 사람은 죽기 전에 주마등을 본다던데 우리 중 그 어느 누구도 주마등을 본 이는 없었다. 왜냐, 그 누구도 안 죽고 멀쩡히 살아 있으니까.


"저쪽에 휠 떨어져 있다."


잠결에 들었던 '꽝' 소리는 자동차 왼쪽 뒷바퀴가 터지는 소리였다. 차는 바퀴가 터지면서 옆으로 빠르게 회전했으나 회전 수에 반비례하여 회전 속도는 급하게 줄더니 터널 벽면에 부딪힐 때는 꽤 감속하며 부딪혀 우리가 받은 충격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뒤에서 오는 차도 없었으니 천만다행이었다. 지윤이는 침착하게 보험회사와 아버지 경찰 순으로 연락했다. 이후 지윤이의 지시에 따라 (아마 경찰의 지시였을) 터널 벽면에 찰싹 붙어서 터널 바깥 안전한 곳으로 나와 경찰이 먼저 올지 렉카가 먼저 올지 내기를 하며 기다렸다. 나는 당연히 렉카가 먼저 올 줄 알았는데 경찰이 먼저 왔다. 그리고 놀랍게도 상주였던 선배도 왔다. 몇 년 후에 이 둘, 선배와 친구 지윤이는 결혼을 하게 된다.


서로 호감만 가졌던 두 사람은 선배 아버지 장례식장 이후 그 마음을 확인했다. 지지고 볶고 헤어질 것처럼 하다 안 헤어지기를 반복하며 여러 해를 보낸 두 사람은 이윽고 날을 잡았다.


지윤이는 평소 스몰 웨딩을 할 거라고 노래를 불렀다. 신부의 드레스는 빈티지 샵에서 샀을 것 같은 유니크한 아름다움이 넘쳐나고 신랑의 예복은 신부 드레스에 적당히 어울리면 되고, 꽃 장식은 전부 생화로 한 가지 종류가 아닌 들꽃처럼 여러 가지 종류의 꽃들이 만발했으면 좋겠고, 햇빛은 쨍쨍하지만 덥지 않은 날씨의 야외에서 가까운 지인만 초대해 하루 종일 맛있는 음식과 좋은 음악을 즐기는 결혼식. 그러나 그렇게 하는데 드는 비용을 현실로 마주하고 나선 모든 계획을 전면 수정했다. 스몰 웨딩이 말 그대로 작은 결혼식이 아니라 작지만 확실히 비싼 결혼식임을 숫자로 본 것이다. 지윤이는 당신 퇴직 전에 식을 올려야 한다는 이전까진 무진장 듣기 싫어했던 공무원 아버지의 잔소리를 적극 수용, 공무원연금공단의 상록아트홀로 식장을 잡고 아버지가 그동안 뿌린 축의금 내역을 듣고 나서는 아버지 앞으로 청첩장도 아주 넉넉하게 찍어냈다. 당연히 어머니 몫도 넉넉히 뽑았고.


"결혼식의 주인공은 나하고 오빠가 맞지만 축하만큼은... 온전히 우리 몫이 아닌 것 같아."


이게 식 후에 신부에게서 들은 말이었다. 내 눈에도 양 가 어른들이 받은 축하가 신랑 신부가 받은 축하보다 훨씬 커 보였다. 어찌 보면 신랑신부 보다 더 의미 있는 식을 치른 것이다.


나중에 알았는데 지금은 친구 지윤이의 남편이 된 선배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지윤이와 통화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기력이 되실 때마다 주변 지인들과 한 명 한 명 안부를 주고받으셨던 선배의 아버지는 아들이 아끼는 친구 몇 명과도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셨고 선배는 그때 지윤이에게 아버지와의 통화를 부탁했던 것이다. 명백히 사귀기 전이었으나 선배는 부탁했고 지윤이는 부탁을 들어줬다.


