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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Apr 08. 2024

버지니아 울프가 질투했던 작가

캐서린 맨스필드

   글을 쓴다는 건 언젠가 공개될 것을 염두에 두고 하는 일이다. 어렸을 때 학교에서 글짓기를 할 때 행여 들킬세라 팔로 가려가며 원고지 칸을 채워나갔던 걸 기억하는지, 연필과 지우개가 끊임없이 오간 흔적으로 만신창이가 된 원고지를 선생님에게 가져갈 때 가슴이 얼마나 콩닥거렸는지 기억한다. 선생님이 나를 옆에 세워둔 채 몇 장 안 되는 원고지를 한장한장 넘겨가며 읽을 때 온몸이 점점 달아올랐던 기억도 생생하다. 얼마나 읽히고 - 그것도 제대로 - 싶었는지를 말이다. 선생님이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온전히 읽어주기를 바랐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글을 쓰는 이들 중 제대로 읽히고 싶은 마음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이가 있을까. 그러니까 버지니아 울프라도 말이다. 


   버지니아와 바네사, 토비는 어린아이였을 때 가족 신문 <하이드 파크 게이트 뉴스>을 발행했다. 그들이 가장 긴장했던 건 신문에 실을 기사를 쓸 때보다 신문을 발행하고 나서 부모의 반응을 기다리던 때였다. 바네사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신문을 읽고 있는 부모의 대화를 엿듣기도 했다고 회상한다. 바네사의 얘기에 등장하는 어린 버지니아의 모습이 작품을 출간할 때마다 지인들과 평론가들의 반응에 예민했던 작가의 모습과 겹쳐진다


   여러 번 고쳐 썼던 [출항]으로 성공적인 출발을 했던 버지니아울프는 두 번째 소설 [밤과 낮]의 출간을 앞두고 매우 예민한 상태였다. 급작스럽게 몽크스 하우스로 이사를 해야 했고,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한 결정을 때때로 후회하면서 언니의 아이들과 임신 소식에 우울해지기도 했다. 언니 바네사에게 헌정한 [밤과 낮]은 1919년 10월에 출간되었는데 울프는 1919년 11월 28일 일기에 '여자들의 우정에 흥미가 있다.'라고 썼다. 바로 그 주에 캐서린 맨스필드의 논평에 마음이 상했던 것이었다.  


   단편소설 작가였던 캐서린은 버지니아 울프의 첫 번째 장편인 [출항]에 열광했고 누구보다도 버지니아를 만나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그들이 처음 만난 건 1917년 2월이었는데 버지니아는 그녀가 불쾌하고 조심성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서린의 글쓰기에 관한 재능을 인정했고 호가스 출판사에서 그녀의 책을 출간하기로 했다. 그들이 만난 초기에 캐서린은 버지니아에게 "우리는 똑같은 직업을 가졌어요. 그리고 우리가 서로 아주 동떨어져있지만 둘 다 거의 똑같은 것을 추구한다는 것은 정말로 호기심을 자극하며 전율을 일으켜요."라고 썼다.  버지니아 울프 역시 캐서린을 친구로 생각했지만 동시에 경쟁자로도 여겼다. 버지니아는 일기에 “그녀의 글쓰기에 질투가 난다. 여태껏 질투심을 느꼈던 유일한 글쓰기이다.”라고 쓰기도 했다. 


   캐서린이 편지에 쓴 것처럼 문학이라는 영토에서 같은 목표를 지향했던 두 사람은 각자의 능력과 욕망을 너무 잘 알았기에 친밀하면서도 서로에 대해 공격적이었다. 상대방이 그걸 알고 있다는 사실마저 알고 있었을 그들 사이에 평화가 깃들기란 쉽지 않았다. 버지니아는 캐서린이 번갈아 보여주는 특별한 친밀감과 무관심 사이에서 자주 동요했고 캐서린이 종종 불친절하며 일관성이 없다고 불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의 관계는 1917년부터 1920년 사이에 버지니아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캐서린 맨스필드와의 우정은 버지니아 울프가 1920년대 초기에 자신의 글을 발전시키는 방식에 깊게 영향을 미쳤던 관계이기도 했다. 맨스필드의 단편 소설들 자체를 도전으로 받아들이곤 했던 버지니아울프였으니 그녀의 논평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밤과 낮]이 출판되자 캐서린은 남편 머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소설을 ‘현대판 제인 오스틴’이라고 평했다. 캐서린은 [밤과 낮]이 우리를 늙고 춥게 느끼게 한다고, 그와 같은 것을 다시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고 썼다. [밤과 낮]은 ‘영혼의 거짓말’이며 ‘지적인 속물주의’로 가득한 ‘끝없는 허영과 자만’이라고 혹평을 한 것이다. 버지니아는 발끈했다. 캐서린이 자기를 '예의 바른 나이 든 얼간이'처럼 느끼게 한 것을 용서하기가 어려웠다. 


