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로또에 당첨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100가지 일들

38. Denial (영화 <나는 부정한다>)

by 옥광



38. Denial (영화 <나는 부정한다>)



* <나는 부정한다 Denial>는 2차 세계대전 홀로코스트 부정론자 데이빗 어빙이 홀로코스트 역사학자 데보라 립스타트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여 진행된 4년간의 재판을 다룬 영화다. <미이라>, <콘스탄틴 가드너>의 레이첼 바이즈가 역사학자 '데보라 립스타트'역을 맡았고 영드 <셜록>의 '모리아티' 앤드류 스캇이 사무 변호사 '앤서니 줄리어스'역을 영화 <벨>의 '할아버지' 톰 윌킨스가 법정 변호사 '리처드 램프턴'역을 맡았다. 그리고 <해리포터> 시리즈의 '웜테일'로도 유명하고 <미스터 터너>에선 '터너'를 연기했던 티모시 스폴이 '데이빗 어빙'을 연기한다.



극우.


극우란 유시민 작가님의 설명을 빌어 말하자면 "극"도로 "우"매한 자들을 말한다.


본디 극우(極右, Extreme right)의 사전적 의미는 극단적인 '우파' 성향을 가진 이들을 뜻하고 '우파'라는 용어가 프랑스혁명이 일어났을 때 국민공회(Convention Nationale) 의장석에서 바라봤을 때 오른쪽에 앉아있던 '왕당파'에서 유래되었던 바 극단적인 민족주의 혹은 기존의 사회 질서와 계층을 유지해 나가려는 극단적인 보수주의자들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상식적으로 알려진 '극우'와 "극"도로 "우"매한 '극우'는 일종의 동음이의어일 뿐이다.


무한 독재정권을 꿈꾸며 시민에게 총부리를 겨눈 내란 수괴 윤석열을 옹호하는 이들은 극우가 아니고 극우다. 극도로 우매한 자들. 공동체 자체가 붕괴되든지 말든지 자신들의 권위와 이익 혹은 순수한 신념(!)만 좇는 몹시 우매하고 미련하며 한없이 유해한 자들. 동시대 사회 문제 포함 지난 역사까지 왜곡해 가며 가짜뉴스를 만들어내고 다시 그 가짜뉴스에 스스로 선동되는 자들. 그나마 불행 중 다행히라면(?) 이러한 자들이 다른 여러 나라에 보편적으로(?) 존재하고 있으니 우리나라만의 고유특성은 아니라는(!) 점이다.


데이빗 어빙(풀네임은 데이빗 존 코델 어빙 David John Cawdell Irving)은 1938년 영국에서 태어난 극우다. 그는 역사를 왜곡하고 아돌프 히틀러를 옹호하며 홀로코스트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 어빙은 그의 저서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유대인 홀로코스트(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책)를 몰랐고 만일 알았다면 반대했을 것이라 주장한다. 하는 짓이 최근 우리나라 극우들이 '부정선거론'을 주장하고 야당의 '종북 간첩설'을 설파하는 것과 유사하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폄하하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사실과 '5.18 민주화운동'을 부정하는 뉴라이트 극우들과도 흡사하다.


어빙은 끊임없이 사람들을 선동했고 이에 현혹된 극우들을 끌어 모으며 왜곡된 사실을 부지런히 주장했다. 매우 쉽고 단순하며 몹시 자극적인 단어와 큰 목소리로(광화문이나 여의도의 극우 집회 선봉에 선 자들처럼). 그리고 1996년에는 미국의 유대인 역사학자 데보라 립스타트를 고소한다.


데보라 립스타트(Deborah Lipstadt)는 미국 애틀랜타 에모리 대학에 적을 둔 2차 세계대전 홀로코스트 연구의 권위자로 홀로코스트 부정론의 오류를 파헤치는 <홀로코스트 부정 : 진실과 기억에 대해 증가하는 공격> 등 여러 편의 책을 썼다.


