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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MON FAVORI 2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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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rnweh Jan 31. 2021

걷다가 마주친, 파리

프랑스 네 도시 이야기, 몽파보리(4-2)

   






    서쪽에서 남쪽을 거쳐 동쪽으로 프랑스를 한 바퀴 빙 도는 한 달여의 여행을 마치고 파리로 돌아왔다. 비자 만료 3일 전이었다. 굳이 파리를 다시 오지 않아도 됐지만 정든 파리를 못 본 척하고 떠날 순 없었다. 내가 살던 집에는 아직 다음 세입자가 들어오지 않았다. 집주인을 잘 구슬려 삼일 정도 쓱 눌러앉아도 됐겠지만 나와 상극인 룸메이트가 여전히 거기 사는 게 걸림돌이었다. 나와 그가 그때 다시 만났다면 드라마 ‘펜트하우스’의 이야기가 그대로 ‘파리하우스’로 재현됐을지도... 프랑스 체류의 결말을 막장으로 만들고 싶지 않아 이 계획은 일찌감치 포기했다.


    그럼 자기 집으로 오라던 친구는 내가 남프랑스 무릉도원의 풍광에 빠져있을 때 계단에서 정신이 빠져 크게 넘어지는 바람에 무릎과 도가니가 아작났단다. 병원에 입원했으니 친구 집 찬스도 사라졌다. 급하게 숙소를 알아봤다. 예산에 맞는 숙소는 가이드북에서 입을 모아 위험지역이라 말하는 북역 근처뿐. 마지막이니만큼 플렉스 하자는 심정으로 좋은 호텔을 검색해 봤는데, 얼씨구, 2박 요금이 내가 내던 한 달 월세랑 맞먹는다. 하필 성수기일 건 뭐람. 북역 근처에 안 가본 것도 아니고, 거기서 안 좋은 일을 겪은 적도 없으니 남들이 붙인 별칭 따위는 무시하고 예약 버튼을 눌렀다. 좀 찝찝하긴 했지만. 


    호텔로 오는 길에 스친 골목길의 이름이 왠지 낯설지 않았다. 지도를 켜 주변을 살폈다. 호텔을 기준으로 왼쪽으로 몇 번 지도를 움직이니 내가 다니던 수영장이 보였다. 수영장 앞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대각선을 그리며 길게 뻗은 골목의 이름은 확실히 낯이 익었다. 포부르 푸와소니에(Faubourg Poissonière) 거리. 찝찝함을 무릅쓰고 예약한 호텔이 있는 동네가 살던 동네와 그리 멀지 않았다니. 연어의 회귀 본능이 내게도 있는 걸까. 파리가 워낙 작은 도시라 이 동네가 저 동네고 저 동네가 이 동네가 되긴 하지만 1년간 들락날락거리던 골목이 주변에 있음을 알고 나니 지금 이렇게 침대에 드러누워 모바일 지도를 뒤적일 게 아니라 몸소 그 골목을 살포시 즈려 밟아야겠다는 흥분이 일었다.

  

    포부르 푸와소니에 골목을 쭉 따라 걷다 큰 대로에서 길을 건너 경사가 얕은 오르막과 내리막을 한 번씩 거치면 어떻게 표현해야 내 최애 골목인 이 골목을 잘 묘사했다고 소문날지 궁리할 정도로 애정하는 몽토게이(Montorgueil) 거리가 나온다. 걷자. 평소 집에서 몽토게이 거리까지 갈 때보다 두 배나 더 걸어야 하지만, 숙소 근처는 위험지역이라며 겁주지만, 고될 것도 무서울 것도 이제 파리가 마지막이라는 아쉬움에 비하자면 별거 아니니 걷기로 했다. 아쉬움이 새어 나오지 않게 감정을 꾹꾹 누르며 걷고 있자니 한 달 전만 해도 익숙하다 못해 신물이 나서 눈에 들어오지도 않던 파리 골목의 모습이 색다르게 보인다. 파리를 두고 낭만을 운운하는 건 클리셰라지만 낭만이 흘러넘친다고 하고 싶어졌다. 클리셰면 어쩌랴, 마지막인데. 아직 몽토게이 거리까진 한참 남았는데 벌써 단골집에서 먹던 펜네 아마트리치아나의 알싸한 마늘향이 코끝에, 단골 잼 가게에서 자주 사 먹던 망고 잼의 달달한 맛이 혀끝에 맴돈다. 몽토게이 거리로 향하는 걸음은 자꾸만 빨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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