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좌표에 찍히다.
일을 하고 있었다. 핸드폰 알람이 울렸고 화면을 보니 인스타그램 DM이 왔단 표시. 팔로우하는 누군가의 공지채널이지 싶어 나중에 확인하려고 폰을 내려놨다. 그렇게 몇 시간을 폰 확인 없이 보내다 새벽이 되어 잠들기 전에 다시 폰을 확인했는데 흠, 공지채널 DM이 아니었다. 몇 시간 전 저녁에 받았던 DM은 팔로우하지 않은 개인 계정이 보낸 거였고 유사한 DM이 몇 개 더 있었다.
[1 찍아]
[인스타 안 닫았네?]
[그러면 당해야겠지]
게시물 하나 없고 프사도 비어 있는 유령 계정들이었다. '좋아요' 하트도 눌러주는 사람만 가끔 눌러주는 내 게시물에 댓글도 엄청 달려 있었다. 과장을 좀 보태자면 댓글들이 1초에 2, 3개씩 달린 것 같았다. 모든 댓글이 내용은 같았고 그 내용은...
['ㄷ김 ejfof;eo핱멟림쌅뷁동핥쌋ㅍ줄지ㅍ훘꼿최눕핥훘강빁이핥굒마deofokoekpeejf;cdmlkvnceoifjejin]
현타가 왔다. 피곤한데 잠이 깼다. 빨리 잠들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었다. 이 DM들은 뭐지? 어떻게 하면 저렇게 쓸 수 있을까? 키보드를 주먹으로 쳤나? 손가락을 아무렇게 두드리면 가능한가? 궁금증도 생겼다. 그러다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DM 보낸 이, 댓글 단 이들을 부랴부랴 차단했다.
작년 2024년 12월 3일, 윤석열 내란의 밤 이후 유독 걱정이 많았던 선배가 있었다. 자신이 그동안 윤석열을 비판해 왔던 글들과 타인의 게시글에 달았던 댓글을 지워야 하는데 너무 많아 큰일이라고. 그러다 지우려고 다시 읽어보니 자기 글이 마음에 쏙 들었는지 자기가 쓴 글은 틀린 말이 하나 없다며 어디 끌려가더라도 부끄럽지 않을 거라고도 하고. 그러다 또 걱정하고. 혼자 북 치고 장구치고 하길래 호들갑 좀 떨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오빠, 뭐 돼?"라고 호통도 쳤다. 그런 식으로 SNS 자기 계정에 글 좀 썼다고 감옥까지 운운하는 건 허세라는 의미로 절대 잡혀갈 일 없다는 위로 같은 위로를 해줬다. 또 선배에게 나처럼 나대지 마란 말이야 하고 으스댔는데, 그랬던 내가 '스레드'를 봐 버렸다.
스레드는 별천지였다. 그냥 뱉으면 다 말이 되는 줄 아는 이들도 많았는데 특히 윤석열 탄핵을 외치는 계정에는 좌빨이다 간첩이다로 시작해서 외모 비하, 학력 비하, 지역 비하까지 각종 혐오 발언도 서슴지 않는 이들도 많았다. 그러던 중 어떤 계정의 첫 스레드 게시글을 보게 되었다.
@yu_****
여기 좌파니 우파니 정치얘기가 하도 많아서 글써봐
나는 좌파도 우파도 색이 없는 사람인데 왜 이렇게 편가르기를 하는 거야?
이씨가 싫으면 윤씨를 지지하고 윤씨가 싫으면 이씨를 지지하는 거야? 좌파든 우파든 지지를 하는 이유가 있으면 궁금해
우리가 필요한건 우리나라를 잘 굴러가게 만들 사람이 필요한건데, 왜 누굴 뽑든 살아가는건 비슷한 처지인 국민들끼리 헐뜯고 싸워?
이씨 윤씨 둘다 그렇게 욕 할일이 많다면 둘다 지지 안하면 안돼? 여기 글들보면 양측 다 자꾸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 같아서 바로 잡으려면 누가 잘못했니보다 객관적인 문제가 뭐고 해결할 수 있을지 고민하면 더 좋을 것 같아
이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좋았을까. 나도 모르게 그만 댓글이란 걸 써버렸다.
그걸 고민해서 이재명을 지지하고 윤석열 탄핵 파면을 외치는 거야. 글 쓰기 전에 뉴스라도 찾아보면 어떨까?
사실 여기까지만 해도 비호감스러웠을 텐데 저기에 마지막 한 문장을 더 덧붙였다.
아 아니면 혹시 초등학생이니?
