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의 대가 리스트의 결혼 실패기
오늘은 2020년 9월 2일, 돌아온 코로나로 온 나라가 또다시 잠깐 정지가 돼버리니, 소상공인도, 예술인도, 대기업도 모두가 힘들겠지만, 가장 애가 타는 사람들은 3-4월에 치루어야 할 결혼식을 9월로 미룬 예비부부들인 것 같네요. 결혼식 날짜를 잡았다 미루고, 또 미루어야 하고, 그 와중에 집값과 전셋값은 폭등하고. 쉽지 않은 세상에서 사네요.
예나 지금이나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식을 올리고 만인의 축복 하에 함께 사는 것은 참으로 어여운 일인가 봐요.
더군다나, 수입이 안정적이지 않고 연주 여행을 많이 다니며 대중 앞에 서야 하는 음악가는 1등 사윗감/ 남편감 후보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음악 역사에 남을 유명한 음악가들도 결혼이 힘들었다면, 믿어지시나요?
최고의 톱스타였던 리스트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말년에는 수도원에 들어가 성직자의 삶을 살지요.
광장히 거룩한 삶을 사신 분 같지 않으신가요?
하지만, 꼭 거룩해서 결혼을 하지 않으신 게 아니랍니다.
독일령의 헝가리 마을에서 악기를 가르치는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리스트는
그의 재능을 눈여겨본 극성 아버지 덕에, 당시 최고의 교육자로 알려진 카를 체르니(네! 그 체르니 책 쓰신 분 맞습니다), 안토니오 살리에리 등에게서 피아노, 작곡, 대위법 등을 공부했습니다.
14살 때부터 신동으로 이름을 날리며 연주 여행을 다니던 리스트는,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파리 음악원에 불합격하고, 아버지마저 돌아가시자,
파리로 이사해, 피아노 과외, 연주 알바, 작곡, 편곡들을 하며 생계를 이어 나갔습니다.
리스트의 인생을 바꾼 것은 21세 때 파가니니의 연주를 보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파가니니의 테크닉과 관중을 휘어잡는 무대 매너에 반한 리스트는
이를 따라 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하며
파가니니의 "라 캄파넬라", "24 카프리스" 등을 피아노로 편곡하고 연주함으로
당당히 클래식계의 아이돌로 떠오르며
오빠부대를 몰고 다니며 콘서트 피아니스트로 그의 이름을 날리게 됩니다.
리스트 첫 번째 공식 사모님은 6살 연상의 파리 사교계의 꽃,
마리 다구 백작 부인(Comtess Marie d'Agoult, 1805-1876)였어요.
다구 백작과 혼인 상태였던 마리는 리스트와의 첫 딸 블랑댕을 임신하고 제네바로 거처를 옮겨,
4년 동안 2명의 딸과 아들 하나를 두고,
리스트의 여성 편력과 다구 부인의 낭비벽 때문에 파경을 맞게 됩니다.
다구 백작 부인은 리스트의 많은 여자들 중에 아이를 낳아준 유일한 여자였지만,
시작이 불륜이었기에 결혼은 생각도 못했지요.
리스트의 큰 딸과 막내아들은 피아니스트로서의 자질을 보이지만 20살 즈음 병에 걸려 요절하고,
두 번째 딸인 코지마는 당대 유명한 지휘자인 한스 본 뷸로와 결혼했다가
바그너를 만나 사랑의 도주행각을 벌입니다. 부모님의 피를 확실히 물려받았지요.
참고로 바그너는 장인인 리스트보다 1 살 밖에 어리지 않으니,
족보가 참 꼬이네요.
리스트가 진짜 결혼하고 싶어 하던 여자는 러시아의 자인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이었습니다
폴란드 출신으로 러시아의 비트겐슈타인 공작과 정략결혼을 한 공작부인은,
굉장히 많은 토지와 재산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리스트와 공작부인은 30대 중반에 사랑에 빠진 답니다.
리스트는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을 만나고는 연주여행을 접고
바이마르에 정착하여 비트겐슈타인 공작 부인과의 결혼을 꿈꾸는데요,
너무 많은 재산을 가진 부인과의 결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어요.
일단, 가톨릭 신자였던 두 사람은, 교황께서 공작 부인의 이혼을 허락하셔야 리스트와 결혼할 수 있는데
재산이 탐난 비트겐슈타인 공작께서는 가톨릭 신자도 아니면서, 절대로 이혼할 수 없다고 버티셨고
교회에 로비를 해대며 절대로 이혼이 성립되지 않도록 애쓰셨는데,
남편을 달래고, 교황청에 로비를 하며 끈질기게 이혼에 매달린 리스트와 공작부인은
그녀의 거의 모든 재산을 딸과 남편, 그리고 나라에 주기로 하고
리스트와의 결혼을 추진하지요.
1861년, 리스트의 50세 생일로 결혼식 날짜를 잡지만,
결국 결혼식은 공작부인이 가장 사랑하는 딸 마리에 의해 무산이 되지요.
가톨릭 교회는 공작부인의 이혼은 허락했지만,
결혼을 허락하기 전에 이의 신청이 있으면 이혼을 무효화할 수 있는데,
당시 또 다른 러시아의 귀족과 약혼 중이었던 딸 마리는
혹시라도 자신의 어머니가 리스트와 결혼하면
어머니의 모든 재산이 나라에 빼앗길 것을 염려해, 결혼식 하루 전 이의신청을 접수하게 되고,
결국, 리스트의 결혼은 무산됩니다.
아들(1859)과 큰 딸(1862)을 연이어 잃어 슬픔에 빠져 있던 리스트에게
결혼의 좌절까지는 견디기 힘든 슬픔이었던 가봅니다.
리스트는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과 헤어져
1863년 프란치스코 수도회 로사리오 성모 마리아 수도회(Madonna del Rosario Monastery)에 입회
그는 2년 후 수도사로 서품을 받았지만,
사제서품까지는 받지 않고 말년을 로마, 바이마르, 부다페스트를 오가며 마스터 클래스를 여는 등 교육활동에 매진하다가
1886년, 바이로이트 극장에서 사위 바그너의 작품을 감상한 후 가벼운 감기에 걸려 투병 중,
폐렴으로 번져 자신의 딸 코지마 바그너의 품에서 세상을 떠났답니다.
리스트의 출생지인 라이딩, 그가 마지막으로 일을 했던 바이마르, 헝가리의 부다페스트 등에서 리스트의 무덤을 유치하고 싶어 경쟁 했지만,
결국 리스트는 딸이 살던 바이로이트의 시립묘지에 안장되었다네요.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도 리스트와의 결별 이후, 수녀원에 들어가 수도자의 길을 걸었으며,
리스트의 죽음을 접하고 삶의 의욕을 잃고 괴로워 하다가 8개월 후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그녀가 남긴 유서에 그녀는 카롤리네 리스트라고 서명을 했다고 하니,
평생 리스트를 마음에 품었던 그녀의 아픔이 전해지는 듯하네요.
결혼, 참 힘든 거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