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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망별 Jun 04. 2021

끝은 끝이다(1)_외력보다 내력이 더 세게

누군가는 말한다.
졸업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하지만 나는 끝이길 바랬다.




졸업이 다가왔고, 교장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네가 이번 졸업생 중 수석이란다. 특히 체육 같은 선택 과목을 제외한 필수 과목에서는 2등인 Nathan 하고 격차가 아주 크게 1등 성적을 기록했어. 잘했다."


진심으로 온화한 눈빛으로 말하는 교장 선생님의 말이 기분 좋기는 했지만, 사실 뛸 듯이 기쁘거나 나 자신이 막 자랑스러웠던 건 아니다. 당시 한국 사람들에게 무수히 들었던 말이, "한국 애들은 외국 나가면 다 공부 잘해. 외국 애들이 수학도 못하고 교육열 자체가 높지 않잖아"였기 때문에 과테말라 같은 외딴 나라의 작은 미국 학교에서 수석 졸업을 하는 것을 기뻐하면 그게 더 못나 보일 것 같았다.


돌이켜 보면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고, 그때 충분히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하고 자랑했어야 했다. 누가 뭐래도 나 만큼은 나를 치켜세우고 박수를 보내 과테말라 살이에서 움츠러든 내 어깨를 반듯하게 펼쳐줬어야 했는데.... 지금도 그 부분이 후회가 된다. 그러니 아직도 어깨가 이 모양이지.


"그런데 한 가지.... 학교 내부 정책상 Valedictorian을 뽑는 기준은 성적 이외에 이 학교에 3년간 재학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거든. 너는 2년을 있었기 때문에 그 조건이 충족되지 않고, 그래서 사실은 네가 수석이지만, 공식적으로는 Nathan이 Valedictorian이 되고, 네가 Salutatorian이 될 거야."


당시 salutatorian 메달


미국 고등학교는 수석 졸업생을 Valedictorian이라고 부르고, 차석을 Salutatorian이라고 부르며, 수석인 Valedictorian이 졸업식에서 졸업 연설을 하게 된다. 차석은 졸업 연설을 할 수 없다.


"하지만, 선생님들과 회의를 했고, 이번은 특별히 예외적으로 다뤄야 한다고 다들 동의했어. 그러니 너도 졸업 연설을 하게 될 거야. Nathan과 상의해서 각자 주제가 겹치지 않도록 멋진 연설을 준비해주렴."


그렇게 나는 졸업 연설을 하게 되었다.



낭만은 두 번째, 현실이 첫 번째다.


하지만, 수석이니 차석이니 졸업 연설이니 그런 낭만적인 이야기보단 졸업 후 당장 우리 가족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걸 명확히 하는 게 더 시급했다.


나는 미국 대학에 합격을 해 둔 상태였고, 졸업식을 마치고 2-3달 뒤에는 미국으로 가야 했다. 그러려면, 엄마와 남동생이 한국으로 돌아가 아빠와 함께 정상적으로 살 수 있어야 하고, 나는 엄청나게 비싼 미국 대학 등록금이 필요했다.


"엄마, 아빠가 이제 우리 한국에 와도 된데? 이제 자리가 잡혔데? 나 미국 대학은 가도 되는 거야?"


나는 4월 말부터 이 질문으로 엄마를 괴롭혔고, 그때마다 엄마는 객관적인 답이 아닌 본인의 의지를 내뱉었다.


"이제 가야지! 갈 거다. 엄마는 이제 돌아갈 거다. 더 이상 여기에서 이렇게는 못 산다. 힘들어도 한국 가서 힘들 거다. 네 대학도 무조건 보낼 거야. 어떻게든 할 거야!"


무모한 엄마.


무모해서 용감하고, 용감해서 그 시절을 살아낸 사람.

나의 엄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불안했다.


엄마의 말투가 거세지고, 표정이 단호해지는 게 파란불은 아니라는 걸 나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아마도 아빠는 아직도 우리를 책임질 만한 상황이 아닌 것이고, 내 등록금 따위는 더더욱 있을 리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과테말라에 더 남아 있는다고 엄마가 식당 주방 보조 외의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무엇보다 엄마가 무척 외로웠을 것이다.


사람의 계획은 외부 환경에 취약하다. 제 아무리 똑똑한 머리로 빈틈없이 계획을 세워도 수 억만 개의 변수를 모두 예측할 수 없으니 결국 계획이란 소망이나 바람의 동의어 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무너졌던 한국에서 우리가 세운 계획은 단순했다. 과테말라에서 한국 집 보다 나은 집에서 한국에서보다 덜 고생하며 사는 것이었다. 그리 복잡한 계획은 아니지 않은가.


너무 단순해서 문제였을까? 그 계획은 시작과 동시에 민들레 씨처럼 훅- 날아갔고, 우리는 애초에 무엇이 계획이었는지 기억도 못한 채 하루하루를 그냥 버티며 2년을 보냈다. 결과론적으로 우리의 계획은 mission impossible이었고.


외력에 의해 계획은 무너졌지만, 우리에겐 자각조차 못하던 단단한 내력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내력이 더욱 단단해지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흡수해 버리니, 우리의 내면은 조금 여위고 아팠던 것도 부인할 수 없다.


네이버 이미지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에서 구조기술사로 나오는 동훈의 말처럼, 외력보다 내력이 더 세게. 그래서 버틸 수 있었겠지. 엄마도. 나도. 동생도. 그리고 한국에 남은 아빠도.


