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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Jan 29. 2021

그리움의 끝에 닿는 일

박완서와 호원숙


 책을 읽다가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음식들을 만들어보는 걸 즐긴다. 소설이나 수필을 요리책처럼 펴놓고 똑딱거리는 시간은 평소 식사 준비를 하는 때보다 집중하기 마련이어서 지나고 나면 그 농밀함에 약간 지치기도 하지만 달콤 짭짤한 집중은 보약 같기도 해서 한바탕 소동을 벌이고 나면 몸살을 앓고 난 것처럼 개운하다. 그러한 음식들은 요리책에서 소개하는 음식과는 달라서 어떤 재료가 얼마만큼 필요한지 어느 정도 끓이고 얼마만큼 기다려야 하는지 정확히 나와 있지 않지만 신기하게도 융숭 깊은 맛이 다. 어렴풋이나마 먹어본 기억이 나는 음식들은 한결 쉬워서 고개를 끄덕이며 맞아, 이렇게 하는 거였어 하고 장단을 넣는다. 딸(호원숙)이 엄마(박완서)가 만들었던 혹은 엄마가 좋아했던 음식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놓은 작은 책, [정확하고 완전한 사랑의 기억]은  그런 점에서 내게는 마치 어렸을 때 받곤 했던 종합선물세트처럼 느껴진다.


   초여름 마당에 고추가 열리고 호박잎이 시원스럽게 자라면 수필집 [호미]에서 읽고 익힌 강된장을 끓였다. 풋고추를 듬뿍 넣은 강된장이 바특하게 끓어 거의 완성되면 하도 여러 번 읽어 거의 외우고 있는 문장이 갓 쪄낸 호박잎의 초록색처럼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마침내 그리움의 끝에 도달한 것처럼 흐뭇하고 나른해진다. 그까짓 맛이라는 것, 고작 혀끝에 불과한 것이 이리도 집요한 그리움을 지니고 있을 줄이야."
                                                                박완서 [호미] 중에서


   수필집 ‘호미’를 읽으면 허기가 지곤 했다. 메밀 칼싹두기를 기억하는 부분을 읽다가 수제비를 끓이거나 호박잎과 강된장 이야기를 읽은 후 곧바로 장에 간 적이 여러 번이다. 작가가 기억하는 칼싹두기는 거칠게 간 메밀가루를 대충 반죽해서 방망이로 밀어 칼로 썬 후에 맹물에 끓여낸 음식이라고 했다. 양념장을 곁들이지도 않고 꾸미를 얹지도 않았지만 따뜻하고 부드럽고 무던하고 구수한 메밀의 순수를 간직한 맛이라는 문장에 솔깃해서 냉동실을 뒤진 적이 있었다. 봉평에 갔을 때 사 왔던 메밀가루가 있었다. 반죽을 한 후에 밀대로 밀어 썰었다. 소금 간을 한 맹물에 넣고 끓였다. 책에는 약간 걸쭉해진 국물과 함께 퍼담으면 그만이라고 했으니 어려울 게  없었으나 내가 끓인 국수는 힘이 없어서 뚝뚝 끊어지고 소금 간을 한 국물은 걸쭉하고 텁텁했다. 비 오는 날, 벽촌의 사랑채 툇마루에 앉아서 어린 날의 작가가 느꼈던 적막감의 기억 없이는 메밀 칼싹두기의 맛이 완성될 수 없다는 걸 텁텁하고 밍밍한 칼싹두기를 먹으면서 알았다. 그때의 상실감이라니.


   이제 딸이 쓴 엄마의 이야기 속에서 칼싹두기의 순정한 맛을 내는 것이  '글쓰기에 매몰되지 않고 제 때 책상을 물릴 줄 아는' 강단만큼 쉽게 얻을 수 없음을 읽는다. 나는 그이의 엄마가 썼던 책을 읽을 때처럼 이런저런 음식이 해보고 싶어 몸이 들썩거린다. 올봄에는 막걸리를 넉넉하게 사다가 소나무와 살구나무 밑동에 흠뻑 뿌려야겠다고 작정한다. 만두를 빚던 어린 날의 기억이 작가의 기억과 너무 흡사해서 내 이야기인양 읽다가 넘쳐흐르는 눈물에 당황한다. 명절이 얼마 남지 않아 문득문득 심란한데 '만약에 혼자 이 음식을 준비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제사란 가족이 모여 음식을 만들며 먼저 간 사람을 그리워하는 의식이 아닐까'란 문장에 멈칫한다. 그러다가 찾아낸 질문과 답, 그리움의 끝에 도달하면 괜찮지 않을까? 그러면 혼자라도 흐뭇하고 나른해지지 않을까?


   제대로 하지 못해 기운이 빠질 때마다 하는 혼잣말이 있다.

"할 수 있는 만큼."

작가도 같은 말을 한다.

"그저 할 수 있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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