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마중
시장에 간 엄마가 돌아올 때가 지났다. 동생과 나는 인형 놀이도 소꿉놀이도 지루해져서 열린 대문 너머로 이어지는 집 앞 골목길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동생 입에서 엄마가 언제 오느냐는 말이 나올까 봐 벌써부터 조마조마한 참이었다. 울보 동생이 엄마 생각을 하지 않게 하려고 황당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거나 새로운 놀잇감이 될 것 같은 뭔가를 찾아내려고 애썼다. 엄마가 왜 안 오느냐고 동생이 울음을 터트리기라도 하면 엄마가 오기 전에는 도저히 울음을 멈추게 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엄마를 기다리다가 지치면 꽃잎이 여러 장인 꽃을 꺾어 들고 동생과 마주 앉았다. 우리는 번갈아 가면서 꽃잎을 한 장씩 떼어냈다. 꽃잎 한 장에 엄마는 오고 또 안 왔다. 꽃잎이 몇 개 남지 않으면 혹시 ‘안 온다’에 멈출까 봐 마음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엄마가 온다는 점괘가 나오지 않으면 다른 꽃을 꺾어서 꽃잎을 처음부터 다시 세었다. 엄마가 곧 온다는 말을 꽃에서라도 듣고 싶었을까. 꽃잎이 딱 맞게 떨어지면 마음이 놓여서 잠깐은 편안했다.
동생에게 엄마는 곧 올 거라고 계속 말해야 했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얼굴을 바라보면서 내 안에서도 슬금슬금 불안이 쌓이고 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지금쯤이면 엄마는 저 아래 건널목을 지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조금만 더 기다리면 엄마가 올 거라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할 수 있는 말은 모조리 끌어다 댔지만, 사실은 나도 동생에게 묻고 싶었다.
“엄마는 왜 안 오지?”
전차 정류장에서 엄마를 기다리는 아가가 있다. 집에서 엄마를 기다리다 지쳐 정류장까지 나온 아가는 전차를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에 서 있다. 아가는 심심해서 땅바닥에 그림도 그리고 기둥을 붙잡고 맴을 돌기도 하다가 쪼그려 앉아서 엄마를 기다린다. 전차가 들어올 때마다 차장에게 우리 엄마 안 오느냐고 묻지만 ‘너희 엄마를 내가 아느냐’며 그대로 지나가기 일쑤다. 날은 춥고 저물어 지칠 법도 하건만 엄마를 기다리는 아가는 추운 줄도 모르고 전차가 올 때마다 점점 더 간절해진다.
“다칠라. 너희 엄마 오시도록 한 군데만 가만히 섰거라. 응?”
어느 다정한 차장이 남긴 말을 붙들고, 선 자리에서 꼼짝도 안 하는 아가 주위로 어둠이 내리고 눈이 날리기 시작한다. 엄마가 곧 올 거라는 마음과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만 있으면 늦더라도 엄마는 꼭 올 거라는 믿음 사이로 슬며시 불안이 자리하는 게 보이는 듯하다. 이태준과 김동성의 그림책 [엄마 마중] 속 아가는 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리던 오후 울먹이던 동생의 모습과 똑 닮아서 볼 때마다 더 귀엽고 더 아프다.
드디어 골목길에서 엄마 모습이 보였다. 양손에 장바구니를 들고 엄마가 오고 있었다. 이번에는 내가 울음을 터트렸다. 엄마를 기다리는 동안 동생을 달래느라 억눌린 불안과 두려움이 엄마를 보는 순간 터졌다. 꺼이꺼이 숨이 넘어갈 듯 우는 나를 보고 동생도 울기 시작했다. 도무지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아니, 얘들이 왜 이래. 이제 시장도 못 가겠네.”
하긴 엄마가 뭘 알겠는가. 엄마 없는 동안 내가 지어낸 온갖 이야기들을, 우리가 뜯어낸 꽃잎들을, 떼를 쓰던 동생과 울면 엄마가 더 늦게 온다고 윽박지른 언니의 마음 졸였던 시간을 엄마가 어떻게 알겠는가. 나는 다음번 엄마가 시장에 갈 때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따라가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골목길 저편에서 엄마가 보였던 순간에 솟아났던 반가우면서도 원망스러운 마음을, 엄마가 온 다음에야 억눌린 감정들을 터뜨릴 수 있었던 그 안도의 마음을, 의심과 불안이 생길 때마다 코스모스 꽃잎을 한 장씩 떼어내며 엄마를 기다렸던 어리고 순수한 마음을 요즘도 내 안에서 발견할 때가 있다. 올까 안 올까, 나를 좋아할까 아닐까, 붙을까 떨어질까, 기대하고 겨루고 실망할 때마다 엄마가 오지 않는 것보다 나쁜 일은 없으니까 하는 마음으로 다시 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