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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억한다. 지배적이고 당혹스러워서 도리어 아름다운

<빨강 수집가의 시간> 탄생에 부치는 글 

<빨강 수집가의 시간> 려원 산문집   

       

  나는 기억한다. 지배적이고 당혹스러워서 도리어 아름다운 빨강의 흔적을.. 너무나 열정적이어서 공격적인, 너무나 에로틱해서 치명적인, 너무나 거룩해서 부끄러운, 너무나 뜨거워서 차가운,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비참한 빨강들이 만들어놓은 수많은 생의 풍경들을 기억한다.     

 창가에 서서 놓쳐버린 빨강과 아직 오지 않은 빨강 사이 여전히, 내 안에 존재하는 빨강을 생각한다. 아직 온전히 물들지 않은 빨강을 기억하는 일, 결핍, 허기를 세상의 빨강으로 채우는 일, 그리하여 나를 빨강으로 타오르게 하는 일.     

그러므로 그래서 아직 빨강이 아닌 내가

그러므로 그래서 온전한 빨강이 되는 일.

그러므로 그래서 이미 지나간 시간과 지금이라는 시간과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빨강으로 채우고 빨강으로 기억하는 일...

두 번째 산문집 < 빨강 수집가의 시간> 이 기쁘게도 크리스마스이브인 12월 24일 세상에 태어나 12.25일  매서운 겨울바람을 헤치고... 12월 26일 내게로 왔다. 마침내..

올 초부터 ‘빨강’에 매달려 몸부림치던 작업이 비로소 올 해가 가기 전 마무리 되었다. 첫 산문집 <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을 잉태하던 순간처럼... 두 번째라고 해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처음도 어렵지만 ‘처음 다음의 처음’(내게는 두 번째라거나 세 번째라거나... 백 번째라는 개념은 무의미하다. 언제나 ‘처음 다음의 처음’ 일뿐이나까)     

‘첫’이라는 설렘은 여전히 남아있다. 다만

‘첫’의 설렘에 어떤 책임감 같은 것이 더 추가되었다고 해야 할까?

책의 어미가 된 책임감은 어쩌면 설렘보다 더 큰 무게로 다가온다. 부족한 어미의 손끝을 통해 세상에 태어난 활자화된 생명. 그래도 기뻐하고 축하할 일이다.          

      


< 작가의 말 >     

나는 빨강이어서 행복하다. 나는 뜨겁고 강하다. 나를 보라. 산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를 보라. 본다는 것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사방에 있다.

                                                               오르한 파무크 『내 이름은 빨강』           

  인류 역사는 색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색은 생존 수단이기도 했고 미학의 기원이기도 했습니다. 태고의 사람들이 자신의 몸에 색을 칠한다는 것은 장식과 보호, 위장 혹은 권위의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선사시대 예술과 장식에서 빨강이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히 큰데 '아담(A-dam)'의 히브리어 기원은 ‘빨강’이란 뜻이며 ‘피(blood)라는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빨강은 신의 절대적 권능과 신성이면서 악마적 광기, 관능, 유혹, 금기, 혁명의 상징,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의 기호이기도 하였습니다. 

  저마다의 인생에는 그 시기에 맞는 색들이 존재합니다. 어떤 시기에는 여러 가지 색이 혼재하기도 하였습니다. 새하얀 배내옷을 입은 아기였던 우리는 빨강, 연두, 노랑, 주황, 파랑 등의 시간을 거쳐 회색과 검정 혹은 다시 하얀 시간으로 되돌아갑니다. 당신의 색은 어떤 색인가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인생 수업』에서 ’가장 큰 상실은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우리 안에서 어떤 것이 죽어버리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내 안에서 죽어버린 빨강, 제대로 태워보지 못한 빨강, 흔적으로만 남은 빨강, 끝내 꺼내보지도 못한 빨강을 생각합니다. 

