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단지 글을 쓸 때만 존재한다

* 나는 단지 글을 쓸 때만 존재한다

"나는 그저 다른 무엇이 아닌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 훨씬 중요한 일이라고 간단하게 그리고 단조롭게 중얼거릴 뿐입니다."

버지니아 울프

" I find my self saying briefly and prosaically that it is much more important to be oneself than anything else."


책상 앞에 오래된 달력이 있다.

글 쓰는 여자들에 대한 사진과 그들의 짧은 말이 적힌 달력이다. 날짜도 맞지 않는 해묵은 달력을 버리지 못하고 노트북 바로 앞에 두는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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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드 보부아르 ( 1908.1.9. ~ 1986.4.14.)

“ 나는 대작가가 아니다. 대작가가 되고 싶은 생각도 없다. 다만 내 인생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다른 사람들에게 솔직히 전해주는 데서 존재 가치를 두고 싶다.”

잉에보르크 바흐만 ( 1926.6.25.~1973.10.17.)

“나는 글을 쓸 때만 존재한다. 글을 쓰지 않는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글을 쓰지 않을 때면 나 자신이 몹시 생소하게 느껴진다. 이상한 존재방식이다. 반사회적이고 고독하며 지긋지긋한 일이다. ”

마르크리트 뒤라스 (1914.4.4. ~1996.3.3.)

“작가는 작품의 소재를 종이에 옮기는 다리 같은 역할을 할 뿐이다.”



12월에서 시작하여 이듬해 12월로 끝나는 탁상달력. 시몬 드 보부아르에서 시작하여 마르그리트 뒤라스로 끝난다. 쓰는 것에 대한 그들의 짧은 단상이 적혀있다.

“나는 글을 쓸 때만 존재한다. 글을 쓰지 않는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글을 쓰지 않을 때면 나 몹시 생소하게 느껴진다. 이상한 존재방식이다. 반사회적이고 고독하며 지긋지긋한 일이다. ”

잉에 보르크 바흐만은 글을 쓸 때만 자신이 존재한다고 단언한다.

반 사회적이고 자폐적이며 지긋지긋한 일을 반복하는 이상한 존재방식이라고..

튼튼한 책상과 타자기 외에는 필요한 게 없다는 애거사 크리스티.

이들 중 대부분은 고인이 된 지 오래다. 그럼에도 그들이 남긴 작품을 통해 우리는 여전히 살아있는 그들을 만난다. 활자 속에서. 활자 사이의 침묵 속에서. 활자와 활자 사이의 간격 속에서....


햇살이 창을 통해 들어온다. 나도 그들처럼 튼튼한 책상과 타자기. 타자기 대신 노트북 앞에 앉아있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말처럼 (이미 그녀는 대작가임에도 불구하고 대작가가 되고 싶지 않다고 말한) 나는 당연히 대작가가 아니며, 대작가가 될 능력도 자질도 부족하거니와 열광하는 마니아들도 없다.

그럼에도 왜 자판을 두들기는 것일까. 고독하고 내면으로 들어가는 작업을 자꾸 반복하려는 것일까. 내면에서 꺼낼 게 무엇이 있다고 자꾸만 아웃 풋 신호를 보내는 것일까.


오래전 기억이 떠오른다. 교실 뒤에 내 글이 붙어있던 날. 그렇게 글을 잘 쓰는 아이도 아니었는데 무언가를 거침없이 적었던 빨간 원고지가 교실 뒤 우리들의 솜씨 코너에서 펄럭이던 그날.

그때부터였을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쓴 글을 누군가 최초로 인정해준 그날. 원고지 위로 오후의 햇살이 내려앉던 그날. 처음으로 활자화된 글자가 가슴에 들어와 박혔다.

아버지는 방학 때면 학생들이 쓴 원고들을 한 뭉치씩 가져오셨다. 이른바 학교에서 글 좀 잘 쓴다는 중학생, 고등학생들의 글.... 수북이 쌓인 원고 뭉치. 어린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읽고 또 읽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글은 러시아 문학을 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힌 학 학생의 글이다. 자작나무 숲과 러시아 문학에 빠져있던 익명의 그 학생을 생각했다. 중학생인데 그런 구체적 포부를 갖고 있다는 게 어린 내 눈에도 신기했던 기억이 난다.


글을 쓰는 이들은 넘친다. 누구든 작가가 될 수 있다고 부추긴다... 글쓰기 강좌도 많고 공모전도 많고 자비 출판도 많다. 사람들은 왜 글을 쓰려는 것일까.

사람의 말투처럼 글을 쓰는 이에게도 글투라는 게 있다. 대중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내 글투를 바꾸고 싶지는 않다. 누군가를 의식하고 글을 쓰면 마음이 불편해졌다. 의식하지 않고 내 안에서 솟아 나오는 채로 그냥 쓰려한다.

왜 쓰는지를 묻는다면 특별하거나 어마어마한 대답을 할 수 없다. 어떤 이는 글을 쓰는 일이 목숨과도 바꿀 정도로 소중한 것이라고도 말한다. 존재 이유라고도...

그러나 나는 “그냥 쓴다” 혹은 “써야 하기 때문이다.”가 나의 대답일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내 안의 억눌린 목소리를 끄집어내기 위해서.”라고.

사람들은 누구나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 글을 쓰는 이들도 또한 글을 통해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품는다. 글이란 것은 자신의 노트북이나 일기장을 벗어나는 순간... 더 이상은 오롯이 나의 것이 아니니까. 솔직히 말하면 내 안에도 인정받고 싶은 욕구, 혹은 누군가의 눈에 띄어서 어떤 기회를 포착하고 싶은 욕구가 존재한다. 그런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 또한 거짓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어느 경우든 글을 써서 좋은 기회를 얻는 일은 낙타 바늘구멍 들어가기 만큼 어렵다.

몇 년도에 무슨 무슨 상을 받았으니 올해는 더 좋은 상을 받아야겠다고 응모해도 더 높은 상은커녕 수상 후보권에도 들지 못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에세이라는 장르가 기회가 많은 것 같지만 에세이이기 때문에 더더욱 기회가 희소하다. 시와 소설에 비해 수상의 기회도 많지 않고 게다가 에세이를 쓰려는 이들은 해마다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니까.

참신한 글을 쓰는 이들, 촉이 발달한 혹은 재능이 뛰어난 이들, 연어처럼 튀어 오르는 감각을 지닌 이들도 많다. 그들 안에서 자꾸만 가장자리로 밀려나는 것 같은 두려움이 들 때도 있다. 성장하지 못하는 글쓰기란 결국 죽은 글을 쓰는 셈이니까. 자기 안의 것들을 긁어내어 실컷 우려먹다가 더 이상 쓸거리가 없으면 식상하고 진부한 글을 쓰게 될 테니까.

어찌 되었건 탁상 위 달력 속 여인들. 흑백 사진 속 그녀들을 바라보며 나는 오늘도 쓰고 있다. 이미 한참 오래 전의 달력. 지나간 숫자, 어떤 요일도 들어맞지 않는 그 달력을 보며 나는 무언가를 쓰고 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기만족이고 자기 배설에 불과할지라도...

그녀들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본다./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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