1994년 립스타트는 자신의 강연장에 불쑥 나타나 막무가내로 토론을 해보자는 어빙의 제안을 일언지하 거절한다. 그녀는 부정론자들이 누구이며 어떤 짓을 벌이고 있는지 분석하고 설명할 수는 있지만 그들과 토론을 할 수는 없다고 했다. 토론은 사실을 기반에 둔 서로 다른 의견과 의견이 부딪히고 조율해 나가는 것이므로 홀로코스트 자체를 부정하는 자의 주장은 토론장의 논쟁거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터무니없는 반유대주의 이데올로기에 책임 있는 역사 기록의 한 페이지에 남겨질 여러 의견 중 하나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줄 수는 없다. 또한 립스타트는 그녀의 책에서 어빙을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역사적으로 성립 불가능한 결론에 이르기 위해 증거를 왜곡한 히틀러 광신도. (영화 <나는 부정한다> 속 대사)"


이를 빌미로 어빙은 립스타트와 그녀의 책을 출간한 영국의 펭귄 북스를 런던 고등 법원에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한 것이다. 자신의 역사가로서의 입지를 불안정하게 만들어 곧 굶어 죽을 판이라면서.


영화 <나는 부정한다>는 이 두 사람의 법정 공방 4년의 과정을 담고 있다.


<나는 부정한다>를 처음 봤던 때가 2017년 즈음 보고 나서 다소 놀랐던 기억이 있다.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나로서는 홀로코스트는 당연한 것이었다. 내가 어떤 전문가 거나 특별히 공부를 해서가 아니다. 그냥 그렇게 배웠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될 끔찍한 사실이지만 다른 나라에서(꽤 먼 땅에서) 일어난 일이었으니 파리엔 에펠탑, 이집트엔 피라미드, 셰익스피어는 영국인, 미국의 수도는 뉴욕이 아니고 워싱턴, 알파벳 순서는 ABCDE... 정도로 단순히 당연하게 알고만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이전부터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 <쉰들러 리스트>, <인생은 아름다워>, <피아니스트>, <사울의 아들> 등등 (최근 <존 오브 인터레스트>까지) 여러 관련 영화를 접해왔던 터라 홀로코스트 자체를 부정한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이 일을 해대는 사람이 있었다. 한 명도 아니고 여러 명이 조직적으로 움직인다. 데이빗 어빙. 어빙은 그 얼토당토않은 무리에서 꽤나 존경받는 인물이다.


"천 달러! 천 달러입니다. 누구든 히틀러가 유대인을 학살했다는 증거가 되는 문서가 있다면 가져오세요. 이 천 달러를 드리겠습니다."

...

"날조된 감성팔이에 속지 마세요."


위의 대사는 영화 극초반, 립스타트의 강연장에 불쑥 나타났던 어빙의 대사 중 일부다. 이때 어빙은 두 명의 '극우' 동료들과 함께였다. 어빙의 발언이 있기 전, 우연인 듯 어빙의 업적을 말하면서 왜 그를 혐오하는지 질문하는 이가 있었는데 이 이가 동료1이요. 계단 그늘 아래에서 강연장을 비디오카메라로 촬영했던 이가 동료2다. 모든 게 짜고 치는 고스톱. 이들 셋은 처음부터 분명한 목적을 두고 강연장엘 향했던 것이다. 립스타트에게 창피 주기. 그녀를 당황하게 만들어 그 모습을 시각정보로 정확하게 남기기. 그리고 어빙의 홈페이지에 올려 널리 알리기. 목적은 성공했고 강연장에 온 다른 사람들에게 어빙의 책까지 나눠주는 이벤트까지 벌인다. 립스타트의 책이 버젓이 있다는 걸 다 알면서. 물론 어빙의 책은 공짜. 유독 동료1의 비릿한 웃음이 뇌리에 박혔다.


어빙은 역사의 진실을 중요히 여기지 않는다. 대신 자신이 어떤 진실(!)을 주장하고 있다는 유명세를 중요히 여긴다. 립스타트는 결코 이런 자와 합의할 수 없었다.