선배의 아버지가 당신의 죽음을 예상하셨는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장례식 관련된 사항인데 전부 남은 가족들이 알아서 하라는 것. 그 말씀만 하셨다고 했다. 장례식의 주인공은 당신이지만 장례식을 치르고 그 속에서 위로받는 것은 남겨진 가족이니 모든 절차는 가족들 하고 싶은데로 하라고. 괜히 복잡하게 이것저것 궁리하지 말고 식장에서 시키는 대로 해도 좋으니 어떻게 해도 상관없다고. 당신은 살아 있을 때 보고 싶은 사람들 그리운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 실컷 하는 것으로 충분히 만족스럽다고 하셨단다.


"그렇다고 아버님이 별다른 특별한 이야기를 하신 것도 아니야. 되게 짧은 약간 형식적인 안부만 묻고 대답했단 말이야. 아주 평범하게 다음에도 또 만날 것처럼. 그런데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 대화였던 거지."


둘째를 낳은 지윤이네가 새집으로 이사 후 집들이를 한 날, 적당히 맥주를 마신 지윤이가 그 장례식 전 후 이야기를 꺼냈다. 선배는 다소 복잡한 장례식 절차와 식장에 찾아와 준 지인들 덕분에 아버지의 빈자리로 슬퍼하지만 않을 수 있었다고 했고 거기에 지윤이의 우리의 교통사고도 크게 한몫했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나 말이야."

"너 뭐?"

"나 문득 갑자기 죽지만 않으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뭐야? 뜬금없이?"

"뜬금없는 거 아니야. 진심이야."


진심이다. 나도 결혼식이든 장례식이든 뭐든 남들 하는 대로 하는 게 싫어서 무슨 식이든 '나만의 OO 식' 하면서 특별하게 할 궁리만 해왔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특히 장례식만큼은...


"뭐 그런 거 있잖아. '러브 액츄얼리'에 나오는 장례식처럼 내 영정 사진 놓고 '살아생전 고인이 좋아했던 음악입니다.'하고 틀어놓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살아 있을 때 듣고 싶은 음악 열심히 듣고. 여러분 얼굴도 보고 그러고 싶다는... 뭐 그런 소리야. 내가 없는데 내 취향이 뭐가 중요하겠어. 지금도 잘 모르는데. 귀 담아 듣지 말고 대충 들어."

"무슨 러브 액츄얼리 음악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지윤이가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턱을 들었다.


"너는 건강검진에서 피검사 재검 해보라고 한 거나 빨리 받아!"

"아 그거? 꼭 받아야 되는 건 아니야. 나중에 천천히 받아도 돼."

"병원에서 받으라고 했으면 빨리 받아. 그리고 인스턴트는 그만 먹고 집에서 밥을 먹어. 물 좀 많이 마시고."

"아, 알았어."


동갑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식(예를 들어 결혼식 같은)을 먼저 경험하고 치른 친구는 더 빠르게 어른이 되는 것 같다. 지윤이는 나보다 취업을 먼저 했고 결혼도 먼저 하더니 아이도 연년생으로 낳고 작년에는 회사 건강검진을 통해 갑상선암을 발견했다. 그게 무엇이든 온갖 큰 일은 죄다 먼저 겪은 거다. 갑상선 암은 다행히 전이된 곳 하나 없이 깨끗이 치료되었다. 아직 완치 판정을 받기 전이지만. 지윤이는 누구보다 앞서 나아가는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눈앞의 한걸음을 대충 내려놓지 않았다. 시선은 멀리 두되 말 하는 것은 코 앞에 일들이었다.


"당장 내일 병원 가. 알았지?"

“그게 뭐 간다고 돼? 예약부터 해야지."


사람은 모두 각자의 장례식을 앞두고 있다. 자신의 자리만큼은 빈자리인 자신의 장례식.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식의 주인공이 되지 않기 위해 하루하루 식을 미루고 살아낸다.


나도 결국 그 식을 미루기 위해 피검사를 받으러 갔다. 다행히 우려되었던 간수치는 정상으로 나왔다.









57





keyword
일요일 연재
이전 12화로또에 당첨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100가지 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