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카이로스를 따라서
모든 성장에는 성장통이 있다. - 니체 -
1장. 카이로스 Καιρός를 따라서
- 세 갈래 길
- 사람들이 가지 않는 길
- 운명은 나의 편, 천군만마를 얻다
- 순풍, 그리고 제하분주
모든 성장에는 성장통이 있다. - 니체 -
성장통 - 카자흐스탄 편
카자흐스탄의 국화는 백합(Lily)이다.
백 개의 껍질이 모여 하나의 알뿌리를 이루는 백합은
140여 종족이 모여 한 나라를 이루고 사는 그 들의 모습과 참 닮았다.
중앙아시아의 거인 카자흐스탄!
내겐 해외 생활 중 겪은 100가지 성장통 중 99가지를 겪은 나라.
돌아서면 그립고 다가서면 가시처럼 따가웠던 곳.
그래서 나는 그곳을 ‘애증(Love and hate)’이라 부른다.
아직 애증의 카자흐스탄에는 나의 꿈, 그 절반이 남아있다.
세 갈래 길
인생, 결국 선택이다.I shall be telling this with a sigh, Somewhere ages and ages hence:
Two roads diverged in a wood, and I, I took the one less traveled by,
And tha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나이가 든 어느 먼 훗날, 아마 그 어딘가에서 탄식하며 이 이야기를 하겠지.
나무 아래에 두 갈래 길이 있었고, 나는 더 적은 사람들이 밟은 길을 택했다고.
그리고 그것이 그 모든 것 - 운명조차 바꾸어 놓았다고...
- 로버트 프로스트, ‘The Road Not Taken’ 중 (작가 번역) -
결혼 전 아내의 활동반경은 굉장히 넓었다. 가까운 중국에서 저 멀리 아프리카까지. 아내는 이십 대 중반 생전 들어 본 적도 없는 서아프리카의 아주 작은 나라 감비아로 봉사활동을 하겠다고 떠났었다. 갑작스러운 행보로 주변 사람들을 적잖이 당혹게 했었는데, 감비아에서 2년 봉사활동을 마치고 귀국해 ‘해외 출국 잠복기’ 중 우연히 나를 만났다.
‘바람의 딸’ 한비야 님의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를 너무 좋아했던 그녀는 호시탐탐 그와 같은 기회를 노리는 사람이었다.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처럼 나에게 발목이 잡혀 두 딸아이를 낳고 날개를 접었지만 그녀는 늘 내가 꿈꾸었던 하늘만큼이나 더 넓은 세상을 동경했었다.
카자흐스탄에서 카페(한식당)를 같이 해보지 않을래?
*Кафе(카페): 현지에서는 중급 수준의 식당을 보통 ‘카페’라고 부른다, 이하 카페
얼마 전 아내의 오랜 친구인 싸샤 (Саша, ‘Alexander’의 러시아식 애칭)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는 카자흐스탄에 사는 한국교포(고려인) 3세인데 나와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지만 아내와는 벌써 십년지기 친구였다. 한동안 연락이 끊겼던 그와는 얼마 전 SNS를 통해 다시 연결되었다는데 그사이 싸샤는 카자흐스탄에서 제법 성공한 사업가로 변모해 있었다. 아내는 그를 아주 정직하고 신뢰할 만한 사람이라고 소개하면서 조심스럽게 카자흐스탄에서의 카페 공동창업 제안 얘기를 꺼냈다.
그것이 이 모든 이야기의 출발점이었고 그 짧은 한 줄의 메시지가 내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왜 하필 이 시기에?
사실 얼마 전부터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곧 다가올 소령 진급 심사를 앞두고 진로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원래 내 군생활 목표는 '20년 군 복무 - 군인연금 수혜 조건'을 채우고 퇴역 때까지 성실히 군 생활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그 확고했던 목표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최근 (육군 항공) 선배들 사이에서 민간항공사 조종사로 이직 붐이 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사람은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전역 후 국내 또는 주로 미국 소재 비행교육원에서 고정익 조종 교육을 재이수한 그들은 파일럿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메이저급 민간항공사로 대부분 채용이 되었다.
나 이번에 00 항공에 부기장으로 채용됐어!
가깝게 지냈던 선배, 동기가 민간항공사 부기장으로 채용됐다는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축하의 메시지와 박수를 보냈지만 솔직히 숨길 수 없는 부러움이 밀려왔다. 최근에는 그 뒤를 따르겠다고 출사표를 던지는 동기들이 더 많이 늘었고 까마득한 후배들까지 줄을 서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가 대세를 이루다 보니 어느새 나도 점점 그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 이 중요한 결정의 시기에 여태 꿈도 꿔보지 않았던 사업 제안이 갑자기 들어왔다. 그것도 해외에서!
해외 이민과 창업. 정말 다시없을 기회일까?
처음에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해외 사업 제안에 아주 당혹스러웠지만 한편으론 마음이 설레고 두근거렸다. 사업. 이민. 나와는 너무도 무관했던 단어들. 그런데 이상하게 생각할수록 마음을 격동케 했다.
사실 이 제안을 받았을 때는 해외여행 경험조차 거의 없을 때였다.