영국과 미국은 명예훼손죄를 다루는 방식이 다르다. 미국에는 무죄추정의 원칙이 있지만 영국엔 없다. 따라서 피고소인이 유죄 판결을 받으려면 명예훼손 고소자 측이 직접 명예 훼손 당했음을 입증해 내야 하지만 영국에선 반대로 피고소인이 무죄를 받으려면 피고소자가 고소자의 명예를 훼손을 한 일이 없음을 입증해 내야만 한다. 립스타트는 어빙과의 재판을 유죄 인간으로 시작한다. 종국에 립스타트의 명예훼손 혐의가 유죄 판결이 나온다면 어빙이 주장하는 아우슈비츠의 가스실 사실무근설 받아들여지고 그의 홀로코스트 부정론도 인정받게 된다. 그간 가스실의 존재를 증언해 왔던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은 거짓말쟁이가 될 수도 있는 터였다.


립스타트의 줄리어스 변호사팀은 어빙이 고의적으로 역사를 왜곡시켰다는 사실을 증명해 내는 정면 대결을 택한다. 이를 위해 케임브리지의 현대사 교수 리처드 에반스와 그의 제자들이 팀에 합류했다. 증거개시절차를 통해 확보한 어빙의 방대한 자료를 샅샅이 읽고 분석하여 거짓과 왜곡 오류를 찾아낼 것이고 꼬박 1년은 걸릴 거라고 했다. 그에 따라 인건비도 확보해야 하고. 이로서... 극 중에서 립스타트가 말하고 에반스가 동의한, 법정은 역사를 판단할 장소가 아니라는 의견에도 불구하고 재판관이기에 앞서 한 개인일 수 있는 어느 판사가 홀로코스트의 진위 여부를 판단하게 되었다. 극 중에 등장하는 로라 타일러도 이 재판 소식에 영국의 모든 국민이 경악했다며 다음과 같은 말을 전했다.


"법정에서 거드름이나 피우는 영국 판사가 홀로코스트의 진위를 판정한다고?"


물론 법정 다툼에 앞서 어빙이 제시한 제안에 응하는 '합의'라는, 얼핏 합리적이면서 상당히 간단할 수 있는 방법도 있었다. 합의는 립스타트 스스로가 어빙의 명예를 훼손했음을 인정한다는 꼴이 될수도 있으니 당연히 피하려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 중 이 방법을 추천하는 이들이 있었고 이 중에는 꽤나 부유해 보이는 런던의 유대인 커뮤니티도 있었다. 립스타트는 재판의 진행비에 도움을 받고자 그들을 만났지만 그들은 어렵고 험한 길을 택한 립스타트에게 후원금 대신 편하고 간단하며 빠른 길을 안내하고자 했다. 결코 해주고 싶지 않은 그 합의. 그들의 말을 해석해 보자면 이렇다. 어빙은 한낱 잡초에 불과한 보잘것없는 인간이 아닌가. 소중한 텃밭에 불쑥 자리 잡은 고약한 잡초가 불쾌하겠지만 어차피 시간이 흐르고 나면 알아서 시들시들 죽어 나갈 테니 그냥 두어도 괜찮지 아니한가, 굳이 손에 더러운 흙까지 묻혀가며 그 잡초를 뽑아낼 수고를 들여야 할까, 그냥 작은 땅 한편 내주면 서로서로 좋은 일이 아닌가. 그 잡초의 흙 속 보이지 않는 뿌리가 얼마만큼 뻗어나갈지, 뻗어나가서 다른 소중한 작물에 어떤 짓을 벌일지는 기어코 고려하지 않으려는 이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것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들은 홀로코스트를 알고 있다. 다만 그게 다였다. 부정만 안 하는, 딱 그만큼인. 모든 유대인이 같은 건 아니다.


