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가기 힘드네요

파가니니 수난기

10월 27일은 바이올린의 신으로 불리는 니콜로 파가니니(Nicollo Paganini, 1782. 10. 27–1840. 5. 27)의 생일입니다. 파가니니는 너무 친숙한 이름이라, 낭만시대 작곡가로 착각하기 쉽지만, 사실, 파가니니는 베토벤과 띠동갑으로 1782년에 태어났습니다. 베토벤과 하이든이 아직 건재할 때, 파가니니는 바이올리니스트로 그 명성을 떨쳤으며, 리스트가 그의 영향을 받아 독주 피아니스트로의 커리어를 쌓아갑니다.

파가니니


이탈리아의 제노바에서 태어난 파가니니는 일찍 그의 재능을 알아본 부친에게서 혹독한 트레이닝을 받습니다. 모두가 자신의 아이를 모차르트의 뒤를 이을 신동으로 키우려고 애를 쓰던 때라, 파가니니도 하루 열 시간 이상 연습을 하며 유명한 선생님들에 의해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키워졌습니다. 파가니니는 열입곱 살에 이미 유명해져, 많은 연주와 교습으로 경제적으로 안정된 데다가, 새로 세워진 루카 공화국의 최초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임명됩니다. 하지만, 파가니니는 1801년부터 1804년까지 토스카나의 한 궁에서 은둔생활을 하며 그 궁의 귀부인과 생활을 했다고 알려집니다. 후일, 이 공백기는 파가니니가 사람을 죽여 살인죄로 투옥됐었다느니,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기술을 익혔었다느니 하며 파가니니에 대한 미스터리를 더 흥미롭게 만듭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판 파가니니

파가니니의 젊은 나이의 성공은 그에게 돈과 명예 그리고 수많은 여성팬들을 안겨줍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까만색 정장을 차려입고, 기다란 손으로 특이한 테크닉과 아름다운 멜로디를 연주하는 파가니니는 처음으로
"독주 바이올리니스트" 로 입지를 넓혀 나갑니다. 하지만, 이런 명성과 돈 때문에, 파가니니는 여성들과 도박에 탐닉하게 되고, 결국은 자신의 악기까지 팔아먹는 신세가 됩니다. 이에, 아마추어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사업가인 지인이 자신이 소리를 내기에는 조금 버겁다고 생각했던 1743년도에 만들어진 과르네리 델 제수를 선물합니다. 파가니니는 이 악기의 커다란 소리가 마음에 들었다고 합니다. 파가니니는 자신의 기량과 음악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리가 작았기에 이 악기를 "대포"라고 부르며 죽을 때까지 연주했다고 합니다. 지금 이 "과르네리 델 제수, 대포, 1743"은 이탈리아의 제노아 시청에 언제나 연주 가능한 상태로 유지되어 보관되어 있습니다. 파가니니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 1 등 연주자에게 이 악기를 연주할 수 있는 특권이 부여되는데, 영광스럽게도 2015년 우승자인 한국의 양인모 군은 저에게 초등학교 저학년 때 레슨을 다니던 귀여운 꼬마였는데 어느새 이렇게 커서 훌륭한 연주자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캐논 과르네리 델 제수, 1743
캐논으로 연주하는 양인모 군

파가니니는 여러 여성들과 염문을 뿌렸지만, 결혼은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1824년 성악가였던 안토니아 비안키와 파르마 지역에 정착하고 아들인 아킬레스 파가니니(1825-1895)를 낳았지만, 두 사람은 결혼하지 않았고, 파가니니는 1828년 아들의 양육권을 얻어 연주여행에 데리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에게만큼은 사랑을 아끼지 않았던 파가니니는 말년, 자신의 목소리를 잃게 되어 아들인 아킬레스가 파가니니가 하고 싶은 말을 귀에 속삭이면, 이를 상대방에게 전해줬다고 합니다. 1836년, 자신의 연주와 흥행을 위해 파리에 "파가니니 카지노"를 열었던 파가니니는, 건강이 악화돼 더 이상 연주하지 못하고 카지노 문을 닫음으로 엄청난 손해를 입고 많은 빚쟁이들에게 시달려야 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개인 소장품들까지 경매에 넘기면서도 파가니니는 자신의 아들을 위해 많은 돈과 함께 남작 지위를 보장받을 수 있도록 아들의 뒤를 살핍니다. 파가니니는 제노바도, 파리도 아닌 요양을 위해 잠깐 머물고 있던 프랑스 니스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아킬레스 파가니니


파가니니의 진짜 기구한 사연은 그의 죽음 후에 일어납니다. 가톨릭교도였던 그는, 마지막 고해성사를 위해 니스의 주교님께 부탁을 합니다. 그런데, 주교님께서 파가니니를 찾아갔을 때, 파가니니는 살짝 기운이 난 상태로, 자신이 죽을 것 같지 않다며 주교님을 돌려보냅니다. 하지만, 그 후 일주일도 지나기 전, 파가니니의 상태는 점점 더 나빠지기 시작하고, 주교님이 미처 도착하시기 전에 마지막 고해성사를 하지 못하고 숨을 거두고 맙니다. 가뜩이나 악마의 테크닉을 가지고 있다며 교회 마음에 들지 않았던 파가니니를 교황은 교회묘지에 묻히도록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의 시신은 자신이 죽은 침대 위에 2 개월간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가, 방부 처리되어 그 집의 지하실로 옮겨집니다. 교회가 계속 그의 매장을 허락하지 않자, 그의 시신은 버려진 나병환자의 집으로, 올리브 오일 공장의 낡은 통으로, 그리고 니스 근처의 개인집으로 옮겨집니다. 파가니니가 세상을 떠난 지 4년이 지난 후에야 교황 그레고리 16세가 그의 시신을 제노바로 옮길 수 있도록 허락은 해 주었지만, 매장은 허가되지 않습니다. 파가니니의 시신은 1876년, 그가 세상을 떠난 지 36년이 지나서야 마침내 제노바 근처, 파르마의 라 빌레타 공동묘지에 안장됩니다. 하지만, 파가니니의 시신의 수난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1893년, 체코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온드릭(František Ondříček, 1857-1922)이 파가니니의 손자인 아틸라(Atttila Paganini, 1857-1939)를 파가니니의 시신을 연구해 보자며 설득해 그의 무덤을 파보기로 합니다. 자신의 할아버지의 무덤을 파고 시신을 들여다보았던 아틸라 덕분에 파가니니는 1896년 같은 라 빌레타 공동묘지의 다른 곳으로 이장이 되니, 아들인 아킬레스는 파가니니를 묻으려 애쓰고, 손자인 아틸라는 그 무덤을 파헤치는 말도 안 되는 일들을 겪고파가니니는 지금 자신의 출생지가 아닌, 파르마에서 영원한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파가니니의 시신을 파본 온드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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