필리핀으로의 신혼여행과 미국 LA로 열흘간의 초청 방문 경험이 전부. 사실 LA도 방문 주목적은 현지 조종사 비행훈련원을 직접 방문해서 비행 교육 비용과 여건을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1억 원이 넘는 현실적 교육비용은 부담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몇 년 더 직장생활을 하며 돈을 모으고 퇴직금을 보태면 교육비용을 마련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감만 남겨두고 왔었다. 다만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언젠가 기회가 있다면 미지의 땅 미국에서 한번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긴 했었다.
인간,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는 갈대
숙고하고 숙고할수록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같은 마음을 종잡을 수 없었다. 독신이었다면 결정이 좀 더 쉬웠겠지만 아무래도 가장이란 무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장으로서 나의 꿈 그리고 가족, 이 둘 사이에서 가장 균형 있고 이상적인 길을 택해야 했다.
총알이 넉넉하다면야 뭐가 문젤까?
일단 한 발 쏴보고 표적에 맞지 않으면 다시 조준해서 쏘면 되겠지만 지금 내 형편은 ‘일발필중 (One shot, One Kill)’ 하지 못할 일이라면 차라리 쏘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마음 하나, 진급, 원한다고 내 맘대로 다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잖아?
사실 진급도 내가 원한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다. 누구나 최선을 다해서 좁은 문을 향해 뛰고 있으니 내일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오죽하면 ‘진급자 발표 날에는 무덤에 잠자던 귀신도 일어나서 본다’라고 할까? 혹 진급에서 계속 누락된다면 결국 다른 일을 찾아야 한다.
마음 둘, 성공적인 이직 - 민간항공사 조종사로의 전환도 마음같이 쉬운 일은 아니다.
고정익 조종사로의 전환 교육 비용은 약 1억 원에 달하고 비행교육 시간과 타임빌딩(최저 비행시간, 항공사 채용 기준) 시간도 1년여 가까이 걸린다. 물론 채용의 보장은 없다. 기회비용을 톡톡히 치러야 하는 선택이다.
그렇다면 이직 성공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0% 아니면 100%! (채용이 되거나 안되거나 둘 중 하나니까.)
사실 지금은 막연한 기대감과 이전에 없던 길을 개척해가야 할 선구자가 아니라는 약간의 안도감만 있을 뿐이다. 다만 주변인들이 그 길을 가고 있기에 나도 열심히 그들을 따라가다 보면 마침내 그 꿈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다. 먼저 이직한 선배와 동료들은 다들 능력 자라서인지 하나같이 메이저 항공사로 채용이 되었지만, 나는 그들보다 늦게 그 과정을 겪어야 하는 상황이니 내게도 그런 ‘운’이 따라 줄지는 미지수다.
마음 셋, 사업,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도전해 보는 게 낫지 않을까?
객관적으로 또 좀 더 멀리 보자면 직업군인이든 민간항공사 조종사든 직장생활의 궁극은 은퇴다.
그럼 은퇴, 그다음엔?
평생직장 생활로 집 한 채 사기 어려운 시대다. 아이들도 키워야 하고 얼마간 여유 자금을 모은들 노후 생활 자금으론 충분하지 않을 터 또 무언 갈 해야 할 것이다. 그건 아마 소규모 자영업 같은 개인 사업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은퇴 시점에는 나이가 적지 않을 테니...
그렇게 꼬리를 물었던 스스로에 던진 질문과 대답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고 있었다.
언젠가 한 번은 해야 할 일이라면,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시작하는 게 낫지 않을까?
인간은 실로 '미래 근시안'이다.
운명을 갈라놓을 세 갈래 길. 그리고 망설여지는 결정.
최대한 목을 내밀어 그 끝을 더듬어 보고 싶지만, 그 모든 길의 끝은 너무도 희미하고 아련하기만 했다.
사람들이 가지 않는 길
“아직 결정 못 했어?”
싸샤는 어떤 방향이든 빨리 결정 내려 주기를 원했고 특별히 강권하진 않았지만 긍정적인 대답을 바라는 그의 기대가 느껴졌다. 아내도 내게 최종 결정은 맡겼지만 은근히 도전해보기를 원하는 눈치였다. 나는 아직 민간항공사로의 이직과 해외 창업 사이에 서 있었다. 감당해야 할 무게와 가능성을 저울질하면서.
Opportunity seldom knocks twice.
기회는 두 번 오지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 최종 결정을 위한 마지막 질문에 도착했다.
나 같은 보통 사람이 해외 공동창업 제의를 받을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될까?
그것도 이미 성공한 사업가로부터...
결국 내 결정은 카자흐스탄으로 향했다. 고심할수록 나와 우리 가족에게 우연인 듯 찾아온 이 갑작스럽고 특별한 제안은 절대 놓쳐서는 안 될 기회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내 생에 두 번 다시없을 ‘기회’라는 확신을 갖게 했다.
남들은 정말 평생 구경도 못 할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는 바보가 되어서야!
내가 선택한 ‘자유’ 사업가의 꿈
마침내 미지의 세상으로의 설레는 이민과 성공적인 창업 그리고 폭넓은 의미의 ‘자유’는 10년이 넘도록 하루 같이 반복되는 '군생활 루틴'속에서 잠자고 있던 심장을 다시 뛰게 하는 새로운 꿈이 되었다.
