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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Jul 20. 2024

버지니아 울프의 시골집

몽크스 하우스

“사실대로 말하자면 사람들이 왔을 때 나는 좋았다. 그러나 그들이 떠나갔을 때 나는 더 좋았다. “  
                                          버지니아 울프의 일기  1933.9.23


    버지니아와 레너드가 신혼을 보낸 곳은 애쉬햄 하우스였다. 신경쇠약으로 고생하는 버지니아에게 의사들은 런던에서 조금 떨어진 조용한 시골에서 지낼 것을 권했다. 결혼하고 일 년을 넘길 때쯤 신경쇠약 증세가 도지자 레너드는 버지니아를 위해 여유 있는 루틴을 마련했다. 버지니아는 다른 사람의 글을 타이핑하기도 하고, 정원을 가꾸고, 요리를 배우면서 지냈다. 이 집에서 전쟁을 겪었고 [밤과 낮]을 썼다. 완전하게 회복하지 못했기에 자주 강제적으로 쉬고 먹어야 했다. 하루에 쓸 수 있는 글의 양까지 엄격하게 정해져 있었다. 전쟁(세계 1차 대전) 때는 더 어려웠다. 최대한 자급자족하겠다는 생각으로 매일같이 잡초를 뽑고 거위를 치고 빵을 만들며 살았다. 전원생활은 비용을 줄일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돈을 모아서 1917년에 작은 인쇄기를 샀다. 리치먼드의 호가스 하우스에 출판사를 차린 후에는 애쉬햄 하우스와 호가스 하우스, 두 곳을 오가며 지냈다. 버지니아와 레너드는 하루에 몇 시간씩 인쇄기 사용법을 공부했다. 레너드는 손을 떠는 증세가 있었기에 조판은 버지니아가 맡았다. 그렇지만 두 사람 다 인쇄기가 주는 독립 생산의 느낌을 좋아했다. 무엇보다 버지니아 울프가 가장 좋아했던 건 쓰고 싶은 글을 써서 자력으로 출판할 수 있는 자유였다. 단편소설들을 많이 썼다.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부터였다. 버지니아에게 일기는 소설과 마찬가지로 삶의 덧없음에 저항하는 방법들 중 하나였다. 하루가 기록 없이 그냥 흘러간다는 생각이 버지니아에게는 상실감의 원천이었다. 삶이라는 수돗물이 그냥 허비된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가 기록하고 싶은 일은 얼핏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었다. 버지니아에게 더없이 행복한 하루는 더없이 조용한 하루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언젠가 언니 바네사에게 썼던 편지의 문장처럼 “자신에게만 침잠하고, 산책하러 가고, 차 마시러 돌아오고, 편지를 발견하고, 또 차 마시고 그리고 불 너머에서 글 쓰고 책을 읽는 생활“을 하며 조용히 살았다. 안정적인 생활에 길들여질 무렵 집주인에게서 6개월 뒤에 계약을 해제하겠다는 통보가 왔다. 1919년이었다. 버지니아는 애쉬햄을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선택권이 없었다.


버지니아 울프의 침실과 글쓰는 책상

   

   그들은 1919년 7월 1일에 경매에서 입찰금 700 파운드로 몽크스 하우스를 샀다. 몽크스 하우스와 사랑에 빠진 그들은 해마다 그곳에서 여름의 서너 달, 부활절과 크리스마스의 몇 주, 봄과 가을의 주말들을 보내는 걸 거르지 않았다.  버지니아는 1919년 8월에 이미 자신들이 그곳에 묻힐 거라고 말하곤 했다. “몽크스 하우스는 …… 영원히 우리 주소가 될 것이다. 초원으로 펼쳐진 땅에 나는 이미 우리 무덤을 표시했다.”라고 쓴 편지가 남아 있다(버지니아는 키가  큰 두 그루의 느릅나무에 각각 레너드와 버지니아의 이름을 붙였다. 1960년에 레너드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남은 이들은 그를 화장해서 레너드란 이름의 느릅나무 아래에 묻었다. 그 바로 옆에는 버지니아의 재를 묻은 또 다른 느릅나무가 있었지만 버지니아가 죽고 난 몇 년 후에 강풍으로 쓰러졌다).  



정원의 느릅나무


    레너드는 유태인의 원형 같은 사람이었다. ‘영원히 유랑하는 유태인’, 유목민처럼 영원히 정착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좋아했다. 일흔 살에 훌륭한 유태인처럼 죽을 때, 그때에도 여전히 집이 없기를 꿈꿨다. 버지니아 역시 그 생각에 끌렸다. 결혼할 때 진짜 집을 갖지 말고 고질적으로 방랑하자고 말한 사람은 버지니아였다. 그렇지만 둘 다 방랑만큼이나 특별한 장소에 반응하는 사람들이었다. 둘 다 방랑자 성향은 아니었던 것이다.