아무래도 이게 문제였지 싶다. 물론 앞 선 문장도 비호감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이들에겐 충분히 비호감이었을 텐데 "혹시 초등학생이니?" 라니... 학력비하 대댓글 파티가 시작되었다.
... 초등학교를 사회주의 국가에서 나오셨나봐요...?
너가 초딩같은데 고졸이야?
뉴스는 많이 봤는데 그쪽은 좌편향쪽 된 언론만 봤나보다 안타깝다.
재명이가 나라 중국에 넘기고 있잖아. 혹시 초딩도 못갔니?
경희대 서울대 연세대 대학교 구경이라도 해 봐.
이 밖에 각종 욕이 섞인 비하 발언 등등...
나도 ‘초등학생이니?’라고 빌미를 제공했으니... 입이 한 개라도 마구 변명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참으라면 참을 수 있었다. 하나 결국 대댓글에 또 댓글을 달고야 말았다. 나도 참 기어코.
어느 지역에 그런 학교가 있는지 궁금하긴 하나 굳이 알려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아니
안타깝다고 해줘서 고마워. (진심 욕이 담긴 글을 보다 안타깝다는 글에서 고마움을 느꼈다)
아니 잘 졸업했어.
구경 좋지. 조언 고마워.
등등... 나라고 시원하게 욕지거리 못 할 소냐! 하지만 불난 집에 땔감을 넣으면 기름을 통째로 들이부을 이들이기에 더 많은 욕을 들을 용기는 없어 최대한 짧게 썼다. 인정해야 된다. 나 저 사람들만큼 부지런하지 못하다.
"25만 원 종북 내란견"이라는 타이틀이 달린 강아지 사진을 끊임없이 댓글에 올리는 이도 있었다. 이이에겐 각 사진마다 다음과 같이 댓글을 달았다.
저는 애견인이 아니라서
강아지를 키워본 적이 없어서
사진 반복은 좀 그렇잖아요 (앞에 이미 게시했던 사진을 또 게시했음)
귀엽다 (진짜 귀여운 강아지 사진이었음)
실눈캐 (진짜 실눈이 귀여운 강아지 사진이었음)
안녕히 주무세요 (밤이 늦어서)
저러고 몇 시간 지나 DM폭탄을 받은 거다. 그래도 차단했으니 괜찮겠지 싶었는데 DM을 보낸 이와 다른 계정명을 가진 이가 내 셀카 사진을 스레드에 캡처해서 올렸다. 계정을 비공개로 돌리기 전에 캡처했나 보다. 내용은 이렇다.
어휴 그 나이에
쓰는 글마다 얼마나 쌉소리면
하나같이 공감 누른 사람들이 읍냐.
음주운전, 공무원자격사칭 특수공무집행방해, 선거법위반, 공직선거법위반, 대북송금, 뇌물수수, 공적자금 부정사용, 위증교사 전과4범 지지하나봐? ㅎ
이렇게 쓰고 밑에 내가 셀카를 올렸던 좋아요가 1개인 내 게시물의 캡처 화면을 뙇 게시해 놓았다. 마음에 꽤 들었던 내가 나온 내 사진이었는데... 아무리 봐도 저런 취급을 당할 만큼은 아닌 것 같은데... 그렇지만 이건 내 생각이고 그건 그쪽 생각이니 어쩔 수 없다 치고 물음표에는 답해줘야 했기에
ㅇㅇ
대댓글을 달아줬다. 이쯤 되니 뭐라고 써야 할지... 내 사진 내려달라고 하면서 화만 내 봤자 조롱의 글만 더 심해질 게 뻔했다. 물론 무시하고 안 쓰는 수도 있지만...
이게 좌표를 찍힌다는 거였다. 저 이들은 자기들 마음에 안 드는 게시글을 발견하면 다짜고짜 달려들어 할 수 있는 모든 비하를 해댄다. 그 수준이 상상 이상이 아니라 상상 이하다. 그중 몇 개의 사진은 너무 혐오스러워 신고를 아니할 수 없었다. 저 이들, 사실 저 이들 저 이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저 이들이 어떤 소속감을 가진 단체인지 게시판을 공유하는 모임의 형식을 띠고 있는지 진짜 어떤 커뮤니티를 가지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한 명이 여러 계정 돌려 쓰는 것 같기도 하고 알고리즘이 알려줘서 우연히 몰려다니는 것 같기도 하고. 물론 몇 시간, 몇 분 전의 나에게 저런 이들은 무시가 답인데 왜 상대를 해 준거냐? 스스로 자문하고 후회도 많이 했다. 며칠 전까진 저 이들과 주거니 받거니 긴긴 댓글 나누는 분들을 보면 저렇게까지 설명해 주어도 절대 모를 텐데 왜 스트레스받아가며 저러시나 그러지 말지 했으니까.