자유. 자유. 자유!
나는 무의식적으로 사업가 앞에 거듭 ‘자유’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유’라는 단어에 자꾸 설레고 마음이 쏠렸다. 사실 장기복무 직업군인들은 ‘전역’을 곧 ‘자유’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일종의 심각한 착각, 착시현상이지만 나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막연하지만 심장 떨리는 ‘자유’는 지난 10년의 군 생활 동안 가장 동경해왔던 것이기도 했다. 이미 조종사라는 꿈을 이루었기에 그다음은 어떤 사람이 또 무엇이 되는 것보다 ‘자유롭게 사는 것’ 그 자체가 꿈이었으니까.
박수 칠 때 떠나라!
나는 ‘박수 칠 때 떠나라’라는 말을 좋아한다. 좋은 시작을 훌륭한 끝맺음으로 완성하기에 어쩌면 지금이 가장 적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좁은 문, 치열한 진급 경쟁에서 씁쓸히 밀려나기보다 지금 충분히 좋을 때 스스로 잘 마무리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사실 내 생애 가장 뜨겁고 아름다웠던 시절을 불사르듯 최선을 다해 달려온 지난 나의 군 생활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손뼉 쳐 줄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선의의 진급 경쟁자들은 쌍수 들어 '물개 박수'를 쳐 줄 게 분명했다. 너도 살고 나도 사는 그 지혜로운 선택에!
꿈은 현실적이어야 한다
재물 욕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경제적 성공은 세속적이지만 가장 현실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또 아무래도 젊고 열정 넘치는 지금이라면 혹 실패하더라도 툭툭 털고 일어설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이 꿈의 최대 수혜자는 아이들이 되길 바라며
끝으로, 앞서 나열한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두 딸아이 양육의 문제! 아직 너무도 어린 두 딸아이의 나이는 이제 만 세 살 그리고 막 돌이 지난 만한 살이다. 우리에겐 아직 작은 인형 같고 핏덩이 같은 가장 소중한 우리의 ‘미니어처’들이다. 지금으로선 사업이 얼마나 언제쯤 성공적으로 안착할지 알 수도 확신할 수도 없다.
고사리 같은 손을 잡고 더 자주, 더 멀리 함께 걸어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경제적 자유’ 다음에 ‘시간의 자유’가 온다면 물 머금은 콩나물처럼 쑥쑥 자라날 아이들과 함께 더 많이 걷고 싶다. 더 넓은 세상 더 많은 나라를 여행하듯 거닐며 더 많은 '공유한 추억'을 만들고 싶다는 꿈. 가능하면 '지도밖까지 행군' 하고 싶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지도 밖으로...
정말 이 마지막 바람이 이루어진다면, 그 모든 과정도 결과도 다 좋다는 뜻일 것이다.
꿈을 향해 밟는 가속 페달 바로 옆에는 항상 브레이크가 있다.
부모님을 포함한 가족들과 가까운 지인들의 반응은 확실히 부정적일 것이다. 결정을 내림과 동시에 떠오른 그들의 반응은 ‘너, 미쳤구나!’였다.
비록 금수저, 은수저는 아닐지라도 현상 유지만 해도 배곯을 일 없을 ‘강철 수저’ 쯤은 되는 직업군인이라는 든든한 직장을 내려놓겠다면...
헬기 조종사라는 희귀한 라벨도 접어 두겠다면...
듣도 보도 못한 나라 카자흐스탄으로 전격적인 이민과 사업이라곤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이 모든 걸 쏟아부어 카페 창업에 도전하겠다면...
그 비상직적인 결정을 이해해 달라고 한다면...
벌써부터 그들의 일그러진 표정과 만류의 말들이 읽히고 들리는 것 같았다. 환영은커녕 도시락 싸들고 다니며 나를 만류할 것이다.
늘 그렇듯 용기 있는 도전과 꿈을 향한 길에는 항상 주변인들의 ‘진심 어린’ 걱정과 근심이라는 브레이크가 걸리기 마련이다. 사실 그들의 ‘진심 어림’이 문제다. 정말 진심이니까.
사실 이런 ‘미친’ 듯한 선택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지난날 보병 소대장을 마치고, 육군 항공 병과로 전과하려 했을 때도 그랬다. 사실 나는 남들보다 아주 늦게 개과천선하듯 ‘인생 목표’를 발견했다. 오랜 방황을 끝내고, 죽기 살기로 덤벼들어 학군장교로 임관했을 때, 나의 군번은 동기들에 비해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아주 가벼웠다. 그 덕에 보병 병과에서 그 군번만큼만 늘 선두를 유지한다면 장군도 바라볼 수 있겠다는 가끔은 아주 쑥스러운 칭찬도 받았었다. 그런데 돌연 육군 항공 병과로 전과하겠다며 지휘관에게 전과 시험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건의했을 때 나는 얼마나 ‘아름다운(?)’ 격려를 받았는지 모른다. 물론 나는 그것이 나를 아꼈던 선배 장교서의 진심 어린 관심과 사랑이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내 어릴 적 꿈, 하늘을 나는 조종사가 되고자 하는 그 첫걸음에 걸렸던 아주 강력한 브레이크였다. 그 후로 말할 수 없는 여러 고초가 따랐지만 끝내 나는 내 꿈을 찾아 떠났고 마침내 헬기 조종사가 되어 꿈꾸던 하늘을 마음껏 날 수 있게 되었다. 그때 그 브레이크를 견뎌내고 극복하지 못했다면 나는 여전히, 어쩌면 죽을 때까지 하늘을 동경만 하며 살았을 것이다.
