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뭇잎이나 종이에 구멍을 내서 그걸 눈에 갖다 대고 하늘을 올려다보기를 좋아했다. 태양이 어디쯤 있을지 가늠하며 이리저리 얼굴을 돌리다가 날카로운 햇살에 깜짝 놀라 눈을 감아버린 적도 많았다. 눈이 나빠진다고 엄마에게 혼도 많이 났다. 구멍을 통해 바라본 세계는 구멍만큼 작아진 채로 내게 왔다. 작아진 만큼 잘 보였다. 말이 생각을 따라갈 수 없어 조용할 수밖에 없는, 느낀 만큼 표현할 수 없어 우울한 아이가 책 속에 등장하면 나는 그게 나라고 생각했다. 이야기는 기억나지 않고 이미지만 남아있는 책들, 맥락 없는 장면과 기억들이 내 키와 함께 자랐다. 무엇이든 모자라면 편안했고 넘치면 불안했는데 그건 아마도 내가 남보다 조금 더 멀리 볼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작은 구멍을 통해서도 충분히 볼 수 있을 만큼 내 주위의 세계를 축소할 필요가 있었다.
어렸을 때 그림책이 있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나의 책이라고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책들은 문고판 크기의 세계문학 전집으로 거칠고 누런 종이에 작은 글씨가 빽빽하게 찍혀 있던 것들이었다. 삽화가 있었던 책들도 있었지만 흑백인 데다가 조악한 인쇄 상태 탓에 삽화가 없는 책들에 비해 특별할 것이 없었다. 제대로 된 삽화는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받은 교과서에서 본 게 처음이었다. 내가 학교를 좋아했고(남들은 종종 이해할 수 없다고 하지만) 그중에서도 새 학기를 애타게 기다렸던 건 아마도 총천연색 삽화가 첫머리에 들어간 새 교과서를 볼 수 있었던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교과서를 받은 날은 집에 돌아와 꼼짝도 안 하고 책들과 시간을 보냈다. 창호지를 바른 문을 통과한 오후의 햇살이 책 속으로 빠져들 듯 숙인 고개와 웅크린 어깨 위에 내려앉았던 걸, 책 한 장을 넘기기가 아까워서 숨을 몰아쉬던 시간들이 내 몸 어딘가에 아직 남아있는 걸 나는 알 것 같다. 삽화가 그려진 동화책 한 권을 가질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각오가 되어있던, 소심했으나 욕심 많고 겁쟁이였지만 당돌했던 아이였다. 그때 나는 그림책이란 게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어른이 되었고 아이를 낳았다. 아이가 걸을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틈만 나면 아이와 함께 서점에 갔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그림책들 사이에서 아이와 나는 동등했다. 아이만큼 나도 그림책은 처음이었다. 그림책 판매대에서 몇 시간을 보내고도 집에 오려면 아쉬웠다. 아이 핑계를 대고 고른 그림책들은 사실 나를 위한 것이라고 해야 옳았다. 집에 돌아오면 그 그림책들은 당연히 내 책이 되었다. 언제부턴가 아이가 서점에서 책을 고를 때 자기가 원하는 걸 고르기 시작했고 아이 핑계로 그림책을 사고 또 샀던 나의 호사도 끝이 날 수밖에 없었다. 아이처럼 당당하게 ‘난 이 책을 살 거야’란 말을 하지 못했던 건 나 역시 막연하게나마 그림책은 아이들이 보는 책이란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고른 그림책을 넘기는 아이 옆에서 곁눈질을 하기도 했지만 그건 아이 책이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나를 맹렬히 사로잡았던 그림책에서 멀어졌다.
그림책이 다시 눈에 들어온 건 책 정리를 할 때였다. 책을 모아둘 공간은 항상 부족했으므로 정기적으로 정리가 필요했다. ‘이 책은 다시 읽을 것 같지 않아’와 ‘언젠가 꼭 다시 읽을 거야’로 나뉜 책 무더기 앞에서 책을 뒤적이고 골라낼 때마다 모퉁이를 돌거나 고개를 넘은 듯 일상의 풍경이 달라 보였다. 책과 나, 둘 모두에게 가혹한 ‘정리’를 거치고도 여전히 남아있는 책 중의 일부는 그림책들이었다. 보통 그림책은 그 책의 주인이 자라면서 작아진 신발이나 고장 난 장난감들과 함께 치워지기 마련이지만 내 책장에 남겨진 그림책들의 주인은 그 책들을 살 때 이미 어른이었다. 오래전 아이를 핑계로 내가 사들인 바로 그 책들이었다. 그러나 그 책들은 버려지지 않았을 뿐 여전히 잊힌 채로 남아있었다.
