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불이 깜빡일 땐 뛰어가겠어요

그곳이 꽃길이 아닐지라도

by 이주희


이사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도시가스 전출·전입 예약만 해놓고 나머지는 뭘 해야 할지 멍 했다. 가장 힘든 대출 부분을 해결하느라 기진맥진한 탓도 있었으리라. 이삿짐 업체와 적은 계약서가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았다. 사장님께 사진을 찍어 보내달라고 하는 게 현명한지, 짐짓 모르는 척하고 그 날 필요한 부분만 말씀드리는 게 나을지도 감이 서지 않았다.

이렇게 마음이 찝찝한데도 불구하고 아침부터 수첩을 들고 PC방에 갔다. 집에 컴퓨터도 없고 노트북도 없는 나는 PC방에서 워드 작업을 한다. 정해진 시간 동안 쫓기듯 쓰는 게 나름 효과가 있었다. 푹신한 의자와 음식을 시키면 자리로 갖다주는 서비스도 괜찮았다. 가끔 여기저기서 게임에 몰두한 사람들이 내뱉는 욕이 문제라면 문제랄까.

오후에는 산책 겸 걸어서 집이랑 가까운 다른 PC방으로 향했다. 기온이 꽤 높아서 봄 같았다. 걷다 보니 아기띠를 한 아빠와 유모차를 미는 엄마가 보였다. 그런 풍경은 소송을 시작한 뒤로 볼 때마다 늘 불편했다.

내 브런치 주소를 선생님들만 가입 가능한 카페에 알려드렸는데 바보처럼 맨 첫 글을 다듬기 전 습작 상태로 올려놓은 걸 오늘 낮에서야 발견했다. 하도 많이 읽었던 터라 자세히 안읽고 그냥 업로드했던 게 문제였다. 첫 글로 그 글을 읽어달라고 댓글도 달았는데, 찾아준 선생님들께 죄송했다. 난 왜 이렇게 늘 실수 연발인걸까?

저쪽 집 보증금도 그랬다. 설에 내려갔을 때 아빠가 자꾸 묻지 않았더라면 아마 별 생각 없이 이삿날 주민등록을 새집으로 바로 옮겼을 것이다. 보증금이 법원에 공탁되었는지 확인도 안 한 채로.

이렇게 옆에서 체크를 해 주어야 뭐가 바로 되는 듯하여 주위 사람에게 미안하고 나 자신에게 답답했다.


그 첫 글을 수정해서 그동안 적은 글 모음에 PDF 파일로 변환해 넣었다. 실수를 알고 발송 취소를 했던 출간 제안서를 다시 한 출판사 이메일로 보냈다.

2000원을 주고 산 비회원의 1시간을 10여 분 남긴 채 컴퓨터를 껐다. 밖은 해가 져 공기가 아까보다 쌀쌀했다. 그래도 걷기에 좋은 날씨였다. 이렇게 열심히 일을 하고 나서 걸어오는 길에 남편과 같이 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은 발렌타인데이기도 했다. ‘걷는다’는 이미지는 신혼 때 함께 반포한강공원을 달리던 기억으로 옮겨갔다. 봄에서 여름 사이, 달리던 길 양 옆으로 들꽃이 제법 키가 크게 분홍 노랑으로 펴 한 발짝 한 발짝 갈 때마다 향기가 나는듯했다. 하늘은 구름을 빼면 오렌지색 물감을 연하게 흩뿌려놓은 색이었다. 저만치 이제 넘어가려는 따스한 해를 마주하고 달리며 이 순간을 VR로 만들어 영원히 간직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잊는다 해도, 이 순간만큼은 기억하고 싶어’라고 바랬던 것 같다.

집을 나서기 전, 아이들이 사무치게 보고 싶었다. 설 연휴는 어떻게 보냈을지도 궁금했다. 남편과 시어머니에게 각각 영상통화를 어렵게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남편을 미워하기보다 그때의 아름다웠던 장면을 되돌려보는 데만 애쓰기로 했다.

저쪽 신호등에서 초록불이 깜빡였다. ‘다음번 기다리지 뭐’ 싶어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그다음 신호등도 우연히 초록불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기회가 왔을 때 뛰어가야지!’

채 다 지나갈 수 있을지 없을지도 알 수 없었지만, 이제 다시 두 발로 세상 끝까지 뛰어갈 준비가 되었노라고 마음속으로 외쳐보았다. 그 외침을 아무도 듣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땅을 박차고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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