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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망별 Jun 10. 2021

끝은 끝이다(2)_굿바이, 과테말라


사람들은 말한다.
졸업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하지만 나는 끝이길 바랬다.



엄마의 파란 한복과 태극기


“졸업생들이 입장합니다.”


사회자 선생님이 입장을 선언했고, 졸업가운을 입고 졸업모자를 쓴 우리들은 한명씩 차례로 전교생과 내빈들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우리는 깃발을 든 하급생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입장했는데, 첫 학생이 교회 상징 깃발을 들고, 다음 학생이 미국 국기를 들고, 다음 학생은 과테말라 국기를 들고 있었다. 그것이 과테말라에 있는 미국 기독교 학교를 나타내는 그 학교의 전통이었다.


하지만, 그 해 졸업식에는 하나가 더 추가됐다.


태극기


따뜻함과 뜨거움 중간 즈음의 과테말라 햇살 속으로 태극기가 내 앞을 에스코트하며 들어갔다.


입장 후 세워진 태극기


엄마는 아직도 그 장면이 가장 뭉클했다고 한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꽤 뭉클할 만한 일이었다고 동의하지만, 당시에는 '뭉클'보다는 '시큰'했다. 그들만의 리그 속에 불쑥 뛰어 들어온 이방인. 애써 어울리고, 애써 노력하여, 그 리그 속에서 정체성의 깃발을 흔들 수 있었던 그 순간은. 마음이 뭉클했다기 보단, 콧등이 시큰했다는 것이 더 솔직하다.


입장이 끝난 후, 차례에 따라 졸업장을 수여받고, 순서에 따라 나의 졸업 연설도 이어졌다.



무슨 내용으로 이야기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선명한 것은...


수많은 미국인 부모들 사이에서 검은 머리에 파란 한복을 곱게 입고, 세상 가장 기쁘고, 힘들고, 행복하고, 지치고, 그럼에도 끝내는 자랑스러운 듯 웃었던 엄마의 얼굴.


수많은 표정이 하나가 되고,

하나의 표정에 수많은 것이 담긴 그 얼굴.


그것만이 남아 있다.




안티구아의 작은 야외 뜰에서 열렸던 졸업식이 끝났다.


전교생이 모두 참석하니 나의 사촌 동생들인 리사와 제인도 있었다. 과테말라에 도착해서 고작 일주일 함께 산 나의 사촌 동생들. 그 후에 학교에서도 띠깔에서도 함께 어울린 적 없던 나의 사촌 동생들. 피를 나눈 가족이지만, 학교의 어떤 친구들보다 멀고, 교회 사람들보다 어색했던 나의 사촌 동생들. 그렇다고 일부러 피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초기에 어른들이 세팅한 무대가 우리들을 이리 어색하게 만들었을 뿐.


우리는 사진을 찍었다.

내키지 않았지만. 어색하지만. 그래도 웃으며.


"근데... 언니 졸업하는데... 이모는 안 왔어?"


내가 리사에게 물었다.


"No.... she couldn't make it. She is super busy today..."


리사는 난감해하며 변명했다. 난감해하는 그 표정과 말투가 왠지 위안이 됐다.


사실 이모가 올 거라고, 아니, 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미지의 땅에 우리를 발 딛게 도운(?) 사람이니, 이 땅을 뒤로하고 떠나려는 우리의 마지막 기념식에 와야 한다고. 이유는 모르지만 그냥 그게 자연스러운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 뒤에서 한국말이 들렸다.


"졸업 축하해요~ 우리가 좀 늦었구나."


그간 우리를 아껴주시던 한인 아줌마 한 분이 어린 딸 둘을 양쪽에 달고, 그 자녀들의 손에 작은 꽃다발을 들려서는 환하게 웃으며 다가오셨다.


"이런, 졸업 연설을 놓쳤네. 우리 애들이랑 같이 오느라 좀 늦었어. 미안해요. 여기 꽃 받아요. 다시 한번 축하하고, 정말 대견해요."


