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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Jan 31. 2021

낙담하지 않기 위해서

스가 아쓰코

   도시가스 검침은 카카오톡으로 한다. 검침일에 계량기의 숫자를 입력하면 며칠 후 가스 요금을 알려준다. 간혹 가스회사에서 연락이  때도 있다. 갑자기 사용량이 큰 폭으로 늘었는데 혹시 숫자를 잘못 입력한 건 아닌지 묻는 전화다. 난방을 가스보일러로 하는 탓에 겨울이면 가스 사용량이 늘어난다. 얼마나 많이 썼으면 가스회사에서 전화가 올까 싶어서 움츠러든다. 아무래도 가스요금이 신경 쓰인다. 이층에서 지내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많으므로 아래층 난방은 최소한으로 한다. 식사 준비를 하러 내려가면 그 썰렁함을 견디기가 어려워 최대한 빨리 밥을 하고 먹고 치우고 후다닥 이층으로 올라가는 덕분에 생활은 점점 더 단조로워진다. 우린 각자 방을 차지하고 홀로 있음을 견디고 또 만끽한다. 함께 있지만 홀로 있는 것이다.


   내 하루는 매일 같다. 올 겨울은 어느 때보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 식사 준비와 설거지, 세탁과 장보기 사이사이에 이러저러한 글을 읽는 것이 이번 겨울 내 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책 몇 권이 이런저런 선택을 좌우하는  가능할까 생각한다(가끔은 그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의 망상이라고 여기기도 한다). 읽는 중에는 이도저도 알지 못하고 그저 읽을 뿐이다. 나를 둘러싼 현실을 정확히 알 수 없어서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다만 할 수 있는 건 읽기 뿐이라 점점 더 책에 빠져들어서 책이 현실이 될 정도가 되어버렸다. 스가 아쓰코의 말처럼 내 안에 '책의 세계가 여름 하늘의 구름처럼 몇 층으로 겹쳐 솟아나서 거의 책이 되어버릴 것처럼' 읽고만 있는 것이다. 작가는 '공부를 게을리하고, 부지런히 책을 읽고, 책의 내용을 열심히 현실로 옮겨와 오로지 멍하니 살게 되었다'라고 썼지만 먹고 먹이는 일 외에는 오로지 읽고만 있는 요즘의 나만큼 '멍하게' 살았을까?


   [먼 아침의 책들]은 작가의 유년기부터 학창 시절에 함께 했던 책들을 둘러싼 이야기다. 나는 벌써 오래전부터 여자아이도 아니고 인생을 변화시킬만한 무언가를 선택할 기회도 많이 남아 있지 않을 만큼 나이가 들었다. 이제는 책이 나를 바꿀 수 있다고 여길만큼 순진하지 않다. 게다가 작가처럼 유년을 돌아본다 한들 시야가 막힐 정도로 천장까지 책들로 가득 찬 서고를 가진 친구도, 늘 하늘을 쳐다보던 시인이 사는 옆집도 없다. 작가가 공부하고 살았던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관해서라면 언젠가 가볼 수 있다는 생각도 해 본 적이 없다. 그건 올려다볼 수 있을 뿐 잡을 수 없는 구름처럼 아득하기만 하다. 내게는 집, 목련과 매화가 피는 마당, 주방과 책장 몇 개가 전부인 서재가 세계의 전부다. 오랫동안 머뭇거렸고 고여있었다. 조심하지 않으면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상실감에 빠질 때도 있다.   


  이제 스가 아쓰코가 문을 열어 내게 보여준 세계는 오래된 마을의 골목길 같다. 길을 잃을 것 같아도 금세 어디로 가야 할지 저절로 알게 되는, 그래서 겁을 내지 않아도 되는 길이다. 어쩌면 내게 익숙한, 이미 알고 있는 세계를 다시 볼 수 있게 된 건지도, 그리하여 진짜로 걷기 시작할지도 모르겠다. 이미 나만의 형태로 알고 있는 기쁨과 좌절이 있고, 인생이 가진 그늘과 빛도 어느 정도는 분간할 수 있으니 그 골목길을 따라가는 게 생각보다 순조로울지도 모른다. 그건 바로 무엇에도 매몰되지 않는 것인데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읽고 쓰는 일과 먹고 먹이는 일 사이를 나비처럼 가볍게 오가기. 주방의 불 끄기를 망설이지 말고 책상 앞에서 단호하게 떠나 깃털처럼 가볍게 잠자리에 들기. 한눈팔고 매혹당하며 멍하니 있기를 멈추지 말기. 그리하여 글과 사람동시에 품고 자유인이 되기. 며칠에 한 번씩은 빈 물병들만 나란한 주방에 서거나 빨래 바구니에 수북한 젖은 타월을 세탁기 안에 던져 넣으면서 한숨이 나오더라도 괜찮기.


  누군가* 썼듯이 어떤 힘이 혼자 있을 때만 솟아난다면 나에게서 솟아나는 힘은 아마 '받아들임'이 아닐까? 이대로도 괜찮다고 말하기 위해서, 낙담하지 않기 위해서, '덜 마른 콘크리트 위를 걸어간 고양이 발자국이 언제까지고 남아 있는 것처럼' 지난 시절의 흔적을 포장하지 않은 채로 바라보기 위해서.

그러니까 혼자 있을 때.


*앤 모로 린드버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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