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성철 Aug 30. 2020

시월에 묶여 있습니다.

바이올린 협주곡 비발디의 “사계(四季)”는 4계절의 풍경을 잘 묘사한 음악이다.

사계 중 천둥 번개가 치고 우박이 떨어지는 여름의 연주보다는 수확의 기쁨과 쓸쓸함을 떠올리는 가을 연주에 마음이 더 움직인다.


사계절이 뚜렷한 금수강산을 찬양 한지가 엊그제인데, 지금 봄·가을은 노루 꼬리처럼 짧고, 여름·겨울은 말꼬리처럼 길기만 하다. 그것도 모자라 금수강산이 빈부 격차와 흙수저 금수저의 구분이 뚜렷한 땅으로 변했다. 


여름과 겨울 사이, 비좁은 틈새에 자리 잡은 가을은 여전히 많은 의문을 남겨놓고 떠나려 한다.      


가을은, 농부는 수확을 끝내고 일 년의 손익계산서를 따져본다.

다음 해에는 어떤 작물을 심을지 자료를 수집하고 준비한다.


나뭇잎은 일 년 중 가장 아름다운 옷으로 갈아입고 연인들을 초대해 작별 인사를 나눈다.

나눈다는 것은 나뭇잎의 생각이고, 연인들은 그들만의 추억 만들기에 빠져있다.

나무는 더 큰 가지를 뻗기 위해 뿌리에 영양분을 저장하고 맨몸으로 맞설 겨울을 기다린다.


화초는 꽃을 떨어뜨려 생이별을 하고, 꽃대는 스스로 녹아내린다.

차가운 감정의 겨울이 서서히 다가오고 만물은 다음을 준비한다.     


일 년의 마지막 달이 12월이지만,

나에게는 시월이 마지막 달이다.

앞만 보고 달리다 시월이 되면 걸음을 멈춘다.

엄격히 말해, 나만 멈추고 시간은 더 빠르게 달린다.

일 년 중 생각이 깊어지는 계절이 가을이고 시월이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본다.

상반신에 물음표 하나 찍혀 있다.

유독 큰 머리와 가는 목과 뛰는 심장의 조합이 ?이다.

삶을 아직도 모른다는 것이다.

아니,  영원히 모르고 살다가  갈 것이다.


시골 빈집을 지키는 감나무는 모든 걸 내려놓고 가지만 남았다.

지나가는 별들이 잠시 쉬었다가 새벽이면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결실이, 감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리기를 기원했지만 빈 가지이다.

시월은, 이유 없이 감정과 연민이 뒤섞여 혼란과 충돌을 일으킨다.     


우리의 삶에도, 오늘 하루에도, 사계절은 있다.

매년 시월이 되면 그해의 결실이 무엇인지 냉정하게 짚어본다.

그러다가 고개 떨구고 긴 한숨 내 쉰다.     


매년 결실은 제로가 아니면 마이너스로 넘쳐나는 통장의 잔고처럼, 인생도 마이너스로 살아왔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한다. 그럴 때마다, 남은 시간을 버틸 마음의 뿌리는 힘을 잃어간다.


매번 그렇지만 시월은 반성과 후회로 가득하다. 올해를 반성하고 지금까지 살아온 계절을 되돌아보고 다가올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데.     


가을이 되면 풍성한 글쓰기를 기원한다.

천고마비의 계절에 좋은 글 많이 쓰라는 덕담도 서로 주고받는다.

가을, 시월부터 나의 글쓰기는 멈춘다.

글을 쓰려는 마음보다 후회와 잡념으로 가득 차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컴퓨터 앞에 앉아도, 생각을 가다듬어도, 한 줄의 글도 쓰지 못한다.

추수 끝난 들판처럼 머리는 텅 비었다.

빈 곳에 바람 불어 먼지만 날리고,

가끔, 몇 마리 새소리 마음을 휘젓고 떠난다.     


축 널어진 마음은 원상복구가 되지 않는다.

이번 겨울의 기상 예보는 사상 최고의 한파라 한다.


마음이 시월에 묶여있다.

속수무책이다.

복원력을 잃었다.     


이번 가을은 마음 깊이 선방 하나 짓겠다.

겨울이 끝날 때까지 동안거에 들겠다.

그리고, 다시는 시월에 묶이지 않으련다.        

이전 08화 그 누군가가 되는 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