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가 1초에 340미터를 간다는 걸 알고 난 후부터는 천둥소리를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다. 소리가 움직일 수 있다는 것, 그 속도가 일정해서 소리가 시작된 곳을 가늠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벼락이 내가 있는 곳으로부터 정확히 얼마나 먼 곳에 떨어졌는지 가늠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우르릉거릴 때마다 나는 몸집이 큰 동물들이 어두운 들판을 맹렬하게 내달리는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천둥은 마치 날쌘 표범 같았다. 무서웠지만 마음을 끄는 풍경과 소리, 하늘과 땅 사이를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듯한 긴장감이 좋아서 번개가 칠 법한 날이면 미리 방문을 열어놓고 먼데 하늘을 쳐다보면서 기다렸다. 어둠 속에서 번개가 번쩍 나타났다 사라지면 속으로 헤아린 숫자에 340을 곱해서 번개와 나 사이의 거리를 계산했다. 멀게 느껴지면 내가 안전하다는 생각에 마음을 놓았고 가까우면 다가오는 위험에 맞서는 용감한 아이가 된 것 같아 무서우면서도 기뻤다. 게다가 운이 좋으면 정전이 되기도 했으니까.
정전이 되면 엄마는 재빨리 초에 불을 밝혔다. 그런 밤에 엄마는 양초를 세울 수 있는 곳마다 불을 밝혀 두곤 했는데 일렁이는 촛불 주위의 풍경은 환할 때 보던 그것과는 달라서 주변 어둠 속에서 오히려 더 선명해진 느낌이었다. 우린 촛불을 가운데 두고 모여 앉아서 목소리를 낮추었다. 전기는 나갈 때처럼 들어올 때도 갑작스럽다. 일렁이는 촛불 아래 나지막한 목소리와 조심스러운 움직임들을 둘러싼 정적은 전기가 다시 들어오면 갑자기 깨진다. 어쩐지 한바탕 꿈이라도 꾼 것처럼 언제 그랬냐는 듯 집안은 다시 일상의 리듬을 되찾았는데 난 그 짧은 시간,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있는 듯한 느낌이 아쉬워 다음번 천둥 번개 치는 날을 몰래 기다리곤 했다.
수필가 김서령은 촛불을 켜면 진짜 밤다운 밤이 찾아온다고 썼다. 어둡고 깊은 밤에는 촛불 앞에 앉아 있기만 해도 마음속 깊이 묻혀 있던 제 안의 소리가 두런두런 살아난다고 했다(산문집 [참외는 참 외롭다]). 어른이 된 지금도 촛불을 바라보고 있으면 오래전 천둥번개로 정전이 되었던 밤과 촛불, 그 주위를 감쌌던 나직한 목소리들이 들리는 때가 간혹 있다. 백희나의 그림책 [달 샤베트]에서 정전이 되자 주민들이 불빛 주위로 모여드는 장면을 봤을 때 반갑기까지 했던 기시감은 그만큼 먼 시간에서 왔다.
더운 여름밤이다. 사람들은 바깥의 열기가 실내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닫고 에어컨과 선풍기를 돌리고 있다. 베란다 문을 활짝 열고 화분에 물을 주고 있는 반장 할머니의 집만 예외다. 할머니는 부채를 들어 더위를 물리쳐 보려 하지만 집집마다 돌아가는 에어컨 실외기의 뜨거운 바람에 시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불 켜진 창문 안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주민들의 모습이 보인다. 달이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하늘의 달이 녹아내릴 만큼의 더위란 어느 정도일까? 달은 방울방울 녹아서 사라져 버렸다. 달이 사라진 밤, 정전이 되었다. 선풍기도 에어컨도 멈췄다.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밖으로 나왔으나 정전인 데다가 달마저 녹아버렸으니 사방은 어둠뿐이다.
반장 할머니가 달 녹은 물로 만든 샤베트를 먹으며 아파트 주민들은 더위를 식힌다. 어둠은 전깃불로 몰아내고 더위는 에어컨으로 이겨내던 사람들은 전기가 끊어지고 나서야 달빛이 얼마나 밝은지 에어컨 없는 밤이 얼마나 조용하고 시원한지 알게 된다. 놀랍게도 더운 여름밤 어둠 속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건 에어컨 대신 달빛과 샤베트, 창문을 열고 청하는 단잠이었다.
함박눈이 내리면 엄마는 눈으로 샤베트를 만들었다. 장독대에 소복하게 쌓인 눈을 양푼에 담아 우유와 설탕을 넣고 휘저은 것을 유리컵에 담아주면서 샤베트라고 했다. 지금도 ‘샤베트’라는 단어를 말할 때마다 내가 떠올리는 것은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먹을 수 있는 샤베트가 아니라 엄마의 눈 샤베트다. 반장 할머니가 만든 달 샤베트를 먹는 사람들을 보면서 오래전 겨울에 난로 옆에서 먹었던 눈 샤베트가 생각났다. 정전이 불러온 어둠 저편에서 오래된 기억이 샤베트처럼 달고 시원하게 살아난다.
무더운 여름밤 창문을 활짝 열고 깊은 잠을 잔 주민들은 다음날 아침에 지난밤 일을 한바탕 꿈으로 기억할까? 달 샤베트가 시원하고 달콤하다고 했으니 아이였던 내가 함박눈이 내리던 날에 달아오른 난로 옆에서 받아먹었던 눈 샤베트처럼 꿈같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