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문숙 Oct 29. 2023

작가의 휴식

플러쉬

    버지니아 울프는 동물을 사랑했다. 그녀의 일기와 편지들에는 그리즐, 핑커, 샐리 같은 이름이 종종 등장하는데 이들은 각기 다른 시기에 버지니아 울프와 함께 살았던 반려견들이었다. 남편 레너드 역시 마찬가지여서 그들과 함께 생활했던 개들과 고슴도치와 원숭이들이 버지니아와 레너드 사이에서 찍힌 사진들도 여러 장이 남아있다. 처음 쓴 글을 잡지사에 보내고 받은 돈으로 멋진 페르시아 고양이를 샀다는 이야기*나 ‘새그‘라는 이름의 강아지에 관한 에세이**에서 인간이 아닌 종(種)에 대한 애정과 이해를 보여준 버지니아 울프는 자신의 반려견인 핑커를 모델로 한 소설, [플러쉬]에서 인간과 동물 사이의 공감과 연대를 묘사한다.


    플러쉬가 유괴당했을 때 엘리자베스가 보여준 결연하고 대담한 행동이나 그녀의 연인인 로버트 브라우닝을 향한 플러쉬의 질투는 각자가 다른 종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게 한다. 순종 레드 코커스패니얼인 플러쉬와 시인인 엘리자베스 바렛 브라우닝이 '가끔 완전히 당혹해서 서로를 쳐다보며 누워있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그런 상황은 사실 낯설지 않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자주 일어나는 일이 아닌가? 곁에 있는 이가 낯설게 느껴질 때의 당혹감이라니. 게다가 마음을, 감정을 표현하기에 말은 너무나 부족해서 이해는 너무 먼 반면 오해는 순식간에 일어나 사람들 사이에 안개처럼 내려앉는 이 시대에는 더욱더 그렇다. 알아들은 척 고개를 끄덕이는 표정 뒤에 남겨둔 당혹감을 해소하려면 우리는 아마도 밤새 바닷가의 모래알만큼이나 많은 수수께끼를 풀어야 할 것이다. 플러쉬와 엘리자베스 바렛 브라우닝은 모래 알갱이를 헤아리는 대신 조금 더 다가선다. 당혹감을 지닌 채로, 다른 종에 속하기는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반목과 몰이해가 횡행한 요즘이라면 [플러쉬]는 출간 당시보다 다층적으로 읽히고 해석될 여지가 많은 작품으로도 여겨진다.  


    플러쉬는 여주인의 곁에 머무르기 위해 거리에서부터 들어오는 모든 냄새를 포기하고 숲과 앵무새와 사냥꾼의 외침 소리와 질주에 관한 기억들을 외면한다.  플러쉬가 주시하는 건 오직 바렛 아가씨다. 그녀가 편지를 쓰고 읽는 것, 한숨 쉬며 슬퍼하는 것, 들여온 음식을 먹지 않았으면서도 먹은 척하는 것, 커튼이 드리워진 어둑한 방에서 집과 아버지를 떠날 결심을 하는 것, 그리하여 평생 나갈 수 없을 것처럼 여겼던 방의 문을 열고 연인과 함께 집을 나서는 바렛 아가씨의 모습은 놓치지 않는다. 빅토리아 시대 가부장적인 가정의 자기 방에서 갇힌 듯 지내는 아픈 시인에게 플러쉬는 친구이자 연인이고 보호자였다. 우리가 친구에게 마음을 전하기 위해 필요한 게 꼭 ‘말’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


말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가? 말이 어떤 것을 말할 수나 있을까? 말은 말이 전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상징적인 것을 파괴하지 않는가?  
                                                       [플러쉬]                                                              

   

      