하지만, 내력이 아무리 세도 버티기 싫을 때가 온다. 버틸 수 있겠지만 버티기 싫은 그 지점을 만나면 내력도 더 이상 소용이 없다. 전원을 내리겠다는데 뭘 어쩌겠는가.


우리는 아빠에게 일방적으로 통보 전화를 하기로 했다.

2000년 5월 20일 한국 도착 예정!!


전화는 항상 띠엔다(과테말라의 작은 구멍가게)에 가서 했다. 집전화도 핸드폰도 공중전화도 없다 보니 우리는 2주에 한 번씩 동네 초입에 있는 띠엔다에 가서 아줌마에게 굽실대며 꽤 사악한 비용을 지불하고 전화를 했다. (당시에는 국제 전화 정말 무지막지 비쌌다. 게다가 남의 전화를 빌려하니 부르는 게 값이었지.... 아줌마 장사꾼 인정!)


대략 이렇게 생김 (출처: 구글 이미지)


"아빠~ 나 수석 졸업이래. 나 졸업식날 학생들 앞에서 졸업 연설도 하게 됐어!"


"우리 딸.... 진짜 대단하다. 축하한다... 그리고 아빠가 많이 미안하다."


아빠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모습이 지구 반 바퀴를 돌아 띠엔다의 낡은 전화기를 타고 희미하게 전해졌다.


"여보, 전화비 많이 나오니까 빨리 말할게. 우리 5월 20일에 한국 도착할 거야. 들어갈 거야. 더 이상 여기에서 나 혼자 애들하고 못 있어. 한국 가고 싶어. 비행기표 살 돈 우리가 모아뒀어."


엄마가 수화기를 낚아채더니 용건만 빠르게 말했다.


"...... 뭐? 몸이 왜?........ 알았어. 자세한 건 한국 가서 얘기해. 우린 일단 들어갈 거야."


엄마가 전화를 끊었다.



그래도 과테말라는 떠난다.


집으로 걸어 올라가는 길에 엄마는 아빠가 지금 좀 아파서 누워있다고 말했다. 심각한 건 아닌데 좀 아프시다고. 아빠도 우리가 너무 보고 싶어서 돌아오면 좋지만, 현실적으로 아빠가 준비가 된 것은 아니니 한국에 가도 상황이 나아지진 않을 거라고 했다. 아빠가 아프니 공항에 우릴 마중 나오지도 못할 것이라고도 했다.


오르막을 오르는데 웃음이 났다. 피식-

내 표정을 볼 수 있었다면 분명 썩소였을 것이다.


2년이 지났는데, 왜 우리는 결국 도돌이 표지? 이럴 거면 우리는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아빠는 왜 지금 아파? 우리가 돌아가는데 마중도 못 나올 정도로.


1999년 세상을 뒤집은 영화 매트릭스가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그래. 이건 분명 괴롭힘 시뮬레이션이다.


남동생은 한국에 간다는 말에 무작정 신이 났고, 동시에 그간 친하게 지내고 스페인어도 친절히 알려 준 과테말라 친구 비르힐리오와 헤어진다는 점에는 안타까워도 했다. 언젠가 한국에 그 아이를 초대하겠다는 전혀 현실감 없는 말도 했다.


엄마는 내가 가진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얼굴이었고.


나는.


나는.... 썩소를 지으며 웃었지만. 그것은 상황에 대한 경멸이었을뿐. 한국에 돌아가는 것은.... 좋았다. 매우 좋았다.


투 잡을 뛰고, 신문지 위의 이불에서 자는 한이 있더라도 그냥 한국에서 하면 더 괜찮을 것 같아서. 거긴 한국이니까. 친구들을 볼 수 있고, 치킨 버스를 타지 않고, 타코 대신 떡볶이를 먹고, 아스팔트 길을 당당히 걷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될 테니까.

.

.

.


집에 돌아와서 엄마는 잠자리 이불을 들췄다.


비밀인데, 그곳이 우리의 은행이었다.



엄마와 내가 식당 주방에서, 한인 집에서, 교회에서 받은 현금 조각들은 그렇게 우리의 잠자리 밑에 보관되었고, 신문지와 함께 보온재 노릇도 했다.


지푸라기 같은 돈.

어쩌면 진짜 지푸라기일지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우리 셋은 매일 돈을 깔고 잤다. 얼마가 있는지 뻔히 알면서도 성스런 의식처럼 매일 또 돈을 세어 확인했다.


"우리 셋 비행기표 사고, 지인들 드릴 과테말라 기념품 사고, 한국 가서 한 달 이상은 식비랑 교통비 하겠다. 그렇지?"


"... 많이 모았네."


엄마는 응원이 필요했을 텐데... 찰나 같은 희망이더라도 그게 필요했는데... 한국 나이로 성인이 된 딸년은 고작 그렇게 밖에 반응하지 못했다. 그 딸년은 또 속으로 '이런 상황인데 미국 대학은 어떻게 가. 거지 같아.'라는 생각도 했다.


우리는 또 그렇게 지푸라기를 품고 잠들었다.


과테말라를 떠날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내력의 전원을 끄고 버티기를 멈추려 했지만, 그것은 답이 아니었다. 버티기는 외력을 잠시 막아주지만, 궁극적으로 나를 지치게 한다.


어차피 싸움이 계속될 것이라면. 그것이 항상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이라면. 단지 버티는 것을 넘어서는 압도적인 파괴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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