"안티구아까지 어떻게 오실 생각을.... 정말 감사합니다. 와주시고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족 대신 그 가족과 함께 졸업 사진도 찍고, 점심도 먹으며 졸업식을 마무리했다.



밤에서 밤으로, 그리고 낮으로


나의 고등학교 졸업식은 단순히 졸업식의 의미를 뛰어넘어, 그것은 우리 가족의 일대기에 그리고 내 삶에 매우 크고 중요한 마침표였다. 그 해는 2000년이었고, 나는 갓 스무 살이 되었고, 20년 같은 2년짜리 과테말라 살이의 마지막 날이었다.  


서울에서 우릴 책임졌어야 할 아빠와

과테말라에서 우릴 책임졌어야 할 이모

그 둘 없이

우리는 과테말라 옥탑방 살이를 마쳤다.


10대의 2년은 지금 같은 중년의 2년과는 그 길이감이나 질량감이 완전히 다르다. 그러니 졸업식이 끝나고 한국으로 갈 비행기에 오를 즈음의 나는, 20년 정도 미리 늙어버린 기분이었다.


아, 정정한다.

'... 한 기분'이 아니다.


생각이, 마음이,

실제 매우 중후하게 그리고 고집스럽게 늙어버렸다.


(올드하고 고리타분한 감성의 관점이지만 양해해 달라. 이 이야기는 시작부터 그러했으니. 이제 와서 뭐라 하면 반칙!)


늙은 스무 살. 그건 대단히 언짢은 일이다.


모든 일에 비위가 쉽게 꼬이고, 아집이 커진다. 그나마 다행인 건, 외력을 이길 내적 파괴력도 그와 함께 커지는 탓에, 그 내공으로 20대를 살아 낼 수 있었던 것이니 조금은 감사(?) 비스무리한 것도 하겠다.

.

.

.


졸업식 이틀 뒤,


우리는 아빠에게 통보한 대로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과테말라 공항으로 향했고. 졸업식에는 보이지 않았던 이모가 공항에는 데려다줬으며. 공항으로 가는 그 차 안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공항에 내리자,


"언니야, 결국 이렇게 됐네... 뭐 나도 상황이 그러니 언니 니가 이해해라. 조심히 가고. 형부한테 안부 전해주고."


이것은 사과인가, 변명인가. 혹은 아무 말인가. 


영화 '극한직업'


무미건조한 음색. 침착함을 가장한 불안한 눈빛. 미안함도 묻어나지만 그러기엔 너무 싸늘한. 그 작별 인사는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아니다! 우리 때문에 니가 신경 쓰여서 힘들었지...    챙기고, 이서방 하고도   지내봐라. 우린 이제 한국 가면  괜찮다. 걱정 말고."


짜증 날 정도로 감정적이고 애틋한 엄마의 대답.

너무 외사랑이다. 반칙이지 이런 건.


엄마가 이럴 때마다 나는 속이 뒤집혔다. 대체 누구를 위로하고 누구 편을 드는 건지. 옆에서 상처 받는 내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것인가, 아님 딸의 아량을 과대평가하는 것인가.


나는 엄마를 잡아끌듯이 이끌고 출국장으로 들어갔다.


"아빠는 정말 공항에 못 나와?"


"응."


엄마의 대답을 믿었고.



"나 미국 대학 보내 줄 수 있는 거 맞아?"


"응."


이번엔 믿지 못했다.

.

.

.


비행기에 올랐다. 밖이 깜깜했다. 올 때도 밤이었고, 갈 때도 밤이다. 과테말라의 밤하늘을 뚫고 한국의 낮으로 날아가고 싶었다.


한국은 정말 낮일까?

빛날까?


그런 눈부신 상상을 하며

나는 과테말라를 떠났다.


출처: 구글 이미지



안녕-


아프리카에 있는 줄만 알았던 미지의 세계야,


20년 같던 2년간 너는 내게 충분히 했다.


오프라 윈프리 아줌마가 그러더라,


I trust that everything happens for a reason,
even when we’re not wise enough to see it.



그래. 그럴지도 몰라. 그랬을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자.


부디.



Good-B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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