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족이 좋아하는 배송지는 단연코 아파트다. 첫 동 부터 마지막 동까지 순서대로 배치되고(적재할 때 편하다) 엘베 옆 좌우 라인이 1위, 세 번째 라인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게 2위, 복도식(은 해당 층에 물건만 내리고 꼭대기 층에서 내려오며 배송) 3위, 당연히 엘베 없는 5층(1층까지 계단 올라야 해서 실제론 6, 7층인 경우도 종종 있음)이 꼴등!
그 외에 층간 사이에 엘베(는 에너지 절약 차원이었다나 뭐래나) 있는 오래된 복도식 아파트 있다. 엘베가 한 대뿐인 경우가 대부분이라 오르내리는 사람이 계속 있고, 층간 엘베라 5층에 내려 4층을 계단으로 이동해서 배송해야 하는 식이다.
물품이 몇 개 없거나 가벼운 것만 있으면 꼭대기 층으로 직행하는데, 무거운 물품을 한꺼번에 시켰거나 배송물품이 많으면 카트에 싣고 가까운 층에 물건을 내려두고 꼭대기 층으로 간다. 한 번에 들 수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고, 한 번에 못 들면 계단을 두세 번 타야 하니 몸도 힘들고 시간이 많이 걸린다. 명색이 아파튼데!
오늘은 층간 엘베가 있는 아파트, 안 좋은 예감은 비껴가지 않는다. 박스용 세제와 쌀, 두루마리 휴지, 물티슈 등등 40여 개 넘는 물품에 12집(한 집이 15개 시킴), 한 번에 싣기 위해 엄청 신경 써서 카트에 쌓았다. 엘베 문을 닫으려는데,
-같이 가입시더
아파트 출입구부터 들려오는 다급한 소리에, 이왕 늦는 거 천천히 하자 싶어, 엘베 문을 잡는데 다급한 목소리와 다르게 아주 느리고 느긋하게 걸어오신다. 급한 일 아니면 먼저 보내주지 굳이 같이 가자고 하는지. 에잇~ 중년 남녀 2명과 노년 여성 1명이 탄다.
-많이 바쁘지예?
-네(많이 바쁜지 알면서, 말이나 하지 말던가)
-요새 택배사장님들 진짜 고생 많다
-(아~ 진심 1도 없는 소리, 짜증이 올라온다)
카트 위에 높이 쌓인 짐을 보더니,
-아이구, 많이도 시켰다. 한 집 꺼라예?
-오데예. 여러 집입니다
-택배사장님들, 제일 고생한다. 수고 많습니다
-(저는 사장 아니고 월급쟁이 노동자입니다를 삼키고, 묵묵부답)
-뭐 한다고 이리 마이 시키꼬? 사람들 참 벨나제?
-그러게요. 365일 매일 오니까 나눠 시키도 되는데…
-어무이, 진짜 살기 좋아졌지예?
-와?
-돈만 있으마 인자는 문 앞에 딱 갖다주고
-그렇네
머라카노? 돈만 있으마 택배 없을 때도 살기 좋았어! 말하려다 입을 닫았다. 13층 엘베 도착. 대량주문한 세제와 쌀, 물티슈 등 15개를 내리는데, 와 이래 마이 시키냐며 수고 많다더니,
-우리 집 꺼네. 문 앞에 놔두세요
그리곤 물건 하나 안 들고 가족을 챙기는 마음을 듬뿍 담아 어무이 조심해서 내려오라는 말을 남기며 계단을 내려간다. 어이를 상실한 택배노동자는 보이지 않는 1205호에 온갖 마음을 담아 노려본다. 벽 너머를 보는 600만 불의 사나이처럼!
햐아~ 남을 그렇게 쉽게 욕하는 인간이, 남 탓을 그렇게 하는 사람이 정작 자신이 한 짓엔 그 어떤 변명도 없고, 미안함을 표하지 않는다. 자신은 필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니 욕먹을 짓이 아니라 생각한다. 그렇게 해야 자신이 떳떳해지니까 스스로를 속여야 한다. 하지만 속임은 영원할 수 없고, 인생사 공짜는 없으니 언젠간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 자신이 선 위치에 따라 풍경은 달라지고 그 위치는 언제든 변한다. 잊지말자!
택배노동은 몸이 받쳐줘야 하는 육체노동이지만 다종다양한 인간 군상을 만나며 어쩔 수 없이 감정노동을 겪는다. 고맙고 즐거운 적도 있었지만 인간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더 많이 기억나는 걸 보면 몸과 마음이 힘든 극한직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