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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에 당첨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100가지 일들

40. 태몽보다 해몽

by 옥광



40. 태몽보다 해몽



버스정류장에 서 있었다.

등에서 환한 빛이 느껴져 뒤를 돌아봤더니 가장 가까운 건물이 활활 불타오르는 게 보였다.

저렇게 높은 건물이 있었나?

코 앞에 보이는 시뻘건 불보다 불이 붙은 건물의 높음에 먼저 놀랐고 불길이 건물을 감아타고 옥상 끝까지 솟아올라 몇 층높이인지 가늠해 볼 수 없어 답답했다.


"어때? 잘 보여?"

"응. 잘 보여. 너무 잘 보여."


불만큼은 잘 보이니 잘 보인다고 대답했다.

저렇게 큰 건물이 타는데도 연기가 하나도 없었다.

진짜다.

생일 케이크의 작은 초에서도 불을 붙이면 몇 오라기 연기가 피어오르기 마련인데 저 불길에선 정말 작은 한 오라기 연기도 없었다.

왜냐하면 이건 꿈이니까. 현실이 아닌 며칠 전에 잠을 자면서 꾼 꿈.


언젠가의 명절에 아빠가 아빠의 사촌동생 나에겐 오촌 당숙이 되는 아저씨에게 아빠가 예전에 꾼 꿈 이야기 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나는 여덟 살? 아홉 살? 쯤이었고 당숙은 막 아이 아빠가 될 참이었다.


"나가 집에서 퍼질러 자고 있었거든. 그런데 갑자기 뒷마당이 후끈해지는 겨."


저기서 아빠가 말하는 집은 그 시절 시골 할머니 집이다. 그러니까 아빠는 오밤중에 쌍문동 어느 낡은 빌라 단칸방에서 잠을 자면서 꿈을 꾼 것이고 그 꿈속 시골집에서 또 달디 단 낮잠을 잤다는 것이었다. 그 시골집은 벽에 흙을 발라 만든 옛날 집으로 올라가기엔 버거웠지만 밑에 들어가 숨기엔 딱 좋은 높은 마루가 있었다. 마루에 겨우겨우 올라가면 쇠냄새나는 시커멓고 동그란 문손잡이가 달린 종이를 바른 방문이 있었는데 침을 바른 손가락을 데면 뽕뽕 구멍이 뚫려 참 재밌어라 했었다. 물론 그 구멍의 개수의 몇 배로 혼이 나기 일쑤였지만. 나의 아빠는 키가 175cm 정도인데 시골집 천장이 낮은 관계로 방으로 들어갈 때는 인사하듯 고개를 숙여야만 했고 들어가서는 뒤꿈치를 들어 올려 까치발을 서기라도 하면 정수리가 콩 하고 천장에 닿았다. 꿈속의 아빠는 바로 그 방에서 낮잠을 청하고 있었다.


"와요? 뭐땀시 후끈해진건데요?"

"우리 집 뒷마당에 대나무 밭 있던 거 기억 허냐?"

"대나무 밭이요? 성님 집 뒷마당에? 그기에 대나무 밭이 있었든가?"

"아, 왜 우리 아버지 살아 계실 적에 고만고만허게 있었잖여."

"그려어? 그런 게 있었느아?"

당숙이 끝까지 대나무밭을 기억해내지 못해서 일단 있었다고 치고 아빠는 꿈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 대나무밭으로 시뻘건 불덩어리가 떨어진 겨. 그래서 그 밭이 홀랑 타고 있었당께."


아빠는 하늘에서 떨어진 불기둥을 보고 깜짝 놀랐지만 대나무밭이 활활 타오르는 걸 그저 멍하니 지켜보는 것 외에 다른 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활활 타오르는 불이 집으로 옮겨 붙을 수도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을 텐데 꿈이라서 그랬을까 아주 천하태평이었다고도 했고 대나무밭에 박히듯 떨어진 불기둥이 참으로 요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도 말했다.


"워메... 그래서 그게 자 태몽이라고여?"

"어어, 그 꿈꾸고 쪼메 있다가 느이 형수가 자를 벤 겨."