내 인생은 나의 것.
한 번뿐인 인생 간절하고 생생한 꿈을 좇아 살지 않을 이유가 없다.
후회 없는 선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는 ‘그들(Dream Breakers)의 고견’이 아니라 ‘나의 꿈’이다.
물론 선택에 대한 책임도 내 것이다.
나는 새로운 꿈에 충분히 설득되어 있었고, 이 과감한 결정에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싸샤에게 전화해줘요. 우리가 카자흐스탄으로 가겠다고!
희망은 있지만 보장은 없는 길
내 주변 사람들이 가지 않는 길
대부분의 사람이 선택하지 않는 길
그래서 타인의 정답지를 커닝하기도 조언받기도 어려운 길
그 미지의 길에
피 끓는 젊음과 태양같이 뜨거운 열정을 ‘올인(All in, 몰방, 沒放)’했다.
나의 전부를 걸었다.
눈을 덮은 긴 앞머리는 나를 마주치는 사람이 나를 쉽게 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며,
뒷머리가 대머리인 이유는 나를 놓쳐 버리면 다시는 나를 붙잡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오, 이방인이여!
그대에게 경고의 교훈을 주기 위해 나는 이곳, 문 앞에 세워졌노라.
나는 모든 것의 정복자 카이로스 곧, 기회다!
Kairos(Καιρός), the all-subduer, the opportunity!
이태리 토리노 박물관, 카이로스(Kairos) 조각상
운명은 나의 편, 천군만마千軍輓馬를 얻다
스탄, 스탄... 카자흐스탄!
생면부지의 그 땅은 한국에서 4,200km나 떨어져 있다는 실제적 거리만큼이나 심적 거리도 멀었다. 사실 처음 카자흐스탄이라는 나라 이름을 들었을 때 지구 상 어디쯤 붙어있는 곳인지도 잘 몰랐다. 세계지도를 펼쳐서 확인하고서야 러시아 바로 아래 동쪽으로 중국을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나라라는 걸 알게 됐다. 중앙아시아 대부분을 차지하는 어마어마하게 영토가 넓은 나라였다. 무려 세계 9위!
그런데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어떻게 이렇게 거대한 나라를 여태껏 모르고 살았지?
사실 지방 극한 시골에서 태어나 일찌감치 직업군인의 길로 들어선 나는 세계지도를 볼 일조차 없었다. 지구본도 언제 마지막으로 보았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이념 체제가 달랐던 이전 사회공산주의 국가들에 대한 이야기는 학교에서 조차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었다. 어린 시절에는 '사회공산주의'라는 그 단어 자체가 입에 담기 무섭고 심지어 불경스럽게 치부되었기에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1980년대에 초등학교를 나는 적극적인 대남 전단 소위 '삐라'의 마지막 세대였다. 어릴 때 학교를 오가는 시골 오솔길과 논바닥에 '삐라'가 심심찮게 발견되었고 한 손 가득 주워 학교에 제출하면 노트나 30cm 자를 포상으로 받았었다. 그러니 당연히 당시 사회공산주의의 구심점이었던 구소련은 교육과 관심에서 괄호 밖일 수밖에 없었다. 다만 러시아는 세계를 움직이는 강대국중 하나이니 자세히는 몰라도 국가명만큼은 익숙했다. 하지만 구소련 70년 동안 러시아가 품고 있었던 국가들, 구소련 붕괴 후 독립한 신생국들에 대해서는 관련 지식이 전무했다. 싸사와의 인연이 없었다면 아마 평생 관심의 '괄호 밖'의 나라들이 었을 것이다.
카자흐스탄을 처음 들어 본건 결혼 직후 처녀시절 아내의 다이내믹한 세계 여행기를 들었을 때였다. 아내가 마치 바람같이 훌쩍 아프리카 감비아로 떠났던 그 여정에 카자흐스탄이 경유지로 포함되어 있었다. 그때 싸샤와 특별한 인연이 되었고 그 이후 서로 오랜 시간 쌓아온 신뢰가 오늘 동업을 이야기할 만큼 가까운 관계에 이르게 했다.
아무튼 생각조차 못했던 극단적이고 급직적인 인생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었다. 생면부지의 미지의 땅 카자흐스탄으로 이민하고 무려 사업까지 시작할 계획을 세우고 있으니... 시쳇말로 아직까진 대박이다.
카자흐스탄,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브리지(Bridge)* 카자흐스탄공화국은 중국, 러시아,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그리고 서쪽으로 카스피해를 국경으로 한다. 주변 나라들과 비교해보면 얼마나 거대한 영토를 가진 나라인지 실감된다.
