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방학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엄마와 나는 학교 후문 쪽 하숙촌에서 벌써 몇 시간째 골목을 헤매며 하숙집을 찾는 중이었다. 대부분 하숙집에서는 여학생을 받지 않는다고 했다. 제대로 말을 붙여 보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 복덕방 할아버지들도 고개를 저었으나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한번 가보라며 몇 군데 알려준 집들이 있었다. 한 집 한 집 초인종을 누를 때마다 내가 여학생이란 사실이 하숙방을 구하는데 가장 큰 결격사유라는 걸 확인할 뿐이었다.
가파르고 좁은 골목길을 힘겹게 올라가서 마주한 지붕 낮은 집이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집이었다. 여태 방문했던 곳과는 달리 대문이 열려 있었다. 엄마는 심호흡을 한 뒤 문을 밀고 들어갔다. 여느 하숙집 같은 분위기가 아니었다. 시멘트를 바른 마당, 천장이 낮은 마루, 조용한 집은 크지 않아서 하숙생들이 기거할 만한 방이 있을 성싶지 않았지만 정갈했다. 집 뒤편에서 모습을 나타낸 하숙집 아주머니는 여학생을 받은 적이 없어서 어떨지 모르겠다고, 마침 방도 마땅치 않다고 말은 하고 있었으나 어쩐지 밀어내는 투는 아니었다. 이전 집들에서 받은 인상과는 달랐다. 좀 전까지 이번에도 거절당하면 어쩔 수 없이 다시 외삼촌 댁으로 가야 한다고 이야기하던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엄마는 잘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나와 짐 가방을 남겨 놓고 이내 언덕을 내려가 버렸다.
내 방은 부엌방이었다. 안채를 오른쪽으로 끼고돌면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다닐 정도의 좁은 통로가 있었고 그 끝에 부엌으로 들어가는 작은 문이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그 가을학기에 지낼 곳은 부엌에 딸린 아주 작은 방이었다. 하숙생을 받기에는 너무 작았고 게다가 부엌 안에 있어서 아주머니가 마땅한 방이 없다고 했던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책상 하나가 놓여 있었고 책상과 나란히 방향을 잡으면 몸을 누일 수 있었으므로 내게는 충분했다. 부엌으로 가는 길에 줄을 매고 수건과 양말들을 널었다.
그곳에서 지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 방이 하숙생들을 위한 방이 아니라 하숙집 큰딸의 방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는 집 근처에서 남자 친구와 살았는데 하숙집 아주머니가 외출이라도 하는 날에는 하숙생들의 저녁 준비를 하러 오곤 했다. 주말에 내가 집에 다녀오면 내 방(혹은 그녀의 방)에서 쉬고 있던 그녀가 후다닥 일어나 도망치듯 나가버리곤 했다. 그러니까 그즈음에 내 방은 그녀의 방이기도 해서 우린 하나의 방을 서로 다른 시간대에 사용하는 동거인이 되었다. 나 아닌 다른 이가 내 방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걸 우리 둘 다 알면서도 서로 그 사실을 모르는 척했다. 그게 편했다. 나는 이미 다니던 학교 후문으로 통하는 그 동네에서 여학생을 받아주는 하숙집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방의 원래 주인이었던 하숙집 큰딸로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넉넉하지 못한 집안 형편을 알기에 고정적인 수입원을 끊어버리라는 말을 엄마에게 차마 할 수 없었을 테니까.
그때로부터 30여 년이 지났다.
집에서 내가 제일 자주 들어가는 방은 아래층에 있다. 이사 와서 처음에는 용도가 불분명했던 방이었다. 침실은 모두 이층으로 정했고 미처 자리를 찾지 못한 가구들과 풀지 못한 짐들이 놓여있었다. 그대로 놔두었다간 자칫 창고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었다. 이사를 하고 두어 달 지난 늦가을의 어느 날 나는 밤을 새워 가면서 그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만의 방을 갖고 싶었다. 가능하면 텅 빈 느낌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래야 무엇을 하든 처음의 느낌이 날 테니까. 책상을 들여놓고 스탠드에 불을 켠 날, 드디어 내 방이 생겼다.
처음에는 혼자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흥분이 가라앉자 혼자라는 사실이 뭔가를 약속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예상이 어긋나자 당황했고 혼란스러웠다. 밤에 방에 홀로 앉아 있으면 온갖 감정들이 두서없이 솟아났다가 사라졌다. 낮에 억눌리며 숨어있던 감정들은 어두운 밤 홀로 있는 시간이면 방구석에서 슬금슬금 기어 나와 나를 괴롭혔다. 호젓하게 즐길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던 시간은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당장 하고 싶은 것이 뭔지도 몰랐다.
화가 윤석남의 그림책 [다정해서 다정한 다정 씨]는 바로 내가 지나온 그 답답했던 시절을 상기시켰다. 내 얘기가 여기 왜 있나 싶었다. 스물일곱 살에 결혼해서 마흔 살에 자기 방을 갖게 된 그림책 속 여자는 눈만 내놓은 채 검은 자루 속에 숨어서 고치처럼 매달려 있다. 그녀는 듣지도 않고 보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고 세상에서 돌아선 채 숨어 있다가 어느 날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는 나비처럼 자루에서 나왔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내 것이 아닌 삶을 사는 것 같아서 불만이던 시간이 슬라이드 넘어가듯 지나갔다. 자기만의 방을 갖게 된 사람들은 누구나 처음을 경험할 것이다. 불빛이 얼마나 밝든, 공간이 얼마나 넓든, 비대해진 자신으로 가득 차서 방은 금세 비좁고 어두워질 터라 홀로 있어도 답답하고 뭘 할지 몰라 서성이는 게 고작이었다는 사실을 그림책 속에서 다시 확인했다. 나도 자루 속 여자처럼 긴 터널을 통과해 왔으니까. 길고 어두운 터널 끝에서 우리가 만나게 될 것들, 혹은 사람들은 무엇이고 또 누구인가?
“멀고도 가까운, 미워하며 사랑하는,
끊어지지 않는, 가련한, 어여쁜, 그런 사이.”
누구라 이름 붙이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다정한, 내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굽은 등과 흐르는 땀으로도 어린 생명을 기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다정한 이들이 책 속에서 나를 반겼다. 세상에서 제일 작은 점(店)이었던 그녀의 방은 이제 다정한 사람들로 가득 차서 세상에서 가장 넓은 경치 좋고 볕 잘 드는 점(店)이 되었다. 책장을 넘기면서 나도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나도 그녀처럼 ‘다정’이 샘솟듯 피어나는 점(店)을 만들고 싶었다. 다정한 세상에서 다정한 사람들과 다정하게 지내는 꿈을 꾼다. 무엇보다 자신에게 다정할 것, 이제 내 방을 다정한 방이라 부른다.
스무 살 언저리에 밥하고 설거지하는 소리를 배경 음악 삼아 살았던 방과 지금의 방은 크기만 다를 뿐 같은 방이다. 낮 동안 침묵 속에 가라앉아 있던 그 방에서 나는 지친 나를 어르고, 조각난 마음을 이어 붙인다. 삶의 서로 다른 시기에 내게 다가왔던 다정 씨들을 불러내어 오래전 낮은 담벼락 너머의 어둠을 무서워했던 여자아이를 안심시키는 밤이면 삶이 꼭 생각했던 대로 흘러가지 않더라도 살 만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조금씩 내가 나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모습을 지켜봐 주는 다정 씨들을 그 방에 초대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