자가 나다. 그때는 많이 어릴 때라 그런가 '아 그게 그렇구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좀 더 커서 이것이 나의 태몽이란 것을 깨닫고 나서는 대나무밭이 홀랑 타버렸다는 꿈 이야기에 크게 실망하게 되었다. 기억은 안 나는 어떤 연유로 친구들로부터 각자의 태몽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들의 꽤 그럴싸한 태몽과 비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친구는 할머니가 커다랗고 예쁜 복숭아를 치마폭에 쏘옥 담아 왔다고 했고 다른 어떤 친구는 수많은 코끼리 떼가 엄청난 호랑이를 엄마 앞으로 몰고 왔다고 했고 또 다른 친구는 시집도 안 간 고모가 무지개가 솟아오르는 연못에서 하얀 뱀을 건져 올렸다고 했다. 그에 비해 내 꿈은 멋이 없어 보였다. 홀랑 타서 시꺼먼 숯만 남을 결말도 뭔가 밋밋하고. 어딘가 미장센이 마음에 안 들었다. 그때의 나는 사춘기였고 더 스펙터클한 특별한 것을 원했었나 보다. 물론 불타는 대나무밭 꿈이 나쁜 꿈은 아닐 것이다. 꿈에서 보는 큰 불이 재물운일 수 있다는 해몽을 인터넷에서 심심치 않게 접해 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우리 집에 큰 재물은 없었는데... 이런! 혹시 내가 그 재물운을 까먹고 있는 건 아닐지 반성이 되기도 하고... 언젠가 나의 카드값을 우연찮게 알게 된 아빠가 이것이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거 아니냐며 크게 대노한 적이 있었기에 많이 찔리기도 하고.


지금의 나에겐 막 중학교에 입학한 아이가 한 명 있는데 이 녀석이 다니던 유치원은 숙제를 참 잘 내줬다. 정확하게는 원생이 아닌 그 부모에게. 그 잘 내준 숙제 중 하나가 아이의 태몽이야기를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어느 밤 꿈에 엄마가 우주를 헤엄치고 있었어.

어떻게 헤엄 쳤냐고?

개구리헤엄을 쳤지. 팔다리를 쫙쫙 옆으로 펼쳤다가 오므렸다가 하면서 앞으로 나아갔어.

신기하게도 하나도 힘들지 않아서 멀리멀리 헤엄쳤어.

우주는 정말 정말 깜깜했는데 무섭진 않았어. 별들이 아주아주 많았거든.

헤엄치면서 만나는 반짝반짝 빛나는 별들은 비눗방울같이 동그랬어.

예쁜 별들을 너무너무 만져보고 싶었지만 그럴 순 없었어.

열심히 다가가면 둥실둥실 움직이면서 도망갔거든.

그래서 몹시 슬펐는데 갑자기 가장 큰 별이 가장 크게 빛을 내면서 엄마한테 다가오는 거야.

엄마는 깜짝 놀라면서 두 팔을 뻗어서 그 크고 빛나는 별에게 열심히 헤엄쳐 다가갔어.

이윽고 그 별이 내 품에 쏙 들어왔고 순간 엄마까지 환하게 빛이 났어.

별은 너무 따뜻했고 눈이 부시게 반짝거렸고 그리고 사랑스럽게 예뻤어.

엄마는 너무 행복해져서 많이 웃었어.


녀석의 유치원 선생님은 아이들 각자의 태몽 이야기를 예쁜 카드로 만들어 주었고 수업 중에 '나의 태몽 이야기'라는 주제로 이야기 시간을 가졌다고 했다. 그때의 녀석은 자신이 별이었다는 사실(?)을 큰 소리로 발표했고 선생님이 만들어준 태몽 카드를 가방에 넣어서 아니 가져오고 통통하고 작은 손안에 꼭 쥐고 돌아왔다고 했다. 대나무숯 태몽에 불만을 가졌던 나와는 달리 아이는 자신의 태몽이 썩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녀석은 유치원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동네에서 만나는 누군가에게 카드를 보여줬다고 했다. 아마도 이웃집 할머니 거나 놀이터에서 만났던 친구 엄마였겠지. 카드를 높이 들어 올려 보여주고 열심히 떠들었다고 했다. 자기는 별이었다고 그것도 아주아주 크고 동그랗고 빛나는 별이었다고 알려줬다고(자랑했다고).