    캐서린 맨스필드는 뉴질랜드 출생으로 버지니아울프보다 6살 어렸고 외모나 기질, 경험에서 버지니아울프와는 완전히 달랐다. 1908년 20살에 뉴질랜드의 중산층이었던 가족을 떠난 그녀는 끊임없이 떠돌아다니며 좀처럼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버지니아가 조상들과 단단히 엮여 있던 것과는 반대였다. 물론 작품에 몰두하는 것이나 아이가 없는 결혼, 건강하지 못하다는 점 등 비슷한 점들도 있었다. 캐서린은 방어적이고 변덕스러우며 속을 알기 어려운 사람이라 매력적이긴 했지만 사람들의 신뢰를 얻는 데에는 실패했다. 그녀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면 가면을 쓴 사람처럼 행동하곤 했는데 버지니아는 그걸 알아봤다. 버지니아 역시 자신의 여러 자아 사이의 간극을 종종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버지니아 울프와 캐서린 맨스필드의 관계는 밖에서 보는 것과는 달랐다. 둘이 함께 마주 보며 이야기를 나눌 때는 완벽히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지만 떨어져 있을 때는 순식간에 냉랭해졌다. 특히 캐서린은 외국에 나갈 때마다 침묵을 지켰기 때문에 버지니아는 혼란스러워할 수밖에 없었다. 폐결핵을 앓던 캐서린은 요양을 위해 런던과 다른 지역을 자주 오갔는데 런던에 올 때마다 버지니아와의 우정을 되살리고자 애썼다. 버지니아 역시 캐서린이 뛰어난 대화 상대인 걸 알았기에 캐서린을 외면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캐서린은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니까.  


   1918년 겨울이 오자 캐서린은 또 숨어버렸다. 버지니아는 자신들이 말다툼했다고 생각하며 혼란스러워했지만 봄이 오자 캐서린이 다시 다가왔다. 매번 그런 식이었다. 버지니아는 캐서린이 편지를 쓰지 않거나 초대하지 않을 때마다 힘들어했다. 게다가 버지니아 앞에서는 버지니아의 작품들을 칭찬하면서도 등 뒤에서는 그것을 평범하다고 부르는 이중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캐서린은 버지니아를 둘러싼 세계에서 자신이 멸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차츰 알게 되었다. 캐서린의 이런 태도들은 도시에서 성공을 꿈꾸며 하숙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뿌리 없는 무리들 중의 하나로 그녀를 전락시켰다. 


   버지니아 역시 캐서린에 대해 너그럽지 않았다. 1918년에 캐서린이 발표한 [지복]에 관해 일기에 남긴 언급에는 캐서린의 새 작품이 기대에 미치지 못해 그걸 비난할 수 있어서 기뻐하는 듯한 느낌이 손에 잡힐 듯이 생생하다. 1922년 5월에 캐서린이 호손든 상을 받지 못했을 때 기뻐했던 것이나, [가든파티]가 나왔을 때 모질게 평가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버지니아는 캐서린의 성공을 자신이 참을 수 없다는 걸 아주 잘 알았다. 이렇듯 두 사람은 끊임없이 서로를 질투했다. 그렇지만 캐서린은 버지니아에게 글쓰기 외에 다른 종류의 질투도 느꼈다.


“내가 얼마나 버지니아를 질투하는가. 그녀가 쓸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에요. 그녀의 글에는 언제나 온화한 표현의 자유가 있어요. 마치 그녀가 평화스러운 것처럼. 그녀를 가려주는 지붕이 있고, 자신의 소유물이 주변에 있으며, 그녀의 남자가 부를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있고 말이에요.”                                                                  캐서린이 남편에게 보낸 편지. 1919년 11월 30일


    1920년 이른 봄 머리는 버지니아에게 아프고 외로워서 비참해하고 있을 캐서린에게 편지를 써줄 것을 청했다. 버지니아는 길고 재미있고 다정한 편지를 썼지만 답장은 없었다. 그것이 끝이었다. 버지니아는 더 이상 그녀의 침묵을 용서하지 않았다. 캐서린이 1922년 여름에 런던에 돌아왔을 때도 버지니아는 그녀를 보러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캐서린은 1923년 1월 9일에 죽었다. 34살이었다. 버지니아는 그 소식을 듣고 나서야 그녀가 육체적으로 고통받았고 그래서 적의를 품었었다는 걸 깨달았다. 질병과 외로움에 지친 캐서린의 마음 상태를 자신이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것을 알게 되었다. 버지니아는 우울했고 의기소침해졌다. 더 이상 쓰는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생각까지 했다. 반복된 오해 탓에 화해가 미뤄지다가 갑자기 모든 게 끝나버린 셈이었다. 캐서린은 더 이상 아무것도 읽지 못하게 되었다.

 “캐서린은 그것을 읽지 않을 것이다. 캐서린은 더 이상 나의 경쟁자가 아니다.”
 “경쟁자가 없다. 나는 내 직업에서 수탉이다. 그가 우는 소리에 아무도 깨지 않는 외로운 수탉이다.”                                                                                버지니아 울프, 1923년 1월 28일 일기

   

   ‘메아리’가 사라졌다. 경쟁자의 상실은 친구의 상실만큼이나 중요했다. 그러나 캐서린은 친구 혹은 작가나 여자, 요절한 사람으로서만이 아니라 문학적 경쟁자로서도 그녀에게서 떠나지 않고 남아 있었다. 버지니아는 [댈러웨이 부인]의 마지막 문장을 쓰면서 비로소 캐서린을 이겼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녀가 살아 있었다면 그녀는 계속 썼을 것이고 사람들은 내가 더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거야. 그것은 점점 더 명백해졌을 거야.”
                                                               버지니아 울프 , 1924년 10월 17일 일기

    

   버지니아는 자기 인생에 캐서린 같은 사람이 더는 없다는 걸 너무 잘 알았다. 비록 캐서린을 질투하기는 했으나 자신의 글을 제대로 읽어 줄 이 역시 캐서린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도. 그녀는 캐서린을 ‘불쌍한 여인, 내 방식대로 사랑했던 사람’이라고 불렀다. 버지니아울프가 캐서린을 사랑했던 방식은 바로 자신이 쓴 글이 온전히 읽히기를 바란 작가로서의 방식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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