유대인 특히 아우슈비츠 생존자였던 어느 유대인은 립스타트에게 직접 찾아와 자신과 자신의 친구들을 이 재판에 증인으로 세워 줄 것을 청한다. 직접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 관해 법정에서 말하겠다고 했다. 물론 립스타트도 이 방법이 가장 효과적일 거라 생각은 하고 있었으나... 사무 변호사 줄리어스와 처음부터 이 방법을 결코 실행할 수 없다고 매우 완강하게 선을 그었다. 어빙이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았음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만일 아우슈비츠 생존자가 법정에 선다면 홀로코스트 부정론자 어빙이 직접 그들을 심문하게 된다. 줄리어스는 이것만큼은 죽어도 막을 거라고 강하게 말한다.


어차피 역사 앞에선 제3자 일 수밖에 없다.


가장 직접적인 증인을 내세우지 않는 재판이 진행되었다. 본격적인 재판에 앞서 립스타트는 법정 변호사 리처드 램프턴을 만난다. (램프턴이 자연스럽게 담배를 꺼내 입에 무는 것을 보며 새삼 실내 흡연이 가능했던 때구나 놀라기도. 저때가 옛날(?)은 옛날(?)이구나.) 처음 등장할 땐 그저 사람 좋아 보이는 할아버지구나 싶었는데... 그는 대뜸 아우슈비츠엘 가보자고 한다. 립스타트는 굳은 얼굴이 되어 왜 가야 하는지 물어보고 램프턴은 법적인 이유라고 답한다. 그녀는 그가 아우슈비츠를 단순 범죄현장처럼 취급하는 것이 불쾌하기만 하다. 그는 철저하게 제3자의 모습으로만 있었다. 아마도 부정론자들이 사실을 어떻게 왜곡했는지 알아보고자 했었던 것도 같지만. 제3자는 일일이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립스타트가 그를 심문한다.


"(아우슈비츠)에서 뭘 느꼈는데요?"

"수치심. 내가 그런 것들을 지시받았더라면 나약한 마음에 따랐을 테니까."

"솔직하시네요."


그래서였을까. 물론 위 대화 전에 내려진 결정으로 두 변호사들은 립스타트에게 함구령을 내린다. 아예 증언대에 서지 말란다. 여러 차례 재판을 치르기 위해 들어가고 나올 때마다 맞닥트리는 기자들 앞에서도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두 사람은 철저하게 어빙에게만 포커스를 두기로 한다. 정확하게는 그의 실수 혹은 그의 의도된 오류. 대신 포커스는 어빙에게 두되 시선은 두지 않는다. 이는 사전 심리 때부터 볼 수 있는데 줄리어스는 배심원 배제의 이유를 설명하면서 결코 어빙을 쳐다보지 않았다. 램프턴도 마찬가지다. 법정에서 스스로를 변호하는 어빙이 무어라 떠들어 대던 기어코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이는 이후에 치러진 재판에서도 내내 계속된다.


"구멍도 없었고 홀로코스트도 없었다! (No holes, no holocaust!)"


결국 신문의 헤드라인을 차지한 어빙의 말 한마디는 립스타트의 꼭지를 돌게도 만든다. 재판은 그렇게 흘러간다. 어쩔 땐 우리 편이 이기는 것 같다가도 어쩔 때는 쟤네 편이 이기는 것 같다.


재판의 결론부터 말하자면 립스타트 측은 승소한다. 당연히 승소해야만 했다. 그리고 립스타트와 그녀의 변호사 팀은 이 당연한 결과에 이르기까지 몹시 지난한 시간을 견뎌내야만 했다. 우리나라 법정 드라마에서처럼 극적인 타이밍에 주요한 증인이 나타나준다던가 혹은 판사가 판결봉을 두드리기 전 결정적인 증거가 담긴 USB 따위가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아 재판이 진행되던 때는 USB라는 게 나타나기 전이기도 하다.) 립스타트의 변호사들은 철저하게 제3자가 되어 이 상황을 정면돌파했다.