그렇다면 처음 언급한 며칠 전 꿨던 건물이 불타오르는 꿈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혹시 아빠가 꿨던 나의 태몽처럼 누군가의 태몽을 꿈꾼 것은 아닐까? 나는 지난주에 씩씩하게 생리를 했으므로 생물학적인 면으로 나의 임신 가능성은 없다. 바로 주변을 탐문해 보았다. 아는 이의 아는 이의 아는 이. 그 누군가의 임신 소식도 들려오는 게 없었다. 그렇다면 이것이 태몽이 아니라면 혹시 재물운? 잠시 동공이 확장되고 콧구멍이 커졌다. 이거 이거 서둘러 로또라도 사야 하는 건 아닌지 심사숙고하게 되고... 하나 이것도 아니지 싶다. 꿈에서 함께 했던 어떤 이 때문이다. 버스정류장에 이르기 전부터 함께 있었고 불구경까지 함께 했던 그는 놀랍게도 '양조위'였다.

양조위. 1962년생인 중국인 영화배우. 나의 많고 많은 최애 중 소중한 한 명!


그가 우리말을 했는지 아니면 내가 중국 말을 했는지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 소통을 했는지는 모른다. 아무튼 꿈에서 우리는 무언가 수다를 많이 떨었다. 뭔지 모를 영원히 알 수 없을 말을 아주 재미있게 나눴다. 버스를 타러 오면서 기다리면서 불구경을 하면서 다시 걸으면서 쉴 새 없이 떠들었다. 또 디테일한 기억은 없지만 뭘 많이 하고 놀았다. 물론 전부 꿈속에서.


만일 깔끔하게 불만 봤다면 재물운이라고 좋아했을까? 아니다. 재물운도 재물 붙게 행동하는 사람한테 오는 거지 나는 결코 아니다. 나도 염치라는 게 있는데 함부로 그런 운을 기대해선 안된다는 것 정도는 알만큼 배운 사람인 것이다. 아빠한테 카드값으로 호되게 혼나던 그저 그런 청춘이었고 지금도 고만고만하게 살고 있으니. 그래서 결론적으로 건물이 불타는 꿈은 개꿈이 되었다. 그러나... 이게 또 그냥 개꿈은 아닌 것이 생각만 해도 웃음이 절로 나오는 이것은 매우 행복한 개꿈인 것이다. 자그마치 양조위다. 양조위가 나왔으니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것도 먼 옛날 1995작 영화 <류망의생>에 나왔던 늘어진 티셔츠에 삐딱하게 미소 짓는 모습의 양조위. 아무리 생각해도 이보다 더 행복한 꿈이 있을 수 있는 가 싶다. 감히 비교하자면 자신의 태몽에 만족한 어느 시절의 아이만큼 나는 양조위의 개꿈에 행복해했다.


그 시절 유치원에서부터 태몽 카드를 꼭 쥐고 온 아이는 저녁에 퇴근한 나를 만나서는 우주를 헤엄쳐 다녔던 꿈속의 나에 대해 많이 궁금해했고 특히 자기를 만날 때 로케트는 없었냐고 여러 번 물어봤다. 유난히 로케트를 좋아하던 아이였기 때문이다. 아차 싶었다. 동그란 별이 아니라 멋있는 로케트라고 할 걸 그랬나. 하지만 별이 더 좋은 걸.


"엄마 나랑 만나서 어떻게 집으로 왔어?"

"너? 큰 별? 글쎄... 헤엄쳐서 왔을 걸, 아마도?"

"어떻게? 로케트 타고는 안 왔나?"

"로케트?"

"웅. 근처에 로케트가 없었어? 다른 별 뒤에 없었어? 멀리에도 없었어? 로케트는 못 봤어?"


흠, 어쨌든 로케트를 빼먹은 나의 불찰이다. 왜냐하면... 저 꿈 일백 프로 내가 지어낸 거거든.


