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먼저 기차역으로 간 이유

일본어 指定席 n. 지정석

by Fernweh

말을 모으는 여행기, 말.모.여. 27)


일본어 指定席[시테-세키] n. 지정석


'석'(席)자가 세키로 읽히는 바람에

호감이 좀 떨어지는 말이지만,

시테-세키는 기차 여행의 맛을 더 해줬으니

발음 그대로 부르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 일본어 외래어표기법상 장음을 따로 표기하지 않지만 제목에서만 생생한 발음을 살리기 위해 넣었습니다.


내 규슈여행의 7할은 기차여행이다. 처음 JR 북규슈 패스로 여행을 다녀온 후, 규슈 기차여행에 매료되었다. 정시성을 중시하는 문화 덕에 지연도 거의 없고, 소도시를 잇는 노선이 많아 뚜벅이에게 제격인 여행. 특히 JR 규슈 패스는 거의 모든 열차에 제한 없이 탈 수 있어 교통비가 비싼 일본에서는 '가성비 끝판왕'이었다. 다만 한 가지 제약 조건은 바로 이 녀석, 지정석(指定席,していせき)이었다.


DSC_0136.jpg


완행, 통근 열차 등이 아닌, 여행자가 주로 이용하는 기차는 패스 소지자도 지정석을 탑승 전에 예약해야 한다. JR 예매 사이트에서 패스 번호를 인증하고 예약하는 게 아니다. 일본 기차역 매표소(미도리노 마도구치, みどりの窓口)에서 직접 해야 한다. 창구에서 패스를 개시하며 지정석을 '찜'하는 시스템. 인기 있는 관광열차의 좌석 선점을 위한 꼼수도 있다고는 했다. 한 좌석을 정가로 끊어둔 후 패스 개시 때 지정석을 예약하고, 미리 예매한 표는 취소하는 식. 수수료를 내고 좌석을 확보하는 전략이다. 그 정도로 열차 ‘덕후’도 아니고 패스 없이 그 열차만 타려는 사람에게 피해를 주니 시도하진 않았다. 지정석 예매를 위해 모바일로 실시간 좌석 조회를 하다 보면 매진이었던 열차 좌석이 하나 둘 생겼다가 없어지기도 했는데, 다는 아니어도 저런 꼼수를 부린 사람- 분명 있을 법하다.


DSC_0154.jpg


북규슈 패스 여행 두 차례, 남규슈 패스 여행 한차례. 매번 일본 기차 여행의 시작은 지정석 예매였다. 본격적인 관광 전 가장 먼저 들른 곳은 기차역. 한국에서 패스를 사는 게 저렴한데, 실물 패스가 아닌 바우처를 주므로 이 때도 실물 패스 교환을 위해서 기차역은 꼭 가야 했다. 패스 교환 시 원하는 지정석의 구간, 날짜, 시간을 적어 같이 내도록 되어 있다. 그 때마다 뜬금없이 지명을 한자로 적어보려는 욕심이 생겼다. 여행 때 몇 마디 뱉어볼 요량으로 일본어를 공부한 내게 한자는 그저 권장사항이었다. 하면 좋지만 안 해도 그만인. 그러니 구간 칸에 적을 후쿠오카→오이타를 히라가나(ふくおか→おおいた) 대신 한자 '福岡→大分'로 적고 싶어진 건 여행이었으니 가능한 일이 아닐까.

DSC_0182.jpg 남규슈 패스 여행의 시작, 지정석 예약. 예매한 표들과 관광열차 팜플랫 사진.


두 번째 기차 여행을 준비하며 규슈 지명을 한자로 끄적여 보았다. 필사적으로 외운 건 아니니 끄적거린 걸로.




하카타, 博多 (후쿠오카는 ‘후쿠오카역’이 아닌 ‘하카타역’이므로)

구마모토, 熊本.

나가사키, 長崎.

오이타, 大分.

가고시마, 鹿児島.

미야자키, 宮崎.

기타큐슈, 北九州.

사가, 佐賀.


* 규슈(九州)의 ‘9개의 주’는 고대 일본의 행정구역에서 유래했다. 현재는 여덟 개의 현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 이름과 같은 기차역만 간 건 아니니 유후인(由布院), 이부스키(指宿) 같은 지명은 덤으로 깔짝거렸다. 오이타, 기타큐슈 정도는 한자로 적어 냈다. 그래봐야 큰 대(大) + 나눌 분(分) / 북녘 북(北) + 규슈(九州)이니. 생전 처음 보는 한자로 된 가고시마(鹿児島) 등은 익숙지 않아 결국 히라가나 ‘かごしま’로 회귀했지만.


3.gif 기억을 되살려 다시 써보는 한자 지명(클릭시 끝까지 재생)



패스와 지정석 패스를 가득 담아 창구를 빠져나왔다. 한국에서 여행 준비를 할 땐 3박 4일이면 3박 4일 전체 일정에 대한 설렘만 느꼈다. 지정석 표를 받아든 순간 설렘은 좀 더 구체적으로 실현된다. 1일 차, 2일 차, 3일 차에 떠날 기차 여행에 대한 설렘이 지정석 표 한 장 한 장 아래로 스며드는 것이다. 여행의 설렘을 배가했으니 시간과 체력을 소모해가며 지정석 예매로 여행을 시작한 보람이 있다. 본격적인 일정이 시작되면 설렘은 쾌감으로 이어진다. 표에 적힌 날짜와 시간에 맞게 기차에 몸을 싣고 검표원에게 확인받으며 퀘스트를 하나씩 깨나가는 듯한 묘한 쾌감을 맛본다.


여행의 시작에선 설렘을 부풀리고, 여행 중에는 깨알 같은 재미를 선사하는 지정석은 기특한 친구다. 지정석을 일본어로 읽으면 ‘시테세키’라 어감은 좀 그럴지 몰라도. 새끼(세키)가 아닌 친구처럼 애틋하다 보니 여행이 끝난 후에도 버리지 못하고 기념품처럼 간직하고 있는가 보다.


DSC_0196.jpg
DSC_0351.jpg
첫 번째 기차 여행의 도시/ 모지코 - 유후인
DSC_0295.jpg
DSC_0552.jpg
두 번째 기차 여행의 도시/ 니지노마쓰바라 - 히타
DSC_0421.jpg
DSC_0627.jpg
DSC_0655.jpg
남규슈 패스로 탄 관광열차/ 타바테바코 - 하야토노카제 - 우미사치야마사치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