불쑥불쑥 드는 생각. 동업 괜찮을까?
오로지 파트너 한 사람만 믿고 얼마 안 되지만 그나마 가지고 있는 모든 걸 던지는 게 올바른 선택인가?
아! 누가 인간은 의심의 동물이라 했던가?
'지혜로운 사람'이란 뜻의 생각하는 인류 - 호모 싸피엔스는 그 숙고의 본성을 버리지 못한다. 단지 문제는 너무 지나치게 생각하는 인간이 된 것이다. 이미 결정은 내린 상태였지만, 이 조금은 '위험한 기회(Risky opportunity)'에 나와 가족의 운명이 달려있기에 한동안은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들었다. 일말의 의심이 있어 구두로 맺은 약속을 물릴 수 있다면 아직 아무것도 실행하지 않은 지금이 마지막 기회였기 때문이다.
위험한 동거, 고정관념
걱정이 쉽게 사그라 지지 않았던 이유는 동업과 공동창업에 대한 사회적 통념이 썩 긍정적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사실 동업은 그 말로가 늘 좋지 않다고 들은 적이 있다. 서로 협력하며 성공적으로 사업을 일으키고 오랜 시간 또 세대를 이어가며 번성한 공동창업 사례가 많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대학 학부시절 경영학도로서 기업 성공 사례를 수도 없이 조사했지만 공동창업주의 성공기는 드물었다.
동업이나 공동창업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무엇보다 기업이 잘되면 잘되는 대로 안되면 안 되는 대로 문제가 생길 소지를 항상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살을 맞대고 사는 부부도 의견의 차이가 있고, 때로는 다툴 때가 있는데 다른 사람이야 오죽하랴! 그만큼 서로를 이해하고 마음을 데칼코마니 같이 꼭 맞춘다는 건 마치 어지럽게 펼쳐놓은 퍼즐을 맞추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동업은 그 자체로 '위기'다.
신뢰, 오로지 신뢰!
투자 자본은 동일하게 한다 할지언정 투입하는 각각의 노력의 양은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서로에게 걸었던 기대만큼 부지런히 움직여 주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지? 몇 가지 의문이 들었지만, 이런 의문과 걱정은 싸샤 입장에서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우리는 아직 일로서 서로를 겪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함께 하기로 결정했으니, 이젠 오로지 사업 준비에 집중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직 싸샤와 일면식도 없는 나의 걱정을 간파한 아내가 싸샤에 대한 자신의 신뢰를 거듭 강조했다. 그 말은 일리가 있었다. 결정을 바꾸거나 무르지 않을 것이라면 차라리 그 시간을 온전히 사업 준비에 쏟는 것이 더 현명했다. 일단 힘을 모으기로 한 이상 서로를 신뢰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우리가 이곳에서 준비하고 노력하는 이상으로 그도 그곳에서 최선을 다해 '공동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고 믿어야 했다. 그리고 나는 한치의 의심 없이 그를 믿기로 결정했다.
협업, 소통이 가장 중요
싸샤는 자기 의견을 숨김없이 오로지 '직선'으로 솔직하게 표현했다. 처음에는 마치 ‘돌직구’처럼 직설적인 그의 표현에 당황스러울 때도 많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오히려 그게 훨씬 더 유익하다는 걸 깨닫게 됐다. 상대방의 심리상태, 즉 눈치를 살필 필요가 없으니 탐색을 위한 불필요한 에너지의 낭비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살아온 환경과 문화가 극단적으로 다르기에 표현의 방법은 차이가 많았지만 소통에 막힘이 없다는 건 '형통'이란 대로에 가까이 있다는 걸 의미했다.
환상의 '컬래버레이션'을 위한 전략
생각해보면 동업과 협업에도 매력은 충분히 있다. 상호 간 신뢰와 원만한 소통을 전제로 한다면 어쩌면 가장 이상적인 성공전략이 될 것이다. 각자의 재능을 보태 혼자서는 불가능할 하나의 작품을 만드는 것 또 서로가 잘하는 것을 구분 지어 함께 또 각자가 전략적으로 사업을 준비하는 것 그것이 협업의 가장 큰 장점이다. 그렇게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가면서 이른 시일 내에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가 구상한 윈-윈 전략이었다.
사업 무경험. 요식업 무경험. 해외 생활 무경험. 깨끗해도 너무 깨끗한 백그라운드
어쩌면 떠나기로 결정한 것은 이후의 준비과정에 비하면 훨씬 쉬웠다. 그저 마음만 먹으면 되는 것이었으니.
마치 백지상태 같은 지금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모든 게 뜬구름 잡는 것 같이 막막하기만 했다.
“일단, 카자흐스탄 현지 준비는 내가 할 테니 주방 준비에만 신경 써.”
카페 공동창업에서 우리는 한식과 몇 가지 현지 음식을 만들어낼 주방 전체를 맞았고, 사업허가와 제반 법적 조치들 그리고 사업장 내외부 공사 등은 현지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싸샤가 맡기로 했다. 주방은 요식업의 핵심이니 우리의 역할이 너무도 중요했다. 그만큼 부담이 컸지만 애초에 싸샤가 동업을 제의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으니 우리는 최선 그 이상의 것을 준비해야 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우리는 요식업 경험이 없다는 것이었다.
