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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May 18. 2024

블룸즈버리의 메리

[밤과 낮]

    아버지 레슬리 스티븐이 세상을 떠난 후 스티븐 남매들은 하이드파크 게이트 22번지의 집을 떠나 고든 스퀘어 46번지로 이사했다. 이사는 주소가 바뀌는 것인 동시에 과거와의 결별이기도 했다. 실험과 개혁정신으로 충만했던 버지니아와 바네사는 익숙한 것들에서 고개를 돌렸다. 벽에 모리스 벽지를 바르는 대신 수성 페인트를 칠했고, 식탁에서는 냅킨 대신 브로모 휴지를 사용했다. 아홉 시에 차를 마시는 대신 저녁 식사와 함께 커피를 마셨다. 모든 것이 달라진 그 집에서 자매는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쓸 생각으로 들떴다.


    그들의 새 주소인 고든 스퀘어 46번지에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블룸즈버리 클럽은 버지니아 울프의 오빠였던 토비의 캠브리지 친구들과 언니 바네사의 미술학교 친구들이 주축이 되었다. 버지니아는 1920년대에 ‘회고록 클럽’에서 당시를 돌아보는 글을 발표했다.  


    “고든 스퀘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자극적이고 가장 낭만적인 곳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새로 해보는 곳, 모든 것을 다른 방법으로 해보는 곳, 모든 것을 시험대에 올리는 곳이었습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그곳에서 열렸던 목요일 저녁 모임들이 블룸즈버리 클럽의 출발이었다고 회고했다. 블룸즈버리 클럽은 오랫동안 잊혔다가 건져 올린 유물 같았다. 성명서나 강령은 없었으며 회원명단은 작성할 때마다 달랐다. 블룸즈버리 클럽의 실체는 모호했지만 자매의 삶을 변화시켰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고든 스퀘어에 찾아온 사람들은 자매에게 낯선 이들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살아 있었을 때 캠브리지의 축제에서 만났거나 토비를 통해 알던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 초인종이 울리면 토비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이들이 실제 모습으로 그들 앞에 서있었다. 밤늦은 시간까지 방안에는 담배 연기가 가득하고 과자와 커피와 위스키가 널려 있었다. 버지니아와 바네사도 새틴 드레스나 진주 목걸이로 치장하지 않았다. 고든 스퀘어에서는 그동안 그들을 옥죄고 있던 관습과 예절을 찾아볼 수 없었다.


   버지니아 울프가 소파 구석에 얌전히 앉아 있었던 방문객들이 대화를 시작하는 장면을 묘사한 걸 읽을 때마다 세계를 건너가는 순간의 느낌이 이런 것일까 생각하게 된다. 처음에는 이런저런 질문에 “아니”라는 것이 가장 빈번한 대답이었다.


    “아니, 나는 못 봤는데.”

    “아니, 나는 가본 적 없는데.”

    “난 모르겠는데.”


   하이드파크 게이트의 응접실에서라면 상상할 수 없는 대화와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대화의 물꼬는 바네사가 텄다. 그녀가 무심코 ‘아름다움’이라는 말을 입에 올렸을 때 그 말에 좌중의 한 사람이 “그야 당신이 말하는 아름다움이 무슨 뜻이냐에 달려 있지요.”라고 대답하는 순간 모두 귀가 쫑긋해졌다. 버지니아는 이 순간을 ‘마침내 황소가 투우장에 들어선 것만 같았다’고 표현했다. 황소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아름다움이든 리얼리티든 말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말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의 표준이 너무 높아서 무가치하게 그것을 깨지 않는 편이 좋을 성싶었다”라고 기억했다. 스스로 그렇게 집중하여 귀를 기울이고, 자기 의견을 가다듬어 내어놓은 건 처음이었다는 고백이 뒤따른다. 토론 끝까지 남아있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버지니아의 표정은 무엇인가 기적적인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기쁨과 경이로 빛났을 것이다. 새벽까지 그렇게 앉아 있다가 ‘무엇인가 대단히 중요한 일이 일어났다고 느끼면서 침대 위로 쓰러지는’ 건 어떤 기분일까.


   당시에 블룸즈버리는 역사가 깊고 문학적인 동네이기는 했지만 예전의 부유한 동네는 아니었다. 버지니아와 바네사가 집을 구하던 때는 집값이 싸서 돈 없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단칸방이 많아서 젊은 직장여성들이 많이 살았다. 보조금을 받고 젊은 여성들을 지원하는 하숙집도 있었다. 여성 참정권 운동의 본부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버지니아 울프가 이사를 한 시기는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이 행진을 하고 정치적인 개혁을 외치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때였다. [밤과 낮]에서 메리가 살았던 곳도 블룸즈버리였다. 명문가의 딸인 캐서린과 여성 참정권 운동을 하는 메리가 처음 만난 곳이 바로 메리의 방이었다. 이 주에 한 번씩 열리는 수요일 밤의 모임에서다.


