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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MON FAVORI 2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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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rnweh Sep 24. 2021

몽파보리 제4장

MON FAVORI 4. 소소한 이야기로부터

 <몽파보리> 프롤로그 먼저 읽기

https://brunch.co.kr/@ksh4545/73









    취향에 관해 확고한 덕에 주위에서 자기 취향을 들이밀 때 동조한 적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 행동 자체를 썩 좋게 보지도 않았고. 특히 나이나 계급 따위가 인간관계에 수직적으로 작용하여 아래쪽에 놓인 사람이 ‘싫어도 해야만’ 하게끔 만드는 상황은 늘 스트레스를 동반했다. 차라리 업무라거나 사회적, 도의적 책임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라면 불만 없이 받아들였겠지만, 사적 영역인 취미 생활까지 침범하는 강요는 썩 유쾌하지 않았다. 


    내가 싫어하는 일은 남한테도 하지 말자는 주의인지라 내 취향에 선뜻 호감을 표하지 않는 주변 사람에게 굳이 내 취향을 강요한 적은 없었다.


    ...고 믿고 있었다. 스물대여섯 살쯤이었나, 내가 좋아하는 걸 지인들도 좋아하도록 세뇌하려 했다는 걸 깨달은 사건이 있었다. 스물한 살, 파리로의 첫 해외여행 후 내 최애 여가 생활은 여행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대체적으로 여행에 대한 애정을 여실히 보여주는 수치가 연일 갱신되던 때였다. 몇 프로 이상의 대학생이 버킷리스트로 배낭여행을 꼽는다, 국제 여객 수요가 올해 큰 폭으로 상승했다, 상반기 출국자 수가 역대 최대다, 등등. 앞서 말한 수치를 들먹이지 않아도 따끈따끈한 여행 후기를 설파하는 친구들이 주변에 널리고 널렸던 때였다. 그러니 나라고 ‘여행이 이렇게나 좋단다, 얘들아’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떵떵거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여행 썰을 풀던 순간을 떠올려 보면 대부분의 친구는 귀를 쫑긋하고 집중해서 들었다. 일단 여행은 의무적인 행위가 아니라서(여행업 종사자가 아닌 이상) 싫어도 꾹 참고 거쳐야 했던 지난한 대학 입시의 여정을 막 통과한 대학생을 솔깃하게 만드는 콘텐츠였다. 주위의 반응이 그러니 당연히 다들 여행을 좋아한다고 멋대로 믿어버렸다.


    방학이 되면 늘 어딘가로 떠날 궁리를 했고 친구의 궁리와 합치가 될 때면 함께 떠났다. 네 명의 대학 동기와 영하 20도의 러시아를 다녀온 후, (당시 기온은 영하 20도였지만) 따끈따끈한 여행 이야기 한 보따리 들고 다른 동기를 만났다. 신나게 여행 후기를 들려준 후 다음엔 같이 가자고 말했는데,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근데 난 여행 좋은지 모르겠던데. 막 어디로 나다니는 거 별로 안 좋아해.

 

    대답을 듣자마자 ‘여행을 안 좋아할 수 있다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직전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어 댄 여행 이야기를 억지로 듣고 있었을 거란 생각에 주변 공기마저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친구와 헤어지고 탄 지하철 창문에 비친 멍한 얼굴이 묘하게 낯이 익었다. 주변 사람들이 남의 취향과 관심에 철벽을 쌓던 내게 보이던 얼굴과 닮은 낯이었다. 맨유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다른 팀인줄로만 알았던 날 보던 축구 애호가 친구, 몇 억짜리 외제 스포츠카를 본 흥분을 함께해주지 않던, 그게 외제 차인지 녹차인지 홍차인지 관심조차 없던 날 째려보던 자동차 애호가 친구, 등산 가서 콧바람 쐬자는 제안에 돌아온 거라곤 산은 보라고 있는 거라는 콧방귀여서 머쓱해하던 등산 애호가 친구의 얼굴이 딱 지하철 창문에 비친 그 얼굴이었다. 여행엔 관심 없다는 친구를 허망하게 바라보던 내 낯이 그들의 낯과 겹쳐졌다. 선뜻 해준 제안이 강요처럼 들릴 때면 자기 관심사를 왜 남에게 고집스럽게 주입하려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기도 했다. 근데 그런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하고 있었다니...




    도쿄 올림픽이 한창이던 때 잊고 있던 예전 그 충격이 떠올랐다. 카페 옆자리에서 두 여고생이 수다를 떨고 있었다. 하루 전, 김연경을 주축으로 한 여자배구가 4강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해 대한민국이 여자배구로 떠들썩하던 때였다. 한 친구가 배구를 봤냐고 물어보며 식빵 언니 너무 멋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맞은편에 앉은 친구는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김연경이 누군데?


    나도 모르게 ‘김연경을 모른다고?’ 생각했다가 퍼뜩 생각을 고쳐먹었다. 아는 축구 선수라곤 여전히 2002년 월드컵 선수들밖에 없는* 내가 김연경을 모르는 소녀를 흉볼 순 없지 않은가. 스포츠에 아무 관심이 없는 그 아이에게 속으로라도 모두가 다 아는 인물이니까 너도 관심을 가지라고 강요하고 싶진 않았다.

   

    여행 작가 아카데미에서 들었던 주옥같은 말, ‘사람들은 남의 여행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여행 콘텐츠로 사람들을 유입시키는 게 힘들다는 취지의 말이었지만 내게 끌리는 여행이 남에겐 그러지 않을 수 있음을 상기시키는 말이기도 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지금 이 글을 펼친 여러분은 여행에 아예 관심이 없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앞선 경험 덕에 이젠 거창한 이야기로 남의 여행 취향까지 압도하고 싶진 않다. 내게 ‘몽파보리’한 여행은 나만의 ‘몽파보리’한 여행으로 남아도 괜찮다. 거창한 포장을 걷어 버리고, 이 장에선 골목길을 걷다가 마주친 소소한 풍경 한 자락을 글로 남길까 한다. 골목을, 그 속의 풍경을 우연히 마주했듯, 우연히 읽은 여행에세이 한 페이지가 소소한 울림으로 남길 바라면서.



MON FAVORI


*덧: 2022년 우리나라의 월드컵 16강 진출 덕분에 지금은 아는 축구 선수가 조금 업데이트 되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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