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PRAHA
프-(라)-하!
한 시간여의 긴 인내 후에 터져 나온 감탄사. 블타바(Vltava)강 건너편 유연한 능선 위에 정갈하게 놓인 프라하성의 매혹적인 자태에 홀려 아름다운 이 도시의 이름 ‘프라하’를 목놓아 외쳤다고 우겨본다. 도시를 향한 동경을 담은 외침이었다면 가운데 ‘라’ 자까지 정확히 발음했을 터. 그러지 못한 건 고유’명사’를 조음한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참았던 숨을 터뜨리는 ‘감탄사’였기 때문이다. 애꿎게 프라하 풍경을 운운한 건 감탄을 내뱉은 장소가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화장실이란 걸 숨기기 위함이다.
프-(라)-하!
두 시간 후. 전과 똑같은 감탄사지만 바라보는 풍경이 정반대다. 강변에서 바라보던 프라하성에 올랐다. 성을 둘러본 후 근처 벤치에서 시내의 해질녘 풍경을 감상하다 느닷없이 찾아온 신호에 부랴부랴 성에서 내려왔다. 가장 가까운 화장실을 ‘뚫어’ 준 친구(그녀는 현지인이다) 덕에 고통스러운 인내의 시간을 끝내고 방뇨의 쾌감을 만끽했다.
도시 여행 이야기에 방뇨라는, 듣기 썩 좋지 않은 단어를 쓰는 게 민망하지만 도시 여행이기에 나올 수 있는 해프닝임은 분명하다. 자연 속에서라면 이목을 피할 수 있는 지형지물을 활용해 인고의 시간 없이 수분을 마음껏 자연으로 흘려보냈을지도 모르니까. 모 화장품 회사의 광고처럼 ‘참지 마세요, 자연에 양보하세요’라면서 말이다. 자연이 아닌 도시에서 이처럼 거리낌 없이 볼일을 보면 손가락질을 받는다. 문명화된 도시 체계에는 볼썽사나운 이목을 집중시키지 않고 볼일을 보는 화장실이란 공간이 버젓이 존재한다. 아랑곳 않고 노상 방뇨 따위를 하는 자도 있지만, 그러고 싶진 않았다. 심지어 자국도 아닌 타국에서는. (우리나라에선 노상 방뇨를 하고 다닌다는 뜻은 아니니 오해 마시길)
프라하가 산이 아니고 도시여서 다행인 건 차오른 볼일을 해결할 화장실이 가까이에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불행은 늘 다행의 꽁무니를 쫓는다. 이곳의 화장실은 우리나라보다 콧대가 높은지 공공 화장실은 보이지 않았고, 그나마 있어도 유료로 운영됐다. 식당이나 상점에 (쳐)들어가 화장실을 사용하기도 여행자인 나에겐 쉽지 않았다. 꽁무니 언저리까지 바짝 쫓아온 불행은 구세주가 되어 준 현지 친구가 쫓아냈다. 두 번의 감탄사를 한 번은 카페에서, 한 번은 식당에서 뱉어낼 수 있었다. 그녀의 협상 수완으로 아무것도 주문하지 않고 말이다. 화장실을 찾았다는 말 대신 ‘뚫어 준’ 거라고 이유도 없이 쓴 건 아니다.
왜 하필 프라하 시내를 산책하던 날, 화장실을 찾아 헤매야 했을까. 글을 읽는 누군가가 내 괄약근의 완력을 비웃을 수 있으니 부랴부랴 사건의 연유를 밝힌다. 이날, 프라하 일대에서 무려 두 개의 축제가 열렸다. ‘맥주’ 축제와 ‘커피’ 축제. 두 축제의 이름을 밝힌 것만으로 어느 정도 내 방광 기능의 온전함이 증명되는 듯하다.
바츨라프 광장(Václavské náměstí) 근처, 내부에 널찍한 홀이 있는 건물 일대에서 커피 축제가 열렸다. 친구와 함께 오후 느지막이 현장을 찾았다. 절정에 다다른 축제의 열기에 들뜬 참가자들이 부스 앞을 지나는 우리를 방금 추출한 에스프레소 향으로 유혹했다. 일일이 세진 않았지만 여섯 잔은 족히 마셨던 것 같다. 생각지도 못하게 잔뜩 들이부은 커피 때문에 쓰린 속을 달래려 식사를 한 후, 입가심하러 맥주 축제가 한창인 블타바강 변으로 갔다. 입장료를 냈더니 우리나라 500cc 잔보다 조금 큰, 양조장에서 쓰이는 오크통처럼 양 옆구리가 볼록한 유리잔을 건네주었다. 그 컵을 들고 아무 부스에나 들르면 맥주를 한가득 담아준다. 모두가 취해 불나방이 된 양 블타바강에 몸을 던지는 건 아닌지 걱정했는데, 세계 맥주 소비 1위가 체코라는 사실에 ‘알쓰’인 내 앞가림이나 잘하자고 다짐하며 맥주를 홀짝거렸다. 평소에 주종불문 한 잔이 치사량이지만, 프라하의 낭만에, 축제의 열기에 흥이 올라 두 잔이나 마셨다. 그것도 꽉꽉 채운 두 잔을.