내가 선배에게 뭐 되냐고 물었듯이 나도 나에게 "나 뭐 돼?" 물어봤다. "아니."
실제로 내가 당한 건 새발의 피다. 저 이들이 휘두른 폭력에 살짝 생채기 정도 났을 뿐. 나는 나만 나온 셀카 한 장이었지 어떤 분은 그러지 못했다. 내 외모 비하는 참을 수 있지만 주변인까지 끌어들이는 건 참으로 아니지 싶은데 그 선 넘는 짓을 저이들이 마구 해댄다. 그래서 나도 소심한 무언가를 했다. 나도 캡처를 했다. 내 셀카를 캡처한 이의 피드를 내가 다시 캡처하고 나를 비하하는 댓글을 달았던 이들의 댓글도 캡처하고. 어딘가에 게시할 마음은 없으나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4월 4일 헌재의 윤석열 탄핵 재판의 선고일. 드디어 드디어 그날이 정해졌다. 밤에 폰 화면을 캡처하면서 확인해 보니 한참 강아지 사진을 도배하던 나를 내란견이라고 부르는 개장수씨가 사라졌다. 내가 그 이에게 남겼던 글들이 모두 혼잣말이 되었다.
<접근할 수 없는 게시물에 남긴 답글>
내가 댓글을 달면 거의 동시에 강아지 사진으로 대댓글을 달던 참으로 부지런한 이였는데. 나는 그가 관리하는 혐오댓글 어장의 보잘것없는 작디작은 피라미에 불과했고. 혹시라도 내가 모르는 어떤 이의 계정에서 더 심하게 굴고 어마무시한 썰전이 벌였다가 결국 퇴출당한 건가. 이유는 알 수 없다. 갑자기 한 명이 사라졌으니 인터넷상에서 서로 주고받은 말들은 훌훌 털어 벌여야 하나. 혹시 모를 일이다. 다른 유령 계정을 또 파서 활동할지도. 개장수씨는 그러고 다닐 만큼 충분히 부지런해 보였다. 그러던 중 또 다른 이가 사라졌다. 성적 수치심을 일으키는 몹시 불쾌한 사진을 보냈던 이, 댓글을 달자마자 대댓글을 달아주던 그 이도 하루 종일 폰만 붙들고 사는 사람처럼 보였는데 이 이가 조용하다 싶어 캡처한 화면을 보고 계정을 확인하니 없어졌다.
문득 처음 자기는 색은 모르겠고 어느 색이든 윤이든 이든 둘 다 지지하지 말자고 했던 이의 게시물이 갑자기 궁금해졌다. 찾아보니 댓글창에 자신이 쓴 댓글을 고정해 올려놨는데.
이렇게 답답해하며 댓글들 달아줘서 고마워.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내가 아는 정보들은 날 한쪽 색을 띄게 하는데 (중략)
그래도 시발 한쪽 댓글이 월등하게 많아서 다행이야. 너넨 없잖아 지지하는 이유... 자꾸 귀 막고 눈 가리지말고 여기 댓글 쭉 보면서 다들 정신 차렸음 좋겠다~!ㅓ
아이고 머리야. 일종의 함정이었나 보다. 어리석었던 나는 그것도 모르고 덥석 미끼를 물었던 거고. 여하튼 내가 쓰고 주고받았던 댓글 말고도 다른 글들을 대충 훑어봤는데 그 안엔 혐오와 조롱과 모욕이 꽉꽉 담겨 있었다. 그리하여 색이 없다던 계정주인 @yu_****는 사실 엄청 뚜렷한 색의 소유자였음을 밝혀졌고 그 색이 무엇인지도 잘 알 수 있게 되었다.
결론은 @yu_****가 제일 나쁘다. 결코 색 때문이 아니다. 개인적으로 제일 괘씸하다.
저이들은 손가락으로 말하는 댓글을 현실 속 말로도 하고 다닐까. 집회 현장에서나 폭동을 일으킨 자들을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또 대부분의 몇 명은 기가 막히게 시치미 뚝 떼고 안 그런 사람처럼 기가막힌 사회생활을 할 것도 같다. 조용히 욕설배출용 계정은 삭제하고 또 그래도 되는 세상을 꿈꾸며.
'그러니 부디 인터넷상에서 맺은 인연 현생에서는 안 맺기를 바랍니다. 현생에는 계정폭파 같은 건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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