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리어 대신 인생을 쌓아가는 중입니다

이력서의 제목을 바꾸며

by 유영

나의 역사 속 한 장에,
심지어 부모님의 답변까지 나란히 새겨져 남는,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질문.

'장래희망'

모든 아이들의 장래희망은 '단어'로 기록된다.
수십만 개 희망의 표를 몇 개의 단어가 채운다.


부모님의 희망까지 나란히 남아야 하는 이유는 여전히 궁금하지만, 어른이 바라는 내 아이의 장래는 더욱더 적은 수의 단어로 압축된다.




그래야만 하는 줄 알았다.
직업이 나를 설명하고, 내가 직업이고, 직업이 내가 되는.

꿈과 희망, 그리고 미래가 모두 그 한 단어에 매달려 있어 보였다.

단 하나의 꿈을 찾지 못해 여기저기 방황했던 나는, 얼떨결에 생긴 직업이, 방심하면 날아갈까 봐, 양손으로 꼬옥 붙잡았다.

최선을 다했다.

재미도, 보람도 있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나도 모르게 쌓여온 권태가, 폭발하는 건 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큰 결심을 하게 된다.


모든 걸 새로 시작하자.

나를 받치던 커다란 기둥을 내 손으로 뽑다니.

삶이 무너지지 않을까 려웠다.




삶은 그렇게 쉽게 무너지는 게 아니었다.


그게 내 전부가 아니었다.
나는 삶을 위해 용기를 냈다.

내 꿈은 더 이상 직업으로 압축되지 않는다.


어깨에 얹어둔 짐을 내려놓자, 아주 오래전부터 묻혀있던 꿈이 살짝 떠올라 반짝였다.

피아노를 치고, 책을 읽고, 일기를 쓰고 싶어.

이직을 위해 준비하며, 새롭게 즐거움을 느꼈다.
오랜만에 다른 공부를 하니 재미있었고, 지칠 때마다 나갔던 산책길이 행복했다. 반짝이는 햇살과 하늘거리는 초록 잎사귀. 무엇하나 소중하지 않은 게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이직에 성공했다. 모든 게 처음이었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 처음 맡아보는 공간의 향, 그리고 처음 해보는 일.
'처음'에는 두려우면서도 동시에 두근거리게 만드는 힘이 있다.


나는 여러 개의 처음을 지나며 조금 더 자랐다.




새로운 곳에서는 나의 이전 경력이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간 나를 먹여 살려주던 이력서는 더 이상 쓸모없는 종이 조각이 되어 휘날렸다.

하지만 내게는 소중해 고이 접어 품에 넣었다.
얇은 종이 위 한 줄 한 줄에는 지나 온 까마득한 시간과, 많은 이야기가 있다.

땀과 눈물, 웃음과 기쁨이 꾹꾹 눌러 담겨있다. 그래서 버릴 수는 없다.

다만 제목을 바.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가'


과거의 시간이 있기에 나는 조금씩 뿌리내릴 수 있었고, 그 뿌리는 더 이상 한 곳을 향하지 않는다.
앞으로 나의 이력서에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새겨질 거야.


회사명, 입사일, 퇴사일, 재직 기간의 줄 위에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서,

어떻게 걸어왔는지,

성공도 실패도 지나 그 속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나의 이야기를 조금씩 적으며 나아가 보려 한다.

피아노를 시작했다.
책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수영을 시작했다.
그리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커리어 대신, 인생을 쌓가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