치사량의 두 배에 달하는 양을 마셨음에도 멀쩡했다. 여행이란 감흥에 이미 취해 있어 취한 줄 몰랐던 건가. 강 건너에서 바라보던 프라하성에 가고 싶다는 말에 친구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성으로 앞장섰다. 그때였다. 배뇨 신호가 온 건. 이미 축제장 입구까지 걸어왔는데, 간이 화장실은 정반대에 있단다. 아직은 참을 만해서 그냥 가기로 했다. 참을 수 있다고 착각한 걸 보니 취하긴 취했구나. 화장실을 찾아 프라하를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가 될 불운이 성큼 다가온 지도 모르고 성으로 넘어가려고 지나던 카를교를 구경하느라 시간을 너무 많이 보냈다. 그 사이 방광 수위 위로 소변이 넘쳤고 카를교를 넘어서자마자 친구에게 화장실을 찾아내라고 독촉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카페로 갔다. 친구가 염치 불고하고 화장실만 써도 되냐 물었고 천사님, 아니 사장님은 흔쾌히 그러라 했다. 친구는 상황을 꽤 길게 설명했는데, 커피(에스프레소) 한 잔 시켜봐야 천원 돈이니 시켜 놓고 화장실 갈 법도 한데, 하필 축제에서 커피를 많이 마신 탓에 커피를 또 마실 수 없으니 염치 불고하고 화장실만 써도 되냐는 식의 얘기를 했으리라. 글의 맨 처음 등장한 감탄사 “프-(라)-하!”는 그렇게 이름도 기억 안 나는 한 카페의 좁은 화장실에서 울려 퍼졌다.
“맥주가 이뇨를 일으키는 기전은 많은 양의 수분과 알코올로 인해 항이뇨호르몬이 억제돼 생긴다. 그래서 마신 맥주의 양보다 추가로 30~40% 정도의 체내 수분이 소변으로 빠져나간다” – 2018/01/10 헬스조선 기사
“커피, 녹차, 홍차는 이뇨작용을 일으키는 대표적인 음료다. 카페인 성분이 커피 섭취량의 약 2.5~3배가 되는 수분을 배출시킨다. 때문에 화장실을 자주 들락날락하게 되고(중략)” – 2021/01/24 매경헬스 기사
커피나 맥주가 이뇨를 부추긴다는 건 익히 알았으나 섭취량보다 많은 수분을 배출시킨다는 점은 간과하고 있었다. 애초에 마셨던 커피와 맥주의 양만 어림잡아 계산해도 화장실 한 번 간 거로는 배출 예정인 수분을 감당키 어려웠다. 신나서 프라하성을 누비고 다니면서도 또다시 소변이 차오르는 걸 모르다가 화장실에 다녀온 지 두 시간이 지났을 무렵, 극에 달한 배뇨 욕구를 느꼈다. 직전에 지나온 ‘황금소로’*가 알고 보니 ‘황금소변로’라서 배뇨를 부추긴 건 아닌가 하는 말도 안 되는 상상까지 했다. 해질녘 프라하의 풍경을 즐길 새도 없이 대충 사진으로만 몇 장 담아 놓고 시내로 내려와 제일 먼저 눈에 띈 식당에 들어갔다. 이번에도 친구는 협상에 성공했고 난 “프-(라)-하!”, 참았던 숨과 수분을 내보낼 수 있었다. 지하에 있던 화장실로 내려가는 게 왜 이리 멀게 느껴지던지. 조금의 숨이라도 새어나가면 다른 무언가도 새어 나올 것 같아 발사 준비가 완벽히 될 때까지 숨까지 참았다. 여행하며 급한 볼일을 해결한 경우가 아예 없진 않은데도 참아내는 과정부터 뿜어내는(?) 과정까지의 일분일초가 이다지도 생생하게 기억되는 여행은 프라하가 유일했다. (그만큼 급했다는 소리)
낭만을 곱씹어도 모자랄 프라하에서 낭만이라곤 코딱지만큼도 없는 이야기를 읽게 된 여러분께 쓸쓸한 양해의 말씀을, 염치없는 부탁을 아무렇지 않게 들어 준 친구 G양에게 뒤늦게나마 소소한 감사를 드린다.
* 16세기 금 세공자를 비롯한 수공업자가 모여 살던 좁은 골목이라 '황금소로'라고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