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우리 아들이 또 보냈네

또 하나의 가족

by 딜리버 리

택배족은 차량 통행이 안 되는 비좁은 비탈길에 있는 배송지를 싫어한다. 배송앱에 안뜨길 바라지만 뜬 주소지는 어쩔 수 없이 가야 한다. 제발 무거운 짐이 아니길 바라지만 머피의 법칙은 나를 피해가지 않는다. 꼭 일어난다. 비탈길을 오를수록 24개 들이 두유 3박스는 점점 무게감을 더하고 막상 주소지에 왔는데, 해당 주소지 팻말이 안보인다.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주변을 헤매다 결국 못찾고, 전화를 걸지만 안 받는다.(간혹 주문자가 받는데, 거기 맞는데요 반복할 뿐 여기 지리를 모르긴 마찬가지)


OOO님~ OOO님~ 큰소리로 몇 번 부르다 보면 골목 어디선가 여(기)요 라는 소리가 들린다. 찾아가면 거동이 불편한 할매(간혹 할배)가 빼꼼 문 열고 내다본다. 거친 숨을 내쉬며 햐아~ 한 번에 다 먹지도 못하는데, 뭘 이리 많이 시킵니까?라는 말이 끝나기 전에 "아이고~ 우리 아들이 또 보냈네" "우리 아들이 서울서 회사 다니는데, 자꾸 보내네" 큰소리로 자랑한다. 옆집 할매 들으라는 듯.


그의 아들이 일 년에 이 골목을 찾는 횟수보다 택배기사가 한 달간 오르내린 횟수가 많을 것이다.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낫다는 말처럼 택배기사를 더 자주 보는 현실이고, 택배기사의 노동이 없으면 불편한 세상을 살고 있다. 하지만 1년에 한두 번 찾는 자식(가족)이 해준 주문은 자랑하면서 자식이 택배기사가 되는 건 부끄러워한다. 자기의 삶을 유지시키는(혹은 가족의 사랑을 전달하는) 건 부끄러운 직업인 택배기사의 노동임에도.


가족은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는 건 가족(이기)주의를 강화하기 위한 레토릭 아닐까? 내 선택으로 만들어진 관계가 아니라 태어나니 무작정 맺어진 일방적 관계인 가족에 왜 이렇게 집착할까?


비슷한 경우로 어떤 사람을 좋게 평할 때 ‘가정적’이라 한다. 가끔(매일 아니어도) 밥하고, 설거지하고, 청소 같은 집안일을 하는, 가족을 자신의 중심에 두는, 괜찮은 남자를 말할 때 쓴다. 가정적인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는 여전히 집안일은 여자 몫이고, 남자는 거들어준다 정도로 생각한다. 1인 가구 비율이 40% 가까이 되고, 맞벌이가 당연한 세상에서 가사노동이 공동의 몫이 아니라 분담해주면 칭찬 받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지금껏 ‘가정적인 여자’란 표현을 안쓰고 없는 걸 보면 가정적이라는 말은 남자의 몫이다.


같이 살아보지 않고 그 사람이 가정적인 건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상대의 말 뿐이고, 단편적인 모습 몇 개를 본 짐작일 것이다. 상대가 마음에 들면 믿고 싶은(보는) 마음이 있기에 좋은 이미지를 가진 개념(가정적, 배려. 가족 등)을 덧씌운다. 애초에 사실 여부는 상관없고, 가정적이란 표현이 가진 남녀차별적 사고는 고려대상이 아니다. 낡고 구린 가부장적 세계를 유지시키는 개념 중에 하나가 가족(이기)주의인데, 가족주의가 유지될수록 이득을 보는 쪽이 퍼트리고 강화시켰을 텐데, 당연히 남자다. 사회적으로 당연시하는 개념의 무서움은 그게 내 생각인 줄 착각하게 한다는 점!


세상의 구조물이 수학 공식으로 이뤄졌지만 보이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수많은 개념 속에 살지만 실생활에선 못느낀다. 실생활에서 대수롭지 않게 쓰는 "가정적", "현모양처", "암탉이 울면" "다정다감" "보통의 조건" 같은 표현에 개념은 녹아있다. 실생활 표현이 위력적인 건 "가정적인 게 나빠?" 이 말을 하는 순간 그 개념과 정의가 왜 만들어졌는지, 어떻게 작동되는지 같은 논의를 쓸모없는 일로 만든다.


인종 차별을 당연시하고 유대인 집단학살에 일말의 주저도 없는 나치 장교가 자식과 아내에게 얼마나 가정적이고, 배려심과 예의범절에 철저하고, 클래식에 조예가 깊은 지, 영화에서 가정적인 남자를 숱하게 만났다. 그의 행위는 자신의 가족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가족을 위해서라면 또 다른 가족을 해쳐도 되는 어쩔 수 없는 일인가?


이케아에서 38개국에서 ‘2023 집에서의 생활'이란 설문조사를 했다. 한국 가족주의의 급격한 해체가 드러난다. 좋은 의미에서 독립성, 개인주의인 개인화(individualization)가 두드러진 게 아니라 각자도생의 끝판인 처절한 사유화(privatization)가 강해졌다. 옭고 그름이 아니라 현실이 이렇다.


존재하는 모든 건 끝이 있다. 감정과 마찬가지로 지금껏 지탱해 온 혈연에 기반한 가족관계도 한계에 다다른 건 아닐까? 내 감정과 활동에 공감할 수 있는 친구가 나이 들수록 중요하다는데, 친구가 없다, 있던 친구는 사라졌다. 햐아~ 큰 일이다. 이 일을 어쩔 것인가?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12459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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