  어떤 시간은 빨강으로 타오르던 시간이었고 또 어떤 시간은 빨강을 잃어버린 시간이었습니다. 어떤 시간은 집요한 빨강을 피해 달아나던 시간이었고 또 어떤 시간은 빨강을 쫓아 달리던 시간이었습니다. 돌아보면 설렘, 두근거림, 열정, 사랑, 뜨거움은 모두 빨강이 만들어낸 것들입니다. 발화하지 못한 빨강들은 모두 심장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심장 ct를 찍던 날, 모니터에 비친 꿈틀거리는 빨강을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는 빨강에 기대어 살아왔고, 살고 있음을, 빨강에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아쉬움이 남기 마련인 인생에서 지치지 않는 빨강처럼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고 싶습니다. 걷고 달리고 웅크리고 쉬고 쓰러지기도 하는 삶이지만 세상을 향한 희망과 기대,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온기를 잃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빨강 수집가의 시간』은 빨강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빨강이 전하는 말을 부지런히 받아 적은 흔적입니다. 물질문명의 시대에 결핍과 허기를 느끼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동굴 벽에 붉은 들소를 그렸던 구석기인의 마음으로 돌아가 마음 안에 잠복된 ‘빨강다움’을 깨우고 열정과 희망으로 삶을 마주하기를 그리하여 빨강이 삶의 불씨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미술사적 혹은 색채학적 전문 지식을 전달하려는 책이 아니라 빨강을 통한 위로, 성장과 치유, 인문학적 성찰에 바탕을 두고 자기 안의 빨강다움을 회복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빨강의 고백록이자 명상록인 『빨강 수집가의 시간』은 세부적으로 빨강의 기억, 빨강의 몸짓, 빨강의 흔적, 당신을 빨강하다, 빨강의 목소리, 빨강의 눈빛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쓴다는 것은 기원에 대한 정열을 갖는 일이다.

 글쓰기는 바닥에 도달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바닥은 언제나 또 다른 시작이다

따라서 쓴다는 것은 목적지에 가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목적지를 넘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에드몽 자베스 『질문의 책』     


  에드몽 자베스는 『질문의 책』에서 ‘쓴다는 것은 기원에 대한 정열을 갖는 일이며 글쓰기는 바닥에 도달하고자 하는 시도’라고 하였습니다. 쓰는 일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그리고 자신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넘어서기 위해서는 먼저 일어나야 하고 일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바닥을 알아야 합니다. 바닥은 언제나 또 다른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유폐된 나를 끌어내기 위하여, 오늘의 나를 넘어서기 위하여, 힘센 기억을 붙잡기 위하여, 뜨거운 심장의 언어를 받아 적기 위하여 깜박이는 커서를 좇아갑니다. 커서 끝에서 붉은 들소들이 뛰놀기 시작합니다. 타눔의 배를 타고, 태양신 라의 뒤를 쫓으며 뱅크시의 풍선을 따라 달립니다. 마티스의 붉은 방에서 세잔의 사과를 먹고, 붉은 노을 위로 종이비행기를 날리며 꽃무릇의 붉은 울음소리에 귀 기울이고 늦은 저녁 몬드리안의 붉은 나무 아래에 서 봅니다. 황홀한 규칙을 어긴 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동백의 추락에서 양귀비의 몸짓에서 확인합니다. 우리가 길이라고 부르는 망설임 앞에 수시로 머뭇거리고, 스스로 악기가 되어보고 빨간 옷을 입고 인생의 춤을 춥니다. 모든 것의 본질에 다다르기 위하여 여기는 아닌 지금은 아닌 곳에서 침묵의 체에 세상의 소리를 걸러보고 빨갛고 낡은 의자에 앉아 다카의 작은 어른들의 행복을 기원합니다. 당신 안의 성냥들에게 안부를 묻고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지를 생각합니다.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바라봅니다. 크루마우 지방의 빨래들이 바람에 흔들립니다. 

  어쩌면 아름다운 날들입니다. 사람들 속에 이글거리는 빨강을 봅니다. 당신과 나 그리고 우리, 익명의 빨강이 모여 온 세상을 빨갛게 달궈왔음을, 세상의 심장이 되어왔음을 깨닫습니다. 빨강이 내 안에서 깨어납니다. 빨강의 박동이 느껴집니다.

이제 당신을 던져야 할 때입니다. 당신의 바깥으로, 당신의 빨강 안으로.     