   [밤과 낮]은 전형적인 구혼 소설처럼 읽힌다. 이야기는 윌리엄과 약혼한 캐서린, 캐서린을 사랑하는 랠프, 랠프를 짝사랑하는 메리가 주요 등장인물인 결혼소동을 따라간다. 등장인물들이 자신에게 걸맞은 짝을 발견하고 결혼함으로써 결말에 이른다는 점에서 어느 순간 제인 오스틴의 작품을 읽는 것 같은 느낌에 빠지기도 한다(이런 점 때문에 1919년 출간 당시에 이 작품을 두고 실망스러웠다는 평가도 많았다고 전해진다). 우여곡절 끝에 윌리엄은 캐서린 대신에 소설 중반에 등장한 카산드라와 맺어지고 랠프와 캐서린도 결혼 약속을 하기에 이른다. 캐서린과 달리 자물쇠를 채울 수 있는 ‘자기만의 방’을 가지고 있던 메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랠프를 사랑하지만 랠프가 캐서린을 사랑하는 걸 알고 있는 메리는 그의 청혼을 거절한다. 메리는 모르는 척 거짓 청혼을 받아들일 수는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비참한 기분은 가라앉지 않는다. 실연을 하고 사무실에 간 메리는 그동안 추진했던 일들이 벽에 부딪쳐 뒤로 물러나있는 걸 알게 된다. 가슴과 머리가 텅 빈 것처럼 느껴진다.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생각은 오락가락한다. 개인적인 행복만 주어진다면 나머지 모든 것들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해보기도 한다. 혼란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메리는 누구에게도 그걸 들키고 싶지 않다. 점심시간이 되기를 기다린 메리는 사무실을 나가 걸으면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죽을까? 아무 남자하고나 연애를 할까?”


  자신이 해왔던 일들과 사랑했던 사람을 번갈아 떠올리며 고통스러운 산책을 한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들으라는 듯이 소리 내어 말한다.


“나는 아무도 증오하지 않겠어.”


사무실로 돌아가서 다시 한번 다짐한다.


“가장 좋은 것을 잃어버렸다고 해서 그 대신도 괜찮은 척하지는 않겠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내 인생에 자기기만은 없게 하겠다고 말이다.”

                                                                 

   그날 밤 메리는 집에 돌아와 서랍을 열고 오래전에 쓰다가 중단한 원고를 꺼내 읽어보다가 줄을 그어버린다. 새 종이를 꺼내 다시 쓰기 시작한다. 메리에게 외부와 차단된 방이 없었다면, 언제 누가 들어올지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면, 그러니까 만약 자기만의 방이 없어 언제까지나 방해받지 않고 자신에게 집중할 수 없었다면, 남을 보듯 자기를 보는 시간이 없었다면, 그러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메리는 그동안 자기가 해왔던 일들, 삶 전체를 돌아본다. 참정권 운동이라는 깃발 아래 숨어있던 시간들, 뭔가 하고 있다는 생각만으로 충분했던 시간들을 가감 없이 들여다본다. 그리고는 한 남자를 사랑하는 대신 온 세계를 사랑하기로 마음먹는다.


   버지니아가 실제로 목요일 모임에서 기대한 것이 무엇인지는 그의 첫 번째 장편 [출항]에 등장하는 한 인물의 말에서 짐작해 볼 수 있다.


“나는 런던에 있는 한 클럽에 속해있어요. 매주 토요일에 모이기 때문에 토요 클럽이라 부르죠. 우리는 예술에 관해 얘기를 나누기로 되어 있지만 나는 예술에 대해 말하는 것에 싫증이 나요.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나요. 우리 주변에 온갖 종류의 현실적인 일들이 진행되고 있는데 말이죠.”

                                                                  [출항] 중에서


   사람과 상황에 대해서 버지니아 울프의 인식은 언제나 자유로웠다. 그의 시선은 표면에만 머무르지 않고 중심을 뚫고 지나서 곧장 뒷면에 닿았다. 그때까지 하이드 파크 22번지의 거실에서 머리를 사용할 일이 별로 없었던 20대의 자매에게 고든 스퀘어 46 번지의 목요일 모임은 머리를 사용하는 새로운 무대였다. 고든 스퀘어에서는 사랑이나 결혼이 화제가 되는 일이 없었다. 바로 이 점이 하이드파크 게이트와 다른 점이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만약 결혼을 한다면(비록 그녀가 결혼을 천한 일이라고 여기긴 했지만) 이튼 일레븐 출신에 만찬을 위해 옷을 차려입는 젊은이들과 하는 거라고 여겼는데 고든 스퀘어 46 번지의 거실에서 마주 앉았던 토비의 친구들 중에서 그런 인물을 찾기는 어려웠다. 이미 언급했던 키티 맥스도 한두 번 모임에 왔는데 그녀가 나중에 한 말은 이것이었다

.

“대단히 훌륭한 청년들인 건 알겠는데 그래도 어쩌면 그렇게 볼품이 없는지.”


   하지만 버지니아가 보기에는 바로 ‘그 볼품없음과 꾀죄죄함이 바로 그들의 탁월함을 증명’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그들의 ‘볼품없음’에서 인생이 그런 식으로도 흘러갈 수 있다는 것을, 그러니까 만찬을 위해 옷을 갈아입을 필요가 없는 삶도 가치가 있다는 걸 알아챘다. 그리하여 버지니아 울프 역시 그토록 혐오했던 하이드파크 게이트 22번지의 방식으로 돌아가는 대신 추상적인 논쟁의 중심으로 곧장 들어갈 수 있었다. 물론 새틴 드레스나 진주 목걸이는 없어도 되었다. '다이아몬드를 좋아하면서도 에메랄드를 좋아하는 척'*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밤과낮]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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