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상 속 자연풍경과 세상의 다정함으로 치유와 회복의 길 걷기
고개 떨군 채 길을 걷다가
흰분홍 첫눈처럼 쌓여 있는
꽃잎무덤을 보았다
한없이 순하고 어여뻤을 꽃잎들을
눈물처럼 떨구어냈을 꽃나무 찾아
무심코 고개 드니 그곳엔
청량한 초록 잎들과
맑디 맑은 하늘이 있었다
아, 그랬구나 그랬나보다
이렇게라도 해서
이 못난 미물에게
하늘 보고 살으라고
그 말을 들려주고 싶어서
열매맺음 포기하고
그 예쁜 아름빛들
뜯기고 꺾이어
땅에 내려앉아 주었나보다
그래, 그렇게 살아야지
하늘 보며 살아야지
조금이라도 덜 미안하게
...... 살아야지
고개 들고
가슴 펴고
하늘품처럼
너르디 너르게
오늘을 살아야겠다.
찰리 채플린이었나. 생이라는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초등학교 3학년 남학생이 교실에서 난동을 부리고 담임교사와 교감에게 손찌검을 했다. 장면은 영상으로 촬영되어 유포되었고, 그것을 따라 하는 놀이를 하는 아이들이 생겨났다. 유포된 영상의 제목엔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참교육.
몇 학년인지는 모르겠다. 저학년인 것 같다. 햇볕이 강한 날 어떤 초등교사가 반 아이들과 운동장에서 체육수업을 했고, 학부모 한 명이 어떻게 그런 날 알림장에 선크림을 바르고 학교 오라는 안내도 없이 운동장에서 체육활동을 할 수 있냐며 항의하면서 여기저기로 다른 학부모들께 이야기를 공유했다. 얼마 전부터 주간학습안내장과 시간표가 나갈 때 가정통신문에 이런 문장이 기입되기 시작했다. "운동장이나 야외활동이 있는 날에는 가정에서 학생의 건강과 안전에 유의하여 운동복, 운동화, 모자, 햇볕 알러지 차단 토시, 마실 물, 특히 선크림 등을 꼭 챙겨 주시기 바랍니다."
현충일 앞뒤로 며칠 쉬는 날이 있었다. 아이들과 부모들은 모처럼 여유로운 날, 다같이 놀이터에 나와 노는 시간을 가졌다. 그 시간은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부모들의 싸움으로 끝났다. 휴일이 지나고 학교는 그 주에만 학폭사안을 3건이나 접수했다.
이게 끝이 아니다. 코로나도 끝났는데 왜 예전처럼 크게 운동회를 실시하지 않느냐는 민원을 학부모들이 조직적으로 넣으며 학교를 들썩이게 했고, 그렇게 해서 야외와 강당을 모두 사용하며 전학년 대규모 운동회를 치뤘다. 조금만 부딪히고 쓸리고 다쳐도 보건실을 들락거리는 아이들로 인해 학교에 하나밖에 없는 보건실은 거의 전쟁터 막사에서 긴급치료를 실시하듯 아침부터 학교가 끝날 때까지 보건실 앞 복도까지 사용하며 아이들을 챙겼다. 초기 임신 중이었던 보건교사는 그날 유산을 했고, 다음날부터 학교에 출근할 수 없었다. 보건교사를 급하게 구할 수 없었던 학교는 수업이 없는 교사들이 돌아가며 보건실을 운영했고, 그로 인해 제대로 돌봄과 치료를 받지 못했다는 학부모들의 원성이 있었으며, 학부모대표들과 학교관리자는 이렇게 답했다. 지나치고 과하게, 무리한 방식으로 학교운동회를 실시한 체육부장교사의 잘못이라고. 체육부장교사는 그날 이후, 정신건강의학과와 심리상담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동네 수영장학원에서 수영강사가 못 보는 곳에서 남자아이들이 물놀이를 하다가 싸움이 났다. 아이는 집에 가서 학교폭력을 당했다고 했으며, 부모는 그날 바로 학원으로 달려가 CCTV를 파일로 받아 학교에 학폭신고를 넣었다. 학원에서 일어난 일인데. 유명한 학원이란다. 수영대회에 나가서 상을 많이 받게 하는 노하우가 있는 학원이란다. 얼마 뒤 큰 수영대회가 있다고 한다. 학원이 타격을 입으면 아이들이 피해를 볼 거라고 한다. 학원은 여전히 성황리에 영업중이다. 학교는 학폭사안 처리를 하느라 교육의 장인지 싸움터의 장인지 모를 일들을 매일같이 치르는 중이다.