    몽크스 하우스는 호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정원에서 쏟아져 들어온 빗물이 집안을 물바다로 만들고 밤에는 쥐들이 뛰어다니고 욕실이나 변기도 없었다. 정원 월계수 사이에 묻힌 노천 변소가 전부였는데 너무도 암울한 모습이라 중개인이 보여주려고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서리가 내린 추운 아침“에도 버지니아는 숲 속 공터에 있는 “낭만적인 방”으로 걸어가야 했다. 실용적인 사람이었던 레너드는 다락에 양동이를 가져다 놓고 그 위에 의자를 놓아서 화장실을 급조했다. 버지니아는 책을 한 권 쓸 때마다 벌어들인 돈으로 리모델링을 했다. 자신이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은 버지니아 울프에게 깊은 만족감을 줬어요. [델러웨이 부인]으로 번 돈은 몽크스 하우스에서 욕실 하나와 화장실 2개로 바뀌었는데 그중 하나의 이름은 델러웨이 부인 화장실이었다. [등대로]로 번 돈은 자동차로, [올랜도]로 번 돈은 몽크스 하우스에 울프의 새 침실을 마련하는 데 들어갔다.


버지니아 울프의 글쓰는 오두막


    처음에 몽크스 하우스는 애쉬햄보다 더 작고 덜 매력적인 원시적인 집이었다. 무엇보다 부엌을 당장 새로 만들어야 했다. 적절한 스토브가 없어서 이웃에 사는 교회 관리인의 아내에게 요리를 부탁하기도 했다. 부엌을 마련한 후에도 어둡고 습해서 하인들이 불만이 많았다. 1926년에야 부엌을 수리하고 온수 레인지와 욕조를 설치했다. 깔끔하거나 사치스러운 집이라고 할 수 없었던 몽크스 하우스는 1920년대와 30년대에 울프 부부의 지출 여력이 커지면서 서서히 좀 더 편안한 시골집이 되어 갔다.


    레너드는 정원 가꾸기에 열심이었다. 이사를 한 첫 달부터 무모할 정도로 잡초를 뽑고 나무를 심었다. 레너드가 차를 마신 후 나가도 좋다고 허락받은 아이처럼 달려 나가면 버지니아도 곧 따라나갔다. 버지니아는 당시에 “이것이 행복이야 하고 말하게 만드는 이상한 종류의 열정이" 자신을 감쌌다고 회상했다. 등이 뻣뻣해지고 “손톱에 낀 초콜릿 색의 흙”을 긁어내는 날들이 지나갔다. 부부는 정원을 가꾸는 문제로 다투기도 했다. 온실과 정원사를 위한 오두막을 짓는 비용을 놓고 신경전을 벌이면서도 그들이 몽크스 하우스가 세상의 중심인 것처럼 살았던 건 분명했다. “다시는 여행도 가지 않고 자신들이 번 돈을 정원에 다 쓰면서 영원히 묶여서 살고 싶었던 걸까?”라고 일기에 쓴 적도 있었으니까 말이다.


    마을에는 버스도 안 다니고 수도나 하수도도 없고 전기도 안 들어왔다. 그런데도 런던의 친구들과 찰스턴의 가족들이 찾아왔다. 버지니아는 주말의 손님들을 귀찮아하기도 했다. 그녀는 그들이 도착하자마자 떠나기를 원하거나 그들이 떠난 후 혼자 즐기는 걸 좋아했다. 몽크스 하우스에서 삶의 중심은 사교가 아니라 사사로움과 사색이었다. 그러므로 시골집의 불편함 들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버지니아는 날씨와 상관없이 매일 오후에 개를 데리고 언덕이나 강가를 산책했다. 사람들은 남루한 옷을 입고 머리는 헝클어지고 혼자서 끊임없이 말을 하며 걷고 있는 기묘하고 고독한 그녀의 모습에 익숙해졌다. 버지니아가 1932년 6월 13일에 쓴 일기를 보면 그들이 그곳에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알 수 있다.


“로드멜에서 좋은 주말을 보내고 돌아왔다. 침묵, 책 속으로 깊고 안전하게 가라앉기. 그러곤 밖에서 산사나무가 흔들리는 소리, 마치 파도가 부서지는 것 같은 소리를 들으면서 맑고 투명한 낮잠. 정원의 모든 초록 터널과 둔덕들. 깨어나니 덮고 고요한 낮.  보이는 사람도 없고 방해가 되는 것도 없다. 우리만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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