카자흐스탄에 거주하고 있는 싸샤와는 매일 인터넷으로 화상회의를 했는데, 그도 요식업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자주 아이디어의 한계에 봉착했다. 우리가 회의 중 가장 많이 사용했던 말은 ‘아마 그렇겠지?’였다. 사실 ‘최신 한국 스타일 카페’라는 외형적인 목표 외에는 모든 게 불확실했다. 아직 매장으로 사용할 장소도 정해지지 않았다. 장소가 정해지지 않았으니 그 규모에 맞추어 준비해야 할 제반 주방 물품과 인테리어, 익스테리어 재료들도 견적을 낼 수 없었다. 카페에서 제공할 메뉴도, 그 메뉴를 위해 필요한 여러 집기류와 용기, 용품들까지 온통 물음표 투성이었다. 그저 우리 집 작은 주방을 참고해 대량 조리에 적합한 ‘업소용' 주방을 상상해 볼 뿐이었다.
그제 서야 본격적으로 부담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정말, 너무 겁 없이 뛰어들었다.
요식업, 맨 마지막에 하는 장사
그래서 음식 장사는 맨 마지막에 하는 거야!
우리의 ‘좌충우돌 준비 열전’을 한동안 지켜보셨던 장모님이 너무 답답하신 듯 입을 여셨다. 말수가 적으신 장모님은 웬만해선 참견하시는 성품이 아니신데 오로지 열정밖에 없는 우리가 심히 걱정되시는 모양이었다.
“맞아! 그러고 보니 엄마 예전에 함바(공사 현장 현지 임시 식당 - 일본어 잔재) 했었잖아!”
아내는 그동안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장모님이 공사 현장 임시 식당을 운영했었던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막내딸이자 장모님과 단짝인 아내는 갑자기 쌍꺼풀 없는 눈을 크고 동그랗게 떠 장모님을 바라보며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엄마, 우리랑 같이 갈래요? 애들도 좀 봐주고, 주방일도 좀 도와주시고요. 그러면 너무 좋을 것 같은데... 잘되면 사업장 하나 드릴게요!”
사실 아내는 우리가 카자흐스탄으로 떠나면 몇 해 전 홀로 되신 장모님이 외로우실까 걱정을 많이 했었다. 더욱이 우리도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하게 되면 어린아이들을 누가 어떻게 돌볼 것인지 고민이 많던 차였다. 아내의 제안대로 정말 장모님이 함께 가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상황이었다.
“엄마야! 내가 거길 어떻게 가? 말도 안 통하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릴!”
장모님은 일흔을 바라보고 계신 연세였다. 신앙심 깊고, 말수가 적고, 인심이 후하신 장모님은 동네에서 인기가 많으셨고 그만큼 맡고 계신 일도 많으셨다. 그런데 갑자기 막내딸 내외가 외국으로 같이 떠나자고 하니 깜짝 놀라 정색하셨다. 다만 같이 가자고 끊임없이 조르며 몸을 비비는 아내의 애교에 한 번 기도는 해 보시겠다며 가능성의 문은 열어 두셨다.
내리사랑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다.
결국 장모님은 우리와 함께하시기로 하셨다. 두 손녀, 특히 아직 기저귀도 못 뗀 막내에 대한 걱정과 그동안 맞벌이하고 있던 우리 부부 대신 지금껏 길러주신 큰딸이 너무 눈에 밟히신 탓이었다. 안락한 보금자리를 떠나 인생 느지막한 연세에 모진 타향살이를 하게 해 드려 너무 송구했다. 하지만 장모님의 용감한 결정 덕분에 우리에겐 가장 강력한 지원군이 생겼다.
장모님의 극적인 합류.
그렇게 우리는 다섯이 되었다.
‘천군만마千軍萬馬’라는 표현으론 부족했다.
마치 ‘만군만마萬軍萬馬’를 얻은 것 같았다.
Fortune favors the bold!
행운은 용감한 자의 것이다!
- 영어 속담 -
순풍, 그리고 제하분주濟河焚舟
비자는?
사업과 이민을 동시에 준비하고 있는 우리에게 또 하나의 최고 관심사는 비자였다. 합법적으로 장기 체류하려면 반드시 그에 합당한 비자를 발급받아야 하는데 유효기간이 길면 길수록 좋았다. 싸샤가 현지 한국 대사관과 카자흐스탄 이민국을 통해 취득 가능한 장기비자를 알아봐 주겠다고 했는데 며칠째 소식이 없어 조금 답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카자흐스탄으로 보낼 물품 컨테이너를 분주히 채우고 있는데 싸샤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아주 좋은 소식이야. 그린카드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현지에서 소위 ‘그린카드’라고 불리는 ‘거주권(вид на жительство-비드 나 쥐쨀스트보)’을 받을 수 있다는 소식이었다. 영주권 제도가 따로 없는 카자흐스탄은 사업목적이나 다른 이유로 장기체류를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승인해주는 거주권 제도가 있는데 사실상 영주권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별다른 조건 없이 필요한 서류만 잘 갖추면 바로 거주권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정말 굿뉴스였다. 먼 항해를 준비하는 우리에게 어서 가라고 순풍이 불어주는 것 같았다.
