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저녁의 파티를 위해 꽃을 사려는 댈러웨이 부인이 집을 나서면서 한 이 말은 1907년에 버지니아 울프가 동생 에이드리언과 피츠로이 스퀘어 29번지에 집을 마련했을 때 했던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스 여행에서 돌아와 토비를 잃고, 바네사가 클라이브 벨과 결혼하면서 새 집을 찾아야 했던 버지니아 울프로서는 다시 한번 맞이하는 '시작'이었다. 어쩌면 버지니아 울프도 [댈러웨이 부인]의 클라리사처럼 아침마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새로운 삶으로 건너갈 때마다 “얼마나 유쾌한지! 마치 대기 속으로 뛰어드는 것 같아!”라고 외치고 싶지는 않았을까?
버지니아 울프는 소설 속의 많은 인물들과 사건들을 자신의 실제 삶에서 가져왔다. 비록 그대로 가져온 게 아니라 해도 아주 많은 부분을 가져왔다. 가족과 친구 등 주변 인물뿐만 아니라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 지나가다 본 풍경, 사물과 자연환경,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과 자신이 지나온 시간 등을 모두 글쓰기의 소재로 삼았다. 글을 쓸 때 버지니아 울프에게는 그녀 자신 역시 자료이고 도구였다.
그리하여 버지니아 울프의 글을 읽어 내려가는 건 말 그대로 버지니아 울프의 삶을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그리운 이들은 물론 맞닥뜨리지 않았으면 좋았을, 달갑지 않은 인물들이 함께 등장한다. 기쁨과 슬픔, 회한과 분노 등 잊혔던 감정들이 재차 모습을 드러낸다. 버지니아 울프에게는 글쓰기가 바로 삶이었고, 삶이 또한 글쓰기에 재료를 공급했다.
댈러웨이 부인의 모델은 그녀의 어릴 적 친구 키티 맥스(결혼 전에는 키티 러싱턴)였다. 러싱턴 가족과 스티븐 가족은 수년간 친구였고, 울프는 나중에 그녀의 어린 시절 집이었던 하이드 파크 게이트 22번지의 티테이블 주위에 모여있던 아름답고 매혹적인 여성들 중에서도 단연 위트 있고 우아하고 탁월했던 이는 의심할 여지없이 사랑스러운 키티 러싱턴이었다고 회고한다.
키티는 버넌 러싱턴과 그의 아내 제인의 큰딸이었다. 변호사였던 버넌은 리버풀의 순회공연장에서 버지니아의 어머니 줄리아 프린셉을 처음 만났다. 줄리아는 러싱턴의 동료 변호사이자 대학 친구인 허버트 덕워스와 결혼했는데 1870년 덕워스가 죽은 후, 레슬리 스티븐과 결혼해서 토비, 바넷사, 버지니아, 에이드리언을 낳았다.
1884년 제인 러싱턴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을 때, 줄리아는 러싱턴 소녀들을 엄마처럼 챙겼고 키티와 신문 편집장 레오폴드 맥스의 결혼을 주선하기도 했다. 그들의 약혼은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등대로]의 배경인 콘월의 탈랜드 하우스에서 이루어졌다. 버지니아 울프는 [등대로]에서 그들을 민타와 폴로 등장시킨다. 새로 발견된 러싱턴 가족의 기록 보관소에는 스티븐 가족의 별장에서의 삶이 담긴 러싱턴 가의 딸들의 편지들이 남아있어 당시 그들의 삶을 증언한다.
키티 러싱턴은 줄리아 스티븐의 첫 번째 결혼에서 얻은 딸인 스텔라 덕워스와 특히 가깝게 지냈다. 줄리아가 1895년에, 2 년 후인 1897년에 스텔라가 세상을 떠나자 약 10년 전에 줄리아가 그랬듯이, 이번에는 키티가 스티븐과 덕워스의 아이들에게 엄마 역할을 했다. 버지니아 울프의 첫 소설인 [출항]에서 레이철이 클라리사 댈러웨이에게서 모성을 느끼는 장면은 아마도 버지니아 울프의 잠재의식 속에 남아있던 당시의 기억이 발현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버지니아 울프는 이때 이미 클라리사 댈러웨이에게 키티의 자질을 부여해서 아름답고 보수적이며 세속적인 여인을 등장시켰다.
키티에 대한 버지니아 울프의 태도는 처음에는 감탄과 질투의 혼합물이었다. 키티는 버지니아 울프가 보기에 런던 사회생활의 전형이자 그녀의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었다, 키티는 아름다웠고 항상 옷을 잘 차려입었다. 반면 버지니아 울프는 옷을 사는 일이나 머리 손질에 어려움을 겪곤 했기에 종종 키티 옆에서 초라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런던의 성공한 안주인으로서의 키티의 삶과는 다른 버지니아의 삶이 나란히 함께 나아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키티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오래전 '결국은 안주인이 되어 계단 꼭대기에 서게 될 거라는' 피터의 말에 눈물을 흘렸던 클라리사가 이제 파티를 위해 문들을 위로 올리고 은식기를 꺼내고 드레스를 손질하는 장면에서 그녀를 떠올리지 않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키티는 신랄하고 우아한 여인이었고 금발에 파란 눈을 가졌으며, 정치 얘기를 좋아했다. 피아노에 능숙했고 품위와 에너지가 넘쳤는데 버지니아 울프가 그걸 희화화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가족들이 세상을 떠났을 때 보인 그녀의 친절에 감사했지만 동시에 키티가 시류에 영합하고 좀처럼 만족하지 못하는 데다가 남편의 견해에 의존하며 불안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버지니아의 글쓰기에 대해서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키티는 버지니아와 바네사가 블룸즈버리로 이사하고 그곳에 초라한 캠브리지 젊은이들이 모여드는 것에 소스라치게 놀라서는 자매들을 방문하는 걸 그만두었다. 1922년 가을에 버지니아 울프가 [댈러웨이 부인]을 구상하고 있을 때 키티가 난간에서 떨어져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때 키티는 55세였다. 버지니아는 키티가 자살했을 수도 있다고 추측했지만, 당시에 그 생각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는 없었다(훗날 러싱턴 가문의 기록 보관소에서 발견된 문서들에 따르면 키티의 외할아버지는 우울증을 앓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외삼촌 중 한 명은 아내를 살해한 후 자살한 사실이 밝혀졌다). 버지니아 울프는 애초에 댈러웨이 부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구상했으나 키티의 죽음 소식을 듣고 댈러웨이 부인 대신 셉티머스가 자살을 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키티의 죽음이 지나치게 직접적으로 연상되는 것을 꺼려한 때문이 아니었을까. 버지니아는 그녀와의 절교에 자신의 책임이 있다고 느꼈고 후회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를 싫어했던 사실이 바뀌지는 않았다. [댈러웨이 부인]의 클라리사가 약간은 '겉보기에만 번지르한' 몇몇 특질을 지닌 것은 그 때문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평생 가족과 아는 사람들, 특히 자기 자신을 탐구하고 그걸 글로 썼다. 클라리사로 하여금 “그녀는 이제 세상 누구에 대해서도 그들이 이렇다든가 저렇다든가 말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하게 한 부분은 바로 그러한 탐색의 결과일 것이다. 인생의 상당 부분을 그런 라벨들을 해체하는 데 사용했던 버지니아 울프로서는 어떤 사람을 ‘이런 사람 또는 저런 사람이라고 정의하는 데 따르기 마련인 오류 혹은 의도적인 허위를 폭로하는 데‘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글을 쓰는 이들이 쓰면 쓸수록 자신에게 엄격해지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