    [플러쉬]는 버지니아 울프가 [파도]를 쓰고 난 뒤 '기분전환 삼아 충동적으로' 손을 댄 소설이었다. 긴장을 풀기 위한 쓰기였던 셈이다. 연인 비타 색빌웨스트에게 바치는 또 하나의 헌사로 보는 시선도 있다. 플러쉬의 모델인 핑커는 비타의 개 피핀의 새끼였고, 그들은 편지에서 서로에 대한 구애의 감정을 강아지들의 행동에 투사하기를 즐겼다. 그렇다 하더라도 [플러쉬]를 쓰는 일은 ‘기분전환’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수월해 보이지는 않는다. ‘사전에 깊이 생각하는 버릇이 없어 벌인 일 때문에 한동안 착실히 고생해야 할 것'이라고 예견한 대로 일기 곳곳에서 [플러쉬]를 일컬어 '지긋지긋한 놈' 혹은 '바보 같은 책'이라며 짜증을 내기도 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책을 끝내고 난 후에도 '작은 이야기를 쓸 때는 별로 힘을 들이지 않아도 된다고 누구라도 말하지 못할 것이라고 함으로써 결코 만만하지 않았음'을 시인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책을 출간할 때마다 불안감에 시달렸다. 버지니아 울프를 불안하게 만든 건 자기자신이었다. 스스로 자신의 작품이 완벽하다는 결론에 이르기까지 고치고 또 고쳤다. 하나의 작품을 마무리할  즈음의 일기에서는 불안함과 설렘이 뒤섞인 혼란스러움이 그득하다. 작품의 상업적 대중적 성패는 물론 비평가들의 글을 초조하게 기다렸고 서평이 실린 신문을 겁내기도 했다. 버지니아 울프가 소설을 끝낼 때마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신체적 정신적 어려움을 겪었던 이야기는 낯설지 않다. 


  가볍게 시작한 [플러쉬]였지만 마무리는 역시 까다로웠다.  실패를 두려워했지만 이전의 작품들과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면 성공도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사람들이 [플러쉬]가 '매력적이고, 섬세하고, 여성적이라고' 말할 것을, 인기가 있을 것을 예감했다. 인기 같은 것에 신경 쓰지 말고 흘려보내야 한다고 씀으로써 자신이 '단순히 여성스러운 수다쟁이 작가'로 비치는 것을 경계했다. 버지니아 울프가 예견한 대로 [플러쉬]는 출간된 뒤 처음 6개월 동안 19,000부가 팔렸다. 그때까지 발표한 작품들 중 최고의 베스트셀러였으나 비평가들에게서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매력적이고 섬세하고 여성적인 작가로 비치는 걸 경계했던 버지니아 울프가 출간 후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플러쉬]의 서평들 때문에 잠을 잘 수 없다고 호소했던 1933년 10월 29일의 일기 끝부분은 다음과 같다.


  나는 ‘유명’하거나 ‘위대’해지고 싶지는 않다. 딱지가 붙거나 틀에 박히는 것을 거부하고, 내 마음과 눈을 활짝 열고, 모험과 변화를 계속할 것이다. 문제는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방해받지 않고, 자신에게 알맞은 치수를 발견하는 것이다.
                                    1933. 10. 29 일기                                                                                         


   2년 후, 여름에 [세월]의 초벌 타자를 마치고 나서 버지니아 울프는 자신이 왜 [파도]를 쓰고 난 뒤에 [플러쉬]로 도망을 갔는지 알 것 같다고 쓴다. 그저 둑 위에 앉아 돌을 던지고 싶었을 뿐이라고. 작품을 마무리할 때마다 극도로 불안해지는 자신에게서 도망가고 싶었던 작가의 마음이 엿보인다. 생의 마지막 작품 [막간]의 출간을 앞두고 보인 극심한 혼란과 불안, 결국 [막간]이 그의 유작이 된 사실을 떠올리면  버지니아 울프에게  '그저 둑 위에 앉아 돌을 던지는 건'  이루기에 너무 어려운 소망이었다. 


*여성과 직업

**충실한 벗에 관하여

이전 20화 블룸즈버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