진실을 말하자면 아이의 저 태몽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상상해서 써 내려간 이야기다. 아이의 임신 기간 내내 주변을 탐문했었다. 내 아이 태몽 꾼 자 누구인가. 있으면 알려달라. 질문하고 기다리고 질문하고 기다리기를 반복했지만 없었다. 아무도 없었다. 명절에만 볼 수 있는 다소 먼 친척들에게도 물어봤었고 혈연관계가 없는 주변인들에게도 물어봤지만 정말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고 유치원 숙제 제출지에 이 아이의 태몽을 꾼 사람이 없다고 말하기도 싫었다. 그래서 지어내 썼다. 이왕 쓰는 거 아이도 나도 최대한 만족해할 것으로 고민고민했고 내가 실망했던 진짜 나의 태몽보다 내가 꾸고 싶은 아이의 꿈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꿈 이야기를 꿈꾸는 것만으로 이미 신이 나서 쭉쭉 잘도 써내려 졌다.


그렇다고 내가 아이에게 뻥을 잘 치는 엄마인가? 그것도 아니다. 나는 산타를 싫어한다. 엄마가 된 이후로는 더더 싫어졌다. 왜 있지도 않은 뚱땡이 할배가 내가 쓴 돈으로 아이의 사랑과 존경 감사의 마음을 받아야만 하는가. 있지도 않은 산타에게 고사리 같은 아이의 소중한 찬사가 왜 돌아가야 하는 가 말이다.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이에게 산타를 거짓으로 꾸며내는 게 너무 괴로웠다. 그래서 아이 열한 살 때 진실을 말해주었다. "산타는 없어. 산타는 다 뻥이야." 아이는 잠깐 움찔했다. 이내 산타는 없어도 선물은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확인하고 나서야 아쉽지만 괜찮다는 입장표명을 내놓았다. 기껏 말해놓고 나서 다소 성급했나 싶어 불안했던 나는 다행이다 싶어 안심했는데 아뿔싸 그것은 성급한 판단이었다. 아이는 안 그래도 굴뚝도 없는 집에 어떻게 들어오는 건지 궁금했었다고 하고 산타는 외국 사람이라 우리말도 모르는데 어떻게 갖고 싶은 선물을 척척 알아듣고 주는 건지 의심스러웠다고도 했다. 그러더니 곧 조건을 내걸었다. 산타는 없어도 괜찮지만 선물은 계속 받을 테니 지금까지 산타인척 해왔던 것처럼 선물을 계속 몰래몰래 머리맡에 둬달라는 거였다. 이는 곧 이전까진 크리스마스이브에 빨리 안 자면 산타가 선물 주러 안 온다는 말이 통했으나 이후로는 크리스마스이브에 늦게 자도 할 말이 없어졌음을 뜻한다. 때문에 몰래 선물을 두기 위해서라도 잠 안 자고 버티는 아이와 아주아주 늦게까지 놀아줘야만 했다는 더 피곤해진 이야기.


그런데 태몽에 대한 진실은 여전히 비밀이다. 흔쾌히 산타에 대한 진실은 알려 줄 수 있지만 태몽은 안 된다. 계속 지킬 거다. 그 꿈을 좋아했던 아이의 모습이 너무 예쁘다. 자기가 어떻게 생긴 별이었는지 물어오는 아이의 모습이 여전히 눈앞에 선하다. 자기가 동그란 별이었어서 가끔 우주 꿈을 꾼다고 했다. 아이가 희한한 스텝을 밟으면서 별은 삐죽삐죽하게 생겼는데 자기는 왜 동그랬냐고도 물었었는데 그건 네가 동그랗게 생겼기 때문이라고 답해주었다. 수박같이 동그란 배, 비눗방울같이 동그란 뺨, 동글동글한 내 아이. 별보다 지금의 네가 더 따뜻하다고도 했고 아이를 품 속에 가득 안으면서 별을 안아줄 때보다 더 꼭 안아주는 거라고도 했다. 덕분에 아이와 나누었던 숙제 때문에 지어냈던 그때 막 생겨난 태몽을 존재하지도 않는 어떤 진짜 태몽보다 훨씬 더 좋아한다.


자고로 꿈보다 해몽이라고 했던가. 나는 재물보다 '양조위'를 택했고 지금은 동그라미에서 다소 벗어난 여전히 예쁜 별이 너무 좋다. 그래서 꿈보다 양조위 아니 해몽이다.


참고로 로또를 사긴 샀었다. 애매하게 삼천원어치 세 장을 샀고 다 꽝이 나왔다. 역시 내 꿈은 양조위 꿈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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