                                       이천이십사 번째 겨울

                                             당신의 려원          


 인생은 빨강으로 가득 찬 골목길이다, 어느 구비에선 빨강의 덫에 갇혀버렸고 또 어느 구비에선 빨강을 피해 필사적으로 달아났다. 또 어느 구비에서 빨강은 나를 외면했고 어느 구비에서 나는 빨강을 방관했다. 빨강 때문에 슬펐고, 빨강 때문에 기뻤고, 빨강 때문에 불안했고 빨강 때문에 확신에 차 있었다.  -본문 중-    

 

얼마나 많은 시간, 얼마나 많은 슬픔과 얼마나 많은 기쁨, 얼마나 많은 희열과 얼마나 많은 분노... 유한한 인생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주 우리 자신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인지.

나를 달궈주던 그 ‘빨강’ 하나 가슴에 품기 위해 쉼 없이 자판을 두드린다.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인정 받든 그렇지 못하든 그런 세상의 인식과는 별개로 스스로의 삶에 예의를 다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12월이다.   

  

쓴다는 것은 기원에 대한 정열을 갖는 일이다.

글쓰기는 바닥에 도달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바닥은 언제나 또 다른 시작이다

따라서 쓴다는 것은 목적지에 가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목적지를 넘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바닥에 도달하고자 하는 시도. 언제나 또 다른 바닥을 마주할 용기. 

멈추고 싶은 목적지를 기웃거리는 대신 끊임없이 목적지를 넘어서려는 몸짓이 내게는 중요하다.               


심장으로 돌아가라는 란쯔의 음악이 이토록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질문처럼 다가온다. 이제 나의 심장은 의심하지 않는다. 질문을 던지지도 않는다. 나이를 먹은 심장은 느리고 조용하다. 이제는 내가 잠든 심장을 깨우고 싶다...

완벽한 대칭이 아닌 하트 같은 그 심장으로 돌아가는 일, 뜨겁고 강렬했지만 어설프고 어리석기도 했던 그날의 심장으로, 영원한 휴식 전의 분주함이 계속되던 심장으로, 두근거림으로써 계속 살아있음을 증명해 주던 그 심장으로...  -본문 중-


우리는 언제나 뜨겁고 강렬했지만... 어설프고 어리석기도 했던 그 젊은 날의 심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무질서하게 두근거리던 그날의 심장으로... 

시간의 흐름 속에 ‘심장으로 돌아가라’는 정언명령 같은 문장을 다시 가슴에 새긴다.    

     


에필로그          

나는 늘 내가 쓴 글이 출간될 때쯤이면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글을 쓰고 싶어 했다

나는 죽고 더 이상 심판할 사람이 없기라도 할 것처럼 글쓰기,

진실이란 죽음과 연관되어서만 생겨난다고 믿는 것이 어쩌면 환상에 불과할지라도     

아니 에르노 『집착』     

  2022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글이 책으로 세상에 나올 때쯤이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글을 쓰고 싶다고 말합니다. 심판할 사람이 없기라도 할 것처럼 글을 쓴다는 말은 누군가의 심판을 뛰어넘을 정도의 완벽함을 이야기하려는 게 아닐까요.     


이미 종이 위에 씌어진 숲을 가로질러

이미 종이 위에 씌어진 노루는 어디로 달려가고 있는가?

....

하얀 종이 위에 도약을 위해 웅크리고 있는 글자들,

혹시라도 잘못 연결될 수 있고

나중에는 구제 불능이 될 수도 있는

겹겹으로 둘러싸인 문장들.(삭제)     

잉크 한 방울, 한 방울 속에는

꽤 많은 여분의 사냥꾼들이 눈을 가늘게 뜬 채 숨어있다.

그들은 언제라도 가파른 만년필을 따라 종이 위로 뛰어 내려가

사슴을 포위하고, 방아쇠를 당길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다.

......

만약 내가 명령만 내리면 이곳에선 영원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리라.

내 허락 없이는 나뭇잎 하나도 함부로 떨어지지 않을 테고,

말발굽 아래 풀잎이 짓이겨지는 일도 없으리라.     

그렇다, 이곳은 바로 그런 세상.

내 자유 의지가 운명을 지배하는 곳.

....

쓰는 즐거움.

