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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성철 Aug 31. 2020

그 누군가가 되는 길

가해자를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담에 “번갯불에 콩 볶아 먹는다.”라는 말이 있다.

사람은 뒷전이고 속도와 실적 우선주의 무한경쟁이 계속된다면, 취업이나 공무원 실기 시험에 번갯불에 콩을 볶는 항목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합법으로 위장한 경쟁 사회라는 공간에서, 신분 상승을 위해 생존을 위해 번개보다 빠르게 남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번개보다 빠른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생겨나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면, 피해자는 알고 가해자는 모르는 상처 받은 사람들이 수없이 생겨난다.

가해자란 개인이 될 수도 있고 집단이 될 수도 있다. 신체나 물질적 해를 입힌 뚜렷한 실체가 있는 가해자는 법적 처벌이 가능하다. 그러나, 정신적인 가해는 증명하기도 힘들다. 개개인의 성격 차이는 있겠지만, 현대인이 받는 스트레스가 정신적 해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실적을 나타내는 통계 자료, 걸핏하면 인력진단 경영진단, 결과에 필수적으로 따르는 구조조정, 이런 것에 대한 가해자는 불분명하다.


예측하기 힘든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바람 한 점 없는 연못의 바닥에 마음이 착 가라앉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은 누군가를 만나 마음속에 쌓여있는 덩어리들을 뱉어내고 싶다.


오래전, 지리산 산행길에 움막에 사시는 자칭 도인을 만난 적이 있었다.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나를 찾아 떠나는 홀로 산행이었다. 

영상매체에서 자주 접하는 전형적인 도인의 모습에 한 치의 어긋남이 없었다.

말로만 듣던 도인이라 한없는 존경심을 가지고 도인의 움막 앞 바위에 마주 앉았다.


도인님의 첫마디 "술 있어?"


도인님은 배낭 속에 출렁거리는 4홉들이 소주 1병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다.

술잔이 오가고 여름 한낮의 땡볕 바위에 앉아 도인님은 말씀하시고 나는 일일 제자가 되었다.

삼신봉과 삼신 할매, 칠선폭포의 유래, 피아골과 빨치산 이야기 등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만 했다.

가끔, 내가 질문을 하면 딴청을 부리고 산에 혼자 다니면 위험하다는, 그저 그렇고 그런 이야기를 아주 근엄한 표정으로 말씀하신다.

술기운에 얼굴은 붉어지고 여름의 따가운 햇빛이 살을 찌르는 아픔 속에 3시간이 지나서야 술병이 비워다.


곁눈질로 빈 술병을 확인한 도인님이 "술 더 없는가?"


나는 석 잔 정도 마셨고 나머지는 도인님이 다 마셨던 것 같다


"예 없습니다"라는 말에, 도인님이  잠시 눈을 지그시 감더니 "그럼 조심해서 가 보시게"


지금 생각하면, 그분은 대화의 상대와 술이 필요했고 나는 그분의 그 누군가가 되었다.


그 누군가를 우연히 만날 수도 있겠지만 현실에서는 쉽지는 않다.

이 누군가를 찾으려고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아! 이 사람이야 하는 누군가는 찾지 못하고, 혼자 쓸쓸히 술을 마시거나 마음속 덩어리를 끌어안고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럴 때면, 그런 누군가 하나 없다는 현실에 나 자신이 한없이 한심하고 나약해 보인다.

그런 친구 하나 없이 어떻게 여기까지 살아왔나 하는 생각에 과거를 되짚어 본다.     


위로는커녕 나를 화나게 해서 제외하고,

근성으로 듣기만 해서 제외하고,

나의 비밀을 남에게 전달해서 제외하고,

(이런 부류가 제일 싫다)

올바른 답도 없이 말만 장황하게 늘어놓아 제외하고,

마음 아픈 건 네 일이고 술만 마시고 가는 사람 제외하고,

제외하고 제외하다 보니, 제외할 수 없는 나만 남았다.    

(왜 혼술을 하는지 알겠다)


반대로 생각해 본다. 나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주는 척하지는 않았는지,

상대방의 아픔을 약점으로 이용하지는 않았는지,

세상이 다 그렇다고, 누구나 다 그렇게 살아간다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책임지지 못할 미사여구나 날리지 않았는지,

지금 생각해 보니 너무 많은 것 같다.

아니,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마조 선사의 월면불(月面佛) 일면불(日面佛)이란 말이 떠오른다.

1800년을 살아도 부처요, 하루를 살아도 부처다.

부처님처럼 살 수도 없고 자신도 없다.

하지만, 복잡 미묘하고 계산적인 사회구조 속에 그 누군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는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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