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과 술

by 이미


나는 반신욕 예찬론자는 아니다. 나는 지극한 대중탕 파다. 대중탕에서는 사람 보는 재미도 있고, 때 미는 재미는 더 쏠쏠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간혹 너무 피곤한 날이나 시간이 여의찮을 땐 밤에 잠들기 전 집에서 간단히 반신욕을 하기도 한다. 많은 글에서 반신욕 전도자가 반신욕 하는 방법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뒀다. 읽어 보면 팔은 꼭 물 밖으로 빼고, 배꼽 밑까지만 섭씨 사십 도 정도의 온수를 채워 삼십 분 안쪽으로 하면 엄청 몸에 좋다는 내용들이다. 반신욕은 하체를 데워 뜨거워진 혈액을 상체로 순환시켜 온몸을 덥히는 온돌 시스템과 같은 원리라서 꼭 다리에서 배꼽 밑까지만 물에 담가야 한단다. 몸의 찬기와 온기 사이의 균형을 맞춰주는 보일러의 기능을 하는 게 바로 반신욕이라고. 거기다 잔잔한 음악을 깔고 명상까지 하면 금상첨화다.


나도 반신욕을 할 땐 정석으로 딱 이십 분만 하리라 다짐하며 욕조에 몸을 뉜다. 그러고 들어간 욕조에서 좋아하는 라디오 DJ의 감미로운 목소리를 듣다 보면 프로그램의 1부를 다 듣는 것은 기본이요, 잘 자라는 진부한 멘트로 마무리되는 2부 끝까지 일어나지 않을 때가 더 많은 게 문제지... 시간이 지날수록 올바른 반신욕을 위한 자세가 흐트러지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목 끝까지 물에 푹 담그고 마는 온신욕이 자행되기 십상이다.


늦은 밤에 라디오를 진행하는 DJ의 목소리는 어찌 그리 나긋하고 그윽하며 달콤하기까지 한 건지. 특히 가을밤의 라디오를 이끄는 DJ의 고요하고 은근한 목소리는 욕조 속 따뜻한 물과 어우러져 나를 깊은 감정의 밤바다에 빠뜨리고 만다. 가을은 그런 힘이 있다. 떨어지는 나뭇잎 같은 지극히 자연적이고 보통인 일상에도 센치한 감정을 주입하는 힘.


서늘한 가을밤에 최애 DJ의 목소리를 들으며 안온한 욕조에 몸을 뉘면 멜랑콜리한 건지, 낭만적인 건지 모를 모호한 기분이 들면서 왜 그렇게 톡 쏘는 맥주가 당기는지 모르겠다. 결국 참지 못하고 맥주 한 캔을 따고 만다. 식도를 타고 따스운 물에 반쯤 잠긴 동그란 뱃속까지 단박에 쭉 내려가는 톡 쏘는 청량감이 짜릿하다. 그리고 몹시 행복하다. 나도 모르게 '아, 이게 행복이지. 행복이 따로 있나.' 하는 나름의 철학적인 멘트가 마구 쏟아진다. 목욕과 술, 반신욕과 맥주, 언뜻 보면 공통점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이 둘의 조합은 왜 이리도 매력적인 걸까.


목욕은 뜨거운 물 안에 몸을 담가 입 밖으로 시원하단 말을 내뱉는 역설의 행위고, 술은 입으로 시원한 알코올을 들이켜 온몸을 데우는 아이러니다.


목욕은 육체를 청결히 다듬어 정신을 정갈하게 함이요, 술은 신체의 감각을 무디게 하여 맑았던 정신을 흐리기 위함이다.


목욕은 산뜻하고 깨끗한 여운이 오래가고, 술은 그 종류와 양에 따라 취기와 숙취가 오래간다.


목욕은 내 몸에 대한 아가페적 사랑이요, 술은 인간 내면의 깊은 에로스를 자극한다.

어찌 보면, 목욕은 인간의 고단한 기분을 물에 녹여 삶의 무게를 덜어내는 수양이나 수련, 명상과 같은 정신적 행위에 가깝다. 반면에 술은 인간 의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성을 마비시키고 본능의 리비도를 눈뜨게 만든다. 플라토닉 러브와 에로스적 사랑만큼이나 양단에 있는 것 같은 목욕과 술, 이 둘의 얄궂지만 아름다운 조화, 마치 연애 같다. 반대 성향의 남녀가 이성적으로 끌려 사귀다 시간이 지나 결국 서로를 비슷하게 닮게 되는 과정. 넓게 보면 이 또한 세상의 다양한 인간들이 서로 사랑하는,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과정 아닐까.


그러니 우리, 너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를 배척하지 말자. 이 사람은 이 사람이라 이렇고 저 사람은 저 사람이라 저렇다고 깔끔하게 생각하자. 누군가의 고유함이나 독특함, 개성 같은 개인의 각기 다른 성향 때문에 서로를 너무 싫어하지는 말자. 생각지도 못했던 조합이 기분 좋은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기도 하는 법이다. 마치 반신욕과 맥주처럼.



P.S. 그래서 세상엔 맥주로 목욕하는 맥주 목욕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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