다만 거주권 신청을 위해 한국에서 미리 준비해 가야 할 서류들이 많았다. 모든 서류는 우리나라 외교부에서 아포스티유를 받아야만 했다. 반드시 아포스티유를 받아가야 외국에서 법적 효력을 인정받을 수 있어 지역 관공서와 서울 외교센터를 몇 번이나 들락날락했는지 모른다. 당시에는 ‘가족관계 증명서’ 같이 한글로만 발급되는 공문서가 있었는데 그런 서류들이 가장 문제였다. 공인 번역사와 법무사를 통해 영문으로 또 일부 서류는 러시아어로 번역 공증하고 다시 외교부에서 아포스티유를 받아야 했다. 국제 표준 공문서 서식과 맞지 않아 서류 준비에 발생했던 큰 불편함이었다. 이 일에만도 시간과 비용이 적잖이 들어갔다.
무엇보다 건강해야 해. 안 그럼 말짱 도루묵이야!
우리에겐 해외 이민 경험에 대해 직접 조언받을 수 있는 지인이 딱 한 사람밖에 없었다. 그것도 구소련 국가와는 색깔이 전혀 다른 미국 이민자. 그는 먼저 축하와 더불어 걱정의 목소리를 보탰다. 당신이 처음 미국으로 이민 갔을 때 고행했던 기억이 떠오른다면서...
이민 1세대는 무조건 고생하는 거 알지?
그곳과 카자흐스탄 상황은 많이 다르겠지만, 해외 생활 경험이 전혀 없는 우리에겐 일반적인 조언조차 도움이 많이 되었다.
첫째도 건강. 둘째도 건강!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건 건강이라고 했다. 미국은 우리나라처럼 국가 의료보험제도가 발달해 있지 않아 아프면 병원비가 아주 많이 드니 꼭 건강을 챙겨야 한다고 했는데, 반대로 의료 후진국이라면 무엇보다 의료 수준이 낮아 문제가 되지는 않을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생각해보니 정말 일리 있는 얘기였다. 돈으로 해결할 수 없을게 건강이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말은 가장 보편적인 진리니까...
지금은 다들 건강하지만 그곳에서도 건강해야만 한다. 건강은 이제 우리에겐 '의무'가 된 느낌이었다. 물론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또 건강이지만... 무엇보다 이제 유년기를 지내고 있는 아이들이 걱정됐다. 지난 몇 년간 두 아이를 키우면서 급성 고열 감기와 바이러스로 새벽에 몇 번이나 응급실로 비상 출동했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어린아이의 숨겨진 혈관을 찾지 못해 몇 번이나 찌르는 바늘에 눈을 질끈 감고 아이를 붙잡고 있어야 했던 기억은 언제고 가슴을 철렁 이게 한다.
아, 그러고 보니 애들 예방접종은 그곳에서 맞힐 수 있으려나?
싸샤는 카자흐스탄이 이제 막 1만 달러 정도의 개인소득 국가로 올라선 나라라 의료시설이나 기술이 우리나라에 비할 바가 못 된다고 했다. 특히, 국가 질병 관리 체계가 다르다 보니 우리나라에서는 필수인 일본뇌염 같은 일부 예방접종은 아예 백신 자체를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그의 조언은 이랬다.
“맞힐 수 있는 예방접종은 다 맞히고 오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아이들은 지역 보건소를 방문해 예방접종을 마쳤는데 돌이 막 지난 두 살 배기 둘째는 아직 남아 있는 예방접종 빈칸이 너무 많았다. 몇 년 뒤나 한국에 들어올 수 있을 텐데... 그때까지만 아프지 않고 잘 지나가기만을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치과에서 아직 아프지도 않은 사랑니를 뺐다. 몇 달 전 조금씩 아리던 사랑니 하나를 뺄 때도 고생했지만 멀쩡한 녀석을 일부러 건드린 이번에는 정말 턱이 다 내려앉는 줄 알았다.
그렇게 우리는 몸과 마음이 카자흐스탄에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보통사람, 감격스러운 꿈의 잉태
우리의 거친 꿈을 이루어줄 아주 작은 것 - 숟가락 하나부터 생전 처음 사본 업소용 대형 냉장고에 이르기까지 수개월에 이르는 준비 끝에 마침내 어느 햇살 좋은 날 포워딩 작업을 마치고 컨테이너 문을 닫았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뿌듯하고 또 울컥했다. 마치 컨테이너가 자식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왜인지... 아마도 한 없이 쏟아부은 정성 때문일 것이다.
아내와 둘이서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하나 세심하게 준비했던 모든 과정은 엄청난 체력 소모전이었다. 컨테이너는 정말 채워도 채워도 끝이 없었다. 혹시 모르니 하는 아쉬움에 하나도 더 가져가라고 빈 공간 하나 없이 컨테이너를 꽉 채웠다. 무엇이든 구할 수 있고 더없이 풍요로운 한국을 떠나야 하는 자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40ft 컨테이너의 공간이 그렇게 넓은 건지도 처음 알게 되었다. 그 넓은 공간을 다 채우고 두껍고 무거운 양쪽 철문을 닫고 봉인(씰) 처리할 때, 그 오묘한 느낌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마치 그것은 '위대한 꿈의 잉태'라고 부를만한 아주 보통사람의 용기 있는 또 감격스러운 첫걸음이었다. 이 컨테이너가 우리보다 앞서 카자흐스탄에 도착해서 우리를 맞을 것이고, 이 것이 씨앗이 되어 열매가 맺힐 테니까...