지속의 가능성.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소멸해 가는 손의 또 다른 보복.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쓰는 즐거움> 부분     


  웅크린 글자들 사이 깜박이는 검은 눈이 있습니다.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검열자의 눈으로 세상의 흔적을 바라봅니다. 화면에 나타나는 환영들은 옹달샘 물을 마시는 노루였다가, 사냥꾼이었다가, 머리를 풀어헤친 거대한 나무였다가, 허공에 길을 내는 붉은 가슴 새였다가, 꽃을 따는 여인이었다가. 끝없이 길을 걷는 방랑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들의 운명은 자판을 두드리는 내 손가락에 있습니다. 그대로 둘 것인가 한참을 고민하다 DEL 키를 누르니 순식간에 활자들이 사라지고 빈 화면에 깜박이는 검은 점 하나 남습니다. 다음 명령을 기다리는 충직한 혹은 다음 명령을 강요하는 냉정한 검은 점이 때로는 부담스럽고 때로는 부끄럽습니다.     

  새의 등이 날개 속에 유폐되어 있듯 인간의 영혼은 언어 속에 유폐되어 있다고 하는데 빈약한 언어로 세상의 아름다움과 세상의 표정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 두려워집니다. 다만 언어로 표현되는 영혼들을 어설픈 언어의 덫에 가두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2022년 첫 산문집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을 출간하였던 때의 설렘. 기대를 떠올려봅니다. 저자의 손을 떠난 한 권의 책이 당신의 책꽂이에 정박하여 축제처럼 아름답고 죽음처럼 불가능한 기억으로 오래도록 간직되기를 바랐던 시간..... 손가락 끝에서 출발하여 책이라는 몸을 얻고, 세상 어딘가에 무사히 정박하여 누군가의 가슴에 닻을 내려주었다면, 누군가의 어깨에 날개가 되어주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빨강 수집가의 시간』은 손을 움직이고, 단어를 고르고, 잠깐 멈춰 주저하게 한 내 안의 빨강들이 만들어낸 흔적입니다. 이 책이 누군가의 가슴에 성냥이 되어주기를, 끝없이 타오르는 불꽃이 되어주기를 희망합니다. 빨강이란 말, 빨강 한다는 말, 빨강이 된다는 말 모두 아름다운 말입니다. 빨강이 입을 통해 발화될 때 세상도 나도 당신도 빨강의 힘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끝없이 빨강을 수집하러 길을 나섭니다. 빨강 신호등 앞에서 멈추고 빨강 우체통 앞에서 머뭇거립니다. 빨강 머플러의 여인을 바라보고, 빨강 장미 넝쿨 아래에서 빨강의 향기를 마십니다. 마음이 온통 빨강으로 물들어 갑니다.
 당신의 빨강은 또 어디에 있을까요?     

이천이십사 번째 겨울

당신의 려원          


* 삶을 불태우고 싶다면 먼저 자신을 불태우라               


멸종하고 있다는 것은

어떤 종의 울음소리가 사라져 간다는 것이다

나는 멸종하지 않을 것이다     

                 김경주 < 우주로 날아가는 방 5 > 부분      


 끝과 시작의 경계에 서 있다. 한 해의 끝과 다른 한 해의 시작은 닮아있다. 모든 것이 잠든 새벽.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딘가에선 대설 주의보가 내렸고 또 어딘가에선 봄날이다. 한해의 끝과 다른 한 해의 시작이 교차하는 지금, 누군가의 한 해는 대설주의보가 내렸고 폭풍이 몰아쳤으리라. 또 누군가의 한 해는 산뜻한 연둣빛이었을까? 또 누군가의 한 해는 매미의 여름 같았을까? 흩어지는 낙엽 같았을까? 안개 같았을까?

  봄, 여름, 가을, 겨울... 천둥 번개와 벼락, 소나기, 호우주의보, 대설 경보와 주의보 계절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하루에도 기상이변은 늘 존재한다. 지나가는 풍경일 뿐이라고, 언젠가는 끝날 거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이는 자는 인생의 내공이 뛰어난 자일 것이다. 대부분의 우리는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혜안을 갖지 못한다. 변화무쌍한 삶의 일기 속에 바라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망각하고 수시로 길을 잃고 허우적거린다.      

  다시 한 해의 끝에서 ‘삶을 불태우고 싶다면 먼저 자신을 불태우라’는 말을 생각한다. 