주간학습안내장을 보고 있으면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보험회사 약관같다고. 혹은, 약국에서 약 사면 그 안에 아주 작은 크기로 빼곡히 적혀 있는 약품설명서 같다고. 학부모들은 그걸 읽기는 할까.
5, 6월 여러 휴일이 있었고, 여러 행사들이 있었으며, 그 시간들은 여러 후유증을 불러왔다. 한꺼번에 여러 개의 학폭사안들이 학교로 접수되었던 것이다. 학폭사안처리가 업무인지라 정말 글자 그대로 정신과 몸과 마음이 부서질 것 같은 몇 주를 보내고 있다. 도대체 무얼 위한 휴일이고, 누굴 위한 행사들이었을까. 지치고 지친 교사들은 그만 너무 지쳐서 이건 내 업무가 아니네, 이건 내 잘못이 아니네 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생채기를 내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들리는 소식에 여러 교사들이 정신과와 심리상담소를 다니기 시작했다고. 학교는 지금 너무 아프고, 앓고 있다. 나도 그렇다.
정말 비상식적으로 과중한 일들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퇴근하고 나면 정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어서 아이 저녁과 살림을 전혀 챙길 수 없었다. 배달음식이나 패스트푸드, 밀키트에 의지해 몇 주를 살았더니 가공된 온갖 화학첨가물 때문일까. 아이도, 나도 온몸이 퉁퉁 붓고 천근만근이다. 아침마다 내 몸이 비명을 지르는 게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매일을 힘겹게 눈을 뜨고 출근을 했다. 퇴근 후 대충 배를 채우고 나면 무너지고 부서지지 않기 위해 뜨거운 물로 몸을 지지고, 명상도 하고, 좋아하는 음악을 듣기도 하고, 밤산책도 하고, 그냥 침대에 시체처럼 누워만 있기도 하고, 일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낙서나 그림을 그려보기도 하고 등등 지금껏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걸 잡다하게 다 했다. 매일이 긴급조치가 필요한 삶이라니. 그래도 그런 기법들 덕분일까. 이렇게 흰 종이 앞에 앉아 글을 쓸 힘이 있으니 말이다.
어이쿠. 앓는 소리가 너무 길었다. 종이 앞에 앉은 이유, 이렇게 글자들로 풀어서 보내줄 힘을 되찾은 이야기. 이제야 시작해 본다.
아무래도 상태가 무척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쓰러지기라도 할 듯 위태롭게 보였던 건지도 모르겠다. 교감선생님께서 학부모들이 더 전화오면 내가 다 받을테니 그냥 퇴근하라고 하신 날이 있었다. 집으로 가는데 정말 야속하리만치 날이 좋았다. 여긴 40년 가까이 된 아파트 단지다. 단지 내 우듬직한 나무들은 40년 세월의 내공을 푸르름에 담아 그야말로 값없이 한껏 뿜어주었다. 참 좋네. 너무 좋네. 내 속도 모르고. 아마 고개 숙이고 터벅터벅 걷고 있었나보다. 길바닥 모퉁이 한 곳이 새하얗게 빛나고 있는게 보였다. 묘하고 신기한 기운에 그쪽으로 가봤더니 분홍빛 담은 흰 벚꽃잎 더미가 있었다. 지금이 6월 중순인데 어떻게 아직도 꽃잎더미가 있지? 비도 한참 내리고 지나기를 반복했는데. 너무 예뻤다. 어쩜 그렇게 예쁜지 이런 예쁜 꽃잎들 피워냈을 나무가 궁금해 고개를 들었다. 와. 맙소사. 숨 막히게 찬란했다. 굵고 듬직한 나뭇가지들, 햇살 받으며 초록빛을 수채화처럼 투명하게 뿜어내는 수많은 나뭇잎들, 그 사이로 보이는 푸른 하늘.