"홀로코스트. 홀로코스트. 세상에는 다른 일도 많아. 언젠가는 잊고 지나가야지."


앞서 언급했던 로라 타일러가 어빙의 기록을 밤새 분석하니 그의 남자친구로 보이는 자가 그녀에게 했던 말이다. 아마 그녀는 저런 말을 듣는 것이 무리도 아닐 만큼 매일 밤을 지새웠을 것이다. 이들은 스스로를 객관적인 눈을 가진 미래지향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자신들이야 말로 진정한 제3자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를 보고 다시 램프턴이 말 한 "수치심"이란 단어가 떠 올렸다. 나도 내가 먹고사는 데 지치면 충분히 저렇게 될 수 있다. 나는 여기서 수치심을 제대로 느꼈다. 제3자는 제3자. 다만 수치심을 모르는 제3자. 그렇다면 다시 "수치심"을 아는 제3자의 말에 귀 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 자신을 대신한 사람을 믿어본 적이 없고 오로지 자신의 목소리와 양심만을 믿는다는 립스타트에게 램프턴은 이런 말을 한다.


"양심이란 이상한 존재죠. 하지만 최선으로 느껴지는 게 반드시 최선을 결과를 낳는 건 아니에요. 물론 마음은 편하겠죠. 악마를 노려보며 감정을 쏟아내면 마음은 한결 가벼워질 거예요. 대신 패배를 각오해야 하죠. 혼자만의 패배가 아닌 모든 이들의 영원한 패배."

"그렇지 않으면요?"

"잘 알잖아요. 가만히 앉아서 입을 닫고 이기세요."


이는 최선으로 느껴지는 느낌을 따를 것이 아니라 최선의 결과를 낳는 방법을 따라야 한다고 설득하는 것과 같다. 물론 쉽지 않다. 여기에는 큰 괴로움이 따른다는 것을 전제로 두었다. 보통이 아닌 큰 괴로움. 실제로 램프턴은 아우슈비츠를 범죄현장으로만 바라봐야만 했던 본인의 시선을 혼자만의 괴로움을 감내해내고 있었다. 그리하여


"자기부정이 필요하단 겁니다."


영화의 제목 <나는 부정한다>는 얼핏 그릇된 역사관을 가진 이들 혹은 거짓된 뉴스로 사람들을 선동하는 이들을 인정하지 못하겠다 부정하겠다의 뜻으로 들릴 수 있으나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면 이게 아님을 깨닫게 된다. 이것은 어떤 마음가짐에 관한 것이다.


영화의 영상이 시작하는 첫 부분, 실화에 바탕을 둔 이야기라는 짧은 자막 후에 어빙이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여자보다 에드워드 케네디의 차 뒷좌석에서 죽은 여자가 더 많다고 말하는 부분 씬 바로 다음엔 립스타트가 강의하는 장면이 붙는다.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들에 대해 요약해 설명하고 질문한다. 홀로코스트를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혹시 사진? 아니면 어빙이 천 달러와 맞바꿔주겠다는 어떤 문서? 시각적인 증거는 무엇 하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다양한 증거와 증언을 연결하여 인과관계를 밝힌 것이다. 만에 하나 작은 오류를 발견해 낼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 하나를 가지고 자기 입맛에 맞게 해석해 전체를 왜곡해선 안 된다. 빨간색 사과에 초록색 점이 하나 찍혀 있다고 빨간색 사과가 초록색 사과가 되는 건 아니다. 누군가가 작은 오류를 하나를 붙잡고 판을 뒤엎는다고 해서 같이 그 오류만 쳐다봐선 안 된다. 꼭 맞게 연결되어 있는 큰 판을 바라봐야 한다.


"(어빙이) 자신의 말을 진심으로 믿는 거라면?


진실은 남이 알려주는 게 아니다. 자신이 믿는 게 진실이다. 그래서 판사도 이렇게 질문하지 않았나.