함부로 꾼 꿈의 대가, 가슴 시린 상처
사실 생에 첫 컨테이너 작업은 또 다른 의미에서 나와 아내에게 생애 가장 가슴 아프고 아찔한 순간으로 남았다. 한날 컨테이너를 준비하고 있을 때, 그날따라 우리를 따라나섰던 첫째가 작업장 주변에 있던 칼같이 날카로운 샌드위치 패널 모서리에 왼쪽 뺨을 깊게 베인 사건이 있었다. 너무도 길고 깊게 패어 피부가 벌어져 뼈가 드러났다. 너무도 큰 상처와 거기서 멈춤 없이 흘러내리는 피를 보면서 나와 아내는 생애 처음으로 숨을 쉬지 못하는 고통을 맛보았다. 정말 그게 나였으면 하고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너무도 미안하고 아픈 마음. 부모의 마음...
조그만 더 상처가 깊었으면, 왼쪽 뺨은 평생 웃지 못했을 겁니다.
조그만 더 상처가 깊었으면 평생 제대로 웃지 못했을 거라는 의사의 말에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지금도 생생한 그 아픔의 순간은 아이의 얼굴에 남아 있는 흉터를 볼 때마다 심장을 철렁하게 했다. 매일 거즈를 떼고 독기 오른 듯 까실한 실밥에 닿으면 아플까 봐 조심스레 상처를 소독해 주면서 독하게 다짐을 했다.
아빠가... 너의 아픈 상처를 절대 헛되지 않게 할게...
편도 항공권을 출력하며
편도로 예매한 카자흐스탄행 항공권을 출력해서 서류철에 끼우니 이제 정말 떠난다는 것이 실감 났다. ‘편도’라는 의미는 돌아 옮을 기약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막상 떠나려니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만큼이나 정든 곳을 떠난다는 섭섭한 마음이 교차했다. 아마 한국이 또 지금 내 자리와 내 모습이 싫어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 더 그런 것 같았다. 문득 창 너머 석양을 보다가 군복 입고 거수경례했던 노을에 어린 마지막 국기 강하식이 떠올랐다. 정말 많이 그리울 것 같았다.
마지막 여행. 그 바다 돌아옴 없을
이제 한동안 어쩌면 몇 년을 뵙지 못할 부모님, 가족들과 마지막 작별의 시간을 보내고 경기도 포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한국에서의 마지막 가족 여행으로 계획했다.
“바다가 좋겠지?”
“무조건, 바다로!”
우리는 동해, 남해, 서해 해안을 따라 무작정 해안 길을 달렸다. 그저 바다를 따라 달렸다. 아쉽게도 내륙 국가인 카자흐스탄에는 바다가 없다. 늘 곁에 있었지만 충분히 누리지 못했던 무척 그리워질 바다였다.
여보, 저 풍경 좀 봐. 너무 아름답다.
달리고 달리다 붉은 노을이 마지막 순간을 고하는 서해안 어느 해안절벽 길에서 잠시 멈추어 섰다.
흩어 뿌려둔 것 같은 섬들 사이 너울지는 파도에 그 잔잔히 일렁이는 바다를 그러데이션 하듯 붉게 물들인 곳.
이 땅에 삼십 년을 넘게 살면서 내 조국에 이런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는 곳이 이토록 많다는 걸 몰랐다는 게 너무 아쉬웠다.
지금껏 너무 앞만 보고 바쁘게 달려온 탓이겠지?
못내 아쉬운 마지막 석양의 순간까지 말없이 그 자리에 서서 바라보았다. 노을 풍경 사이사이 크고 작은 배들이 항구로 돌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해 질 녘 집으로 돌아오는 배와 사람들. 그 풍경을...
아내가 살며시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언젠가 우리도 저 배들처럼 돌아오겠죠?”
“그럼. 언젠가는... 비록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다만 오늘 타고 가는 배는 아닐 것이다.
편도로만 계획한 첫 항해가 끝나면 우리가 타고 간 배는 그곳에 태워질 테니까...
인생은 절대 왕복 티켓을 발행하지 않는다. - R. 롤랑 -
우리는 매 순간을 ‘살 (Alive)’ 아야 한다.
단 한 번뿐인 단편 인생.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시간은 절대 돌아옴이 없기 때문에...
마지막 여행. 꿈만큼이나 풋풋했던 때
한 장의 사진에 참 많은 것들이 담겼다.
나의 턱수염은 군 생활 동안 늘 동경해 왔던 ‘자유’의 상징이었고,
큰딸의 얼굴에 남은 가슴 아린 상처는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해선 안 될 우리 꿈의 ‘가치’였다.
지금껏 우리는 행복했지만 새로운 꿈과 희망이 있기에 더 행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