내가 그림책을 다시 가까이하게 된 건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를 한 후였다. 남편과 아이가 아침에 나가고 난 후 집과 마당을 혼자 독차지하고 보내는 시간은 무엇보다 달콤했다. 주방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놓고 빵을 굽거나 마당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풀을 뽑고 물을 주거나 휑한 거실에서 책을 읽었다. 오래 잊고 있었던 그림책도 다시 펴보기 시작했다. 서점에 갔다가 눈에 띄는 그림책이 있으면 사기도 했다.
나는 텅 빈 집안에서 서성이며 내 마음대로 그림책을 읽었다. 그림 너머에 숨어있는 이야기들을, 몇 글자 되지 않는 짧은 문장 뒤에 가려진 마음들을 읽었다. 나는 그림책 속 아이가 되었다가 여우가 되었다가 트랙터가 되기도 했다.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 앞에 서서 가슴이 터질 것처럼 벅차기도 했고 책 속의 토끼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렸으며 외할머니의 주름살을 그리워하기도 했다. 피식 웃으며 책장을 넘긴 그림책을 어느 날엔 눈물을 뚝뚝 떨구며 읽기도 했다.
처음에는 삶의 장면이 바뀔 때마다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그림책이 있어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그림책을 천천히 자주 들여다보면서 상황에 맞는 그림책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림책을 읽는 내 시선이 점점 유연해지고 너그러워진다는 걸 알았다. 매일 조금씩 그림책 속 여백을 내 이야기로 채웠다. ‘이렇게 살고 싶었어’라든가 ‘그래도 괜찮네’, ‘아, 다행이다’ 같은 느낌, 너무 작아서 자세히 들여다보지 못하는 반짝임, 존재했는지도 몰랐던 찰나의 시간이 조각난 그대로 그림책 속에 들어있는 걸 바라보며 즐거웠다.
매일 비슷한 때에 일어나 비슷한 날들을 보내며 살고 있다. 마치 이렇게 살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어제 한 일을 오늘 또 하면서도 지겨워하거나 실망하지 않는다. 특별한 기대도 희망도 없지만 그런 날들이 모여 괜찮은 한 달이 되고 기억하고 싶은 한 해가 된다는 비밀을 내게 알려준 게 그림책이다. 세탁기 앞에 앉아서 물이 흐르는 소리를 듣는 일, 휴지통을 비우러 나갔다가 그대로 서서 나무 사이로 지나가는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떨어지는 나뭇잎을 헤아리는 것처럼 ‘아무 쓸모없는 일’에 시간을 써도 불안하지 않은 사람이 되게 하는 힘도 그림책에서 온다. 동쪽 하늘이 분홍빛으로 물든 아침에는 ‘오늘은 하늘 구경만 할 거야’라고 소리를 내어 말하기도 한다. 내 앞에 주어진 것들에 감동하기로 하는 것이다.
내 안에는 여럿의 ‘나’가 함께 살고 있다. 어느 날 내가 문득 낡은 그림책들을 보는 건 그 각각의 ‘나’들을 만나는 것과 같다. 내가 누구인지 잘 모를 때, 숨고 싶을 때, 그리울 때, 어쩔 수 없을 때, 내게서 멀어지고 싶을 때 내 안의 ‘나’들을 다시 만난다. 마흔 살의 내가 스무 살의 나를 용서하고, 열다섯 살의 내가 쉰 살의 나를 이해하기를 바란다. 무엇보다도 내가 나와 화해하고 싶을 때 그림책들이 도움이 된다. 그래서 그림책을 산다. 씨앗을 고르듯이 그림책을 고른다.
나는 오래 헤맨 사람이다.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고 하는데 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게 너무 많았다. 어느 날 그림책이 이유를 찾아 헤매는 내게 물었다.
“왜 항상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이유 없이 좋은 것, 그게 제일 좋다. 삶은 종종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흔들리기도 하지만 그 반대도 성립한다. 우리는 여전히 오늘을 살고 지난날들은 꽃밭처럼 아름답다. 한때 그림책들의 주인이었던 그대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 그때 그 그림책들이 씨앗이 되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