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울컥했고, 억울했다. 이렇게 아름다운데. 세상은 이렇게 멋진데. 도대체 사람들은 왜 그러고 사는 걸까. 쪼그리고 주저 앉아 꽃잎더미들을 들여다보았다. 내 시선이 혹시 그 여린 꽃잎들에겐 날카롭게 여겨질까 최대한 순한 척 하며 순한 눈빛으로 바라보려 마음담아 노력했다. 가끔 꽃봉오리를 보면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기도하려고 모은 두 손 같다고. 꽃잎들을 보며 오늘은 이런 생각들이 들었다. 그 기도의 꽃봉오리들, 피어나 꺾여서 지상에 내려앉았다고. 헌신. 희생. 노력. 눈물. 값없음, ... . 거대하고 깊은 언어들이 내 안을 채우며 억울함의 울컥함은 조용한 감사의 울컥함으로 변화되었다. 부끄러움이 올라왔다. 지난 해, 검은 파도의 초시가 되었던 선생님이 떠올랐고, 함께 모였던 동료들이 떠올랐으며, 깊은 밤 줌으로 모여 우리 모두의 치유를 꿈꾸는 독서심리교육 선생님들이 떠올랐고, 나 대신 전화를 받고 있을 교감선생님이 떠올랐고, 힘내고 몸 챙기라고 얼굴 볼 때마다 말해주시는 직장 동료들이 떠올랐다. 따스하고 다정한 세상의 많은 분들이 떠올랐다. 갑자기 온 세상이 너그러우면서도 안전해졌다. 아, 기꺼이 꺾이어 준 여리고 어여쁜 꽃잎들이여.
집에 돌아와 시를 썼다. 쓰고 싶었다. 기록하고 남기고 소리내고 싶었다. 한없이 부족한 솜씨지만 내 부족한 글이 능력있는 누군가에게 닿아 정말 감동적이고 멋진 글이나 시, 그림이나 음악으로 탈바꿈 될지 또 아는가. 그렇게 위의 시, ‘꽃잎무덤’이 태어났다.
음, 지금 약간 상태가 이상한 것 같다. 행복하지 않은데 행복하다. 감사하지 않은데 감사하고,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 같은데 뭔가를 해내고 있는 느낌이다. 속상하고 눈물 날 일이 많아 행복하지 않지만 행복하지 않은 이들과 함께 하며 서로 돕고 치유와 회복, 성장의 길을 가고 있어서 행복하다. 화가 나고 답답해서 감사하지 않은 일이 많지만 다들 그 일들 덮고 외면한 채 세속의 탐욕을 즐기러 떠날 때 그렇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아 감사하다. 도대체 답이 없어 보여 참담한 일들 앞에서 무기력하게 있을 때가 많아서 너무 슬펐는데 슬픔도 느끼지 못하고 사는 이들이 많은 세상에서 슬픔을 느끼며 이 일들을 견디고 버티고 통과해나가는 업을 해내고 있음에 ‘우리는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힘이 난다. 어이쿠야. 또네, 또. 이건 분명 마법이다.
오늘의 치유마법은 자연이었다. 꽃잎이었고, 나무였고, 하늘과 바람이었다. 그들이 들려준 이야기들은 나를 시와 글로 이끌었고, 전혀 행복하지 않고 불평불만 투성이면서 동시에 깊이 행복하면서 감사해지는 요상한 마법을 이루어냈다. 맞네, 맞아. 찰리 채플린의 말이 맞아. 비극이면서 희극이다. 비극만 보던 내 좁은 마음을 희극도 볼 수 있게 해준 꽃잎들. 오늘은 그분들에게 이 시와 글을 바치고 싶다. 빛나는 아름다움을 기꺼이 꺾여내고 찢겨지며 땅으로 내려앉은 모든 이들이여,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가슴 깊이 감사합니다. 잠시라도 하늘 올려볼 수 있게 해주셔서 너무도 감사합니다. 이 깊은 헌신과 희생, 눈물과 고통이 헛되어지지 않도록 이 아득하고 오랜 듯한 깊음에 힘입어 다시 앞을 보며 이 못난 생, 걸어나가겠습니다. 조금이라도 그대들 앞에서 덜 부끄러울 수 있도록 힘내보겠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