그런 시각(반 유대주의)을 갖고 그런 표현(홀로코스트 부인)을 하는 게 진짜 그런 믿음을 가지고 하는 행동이라면 거짓말이 아닐 수도 있다. 초록색 점에 대한 믿음으로 빨간색 전체를 보여줘도 인정하지 못하는 이는 자기부정을 못하는 어빙과도 같은 자이다. 또 '극'도로 '우'매한 자들과도 일맥상통한다.


재판이 모두 끝나고 판결문을 기다리는 립스타트의 강의 장면은 마지막 부분에 또 나온다.

이때 립스타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때 독일에 있었다면 난 협조 안 했어. 저항했을 거야. 웃음부터 나오죠. 그게 얼마나 위험하고 어려웠을지 알아요? 적 앞에 서는 건 고되고 지치는 일이에요. 그래도 해야만 했어요. 영웅 소리는 다 지나고 나서야 들을 수 있죠. 당시엔 두렵기만 해요. 어떻게 될지 마냥 두렵죠."


처음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에 관해 다소 쉽게 말했던 것과는 달라진다. 나라면 당연히 이렇게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스스로 부정한 자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다.


2000년 4월 11일 판결일, 립스타트는 이미 24시간 전부터 결과를 알고 있는 변호인단과 함께 재판에 출석한다. 스스로 변호한 어빙도 결과를 알고 왔을까? 그도 날달걀 비난 세례와 열혈 극우 동지들의 환호를 동시에 받으며 법원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들은 344페이지에 달하는 판결문 끝에 립스타트의 승소를 확인했다.


그리하여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나온다. 패소한 어빙이 램프턴에게 수고했다며 손을 내민다. 어빙이 내민 손이 아니 보였을 리가 없고 어빙이 하는 말이 아니 들렸을 리가 없다. 그러나 램프턴은 이전부터 해오던 대로 계속해나간다. 여전히 고개 한 번 돌아봐 주지 않고 시선 한 번 두지 않은 채 그의 방향만을 향했다. 재판 처음부터 할 말이 너무 많아 보였던 립스타트도 어빙에게 할 말이 없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에게 할 말은 없다고 답한다. 대신 진정으로 귀 기울여야 할 분들에게 시선을 둔다.


어빙은 패소 후 보상금으로 150만 파운드를 지불하라는 선고를 받았지만 여기에 파산선고를 해버렸다. 보상금을 내지 않기 위해서라고. 데이빗 어빙은 끝까지 자신을 부인하지 못했다. 재판의 승리가 어빙의 반성이 될 수는 없는 거였다. 증거. 증거를 가져오면 천 달러는 주겠다는 어빙은 진짜 기적과 같은 확률로 증거를 찾아내 보여준다 해도 그 증거를 모르쇠 할 자다. 특히 딥페이크, A.I목소리등 가짜를 더 진짜같이 만들 수도 있는 요즘시대엔 더 원하는 대로 해석만 하려 들 것이다. 어빙은 이 재판을 통해 세계 곳곳의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재판에 참여해 700페이지가 넘는 보고서를 작성했던 에번스 교수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히틀러에 대한 거짓말하기>를 출간하려 했으나 처음 출간하기로 한 영국의 출판사에서 계약 취소를 당한다. 립스타트와 함께 고소당했던 펭귄북스가 200만 파운드를 재판 비용으로 쓰는 것을 보고 비슷한 이슈를 야기시킬 수 있는 논쟁적인 책은 피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후 미국의 한 출판사에서 무사히 책을 출간한다.



* 영국은 2010년 1월 명예훼손법을 크게 바꾸어 선동적 명예훼손과 사인 간 명예훼손죄를 폐지했다. 표현의 자유를 지나치게 억압하고 있다는 점이 반영된 것이다. 따라서 명예훼손과 관련 민사 재판은 열릴 수 있으나(이전보다 어려워졌고) 형사 재판은 열릴 수 없다.









38

keyword
일요일 연재
이전 07화로또에 당첨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100가지 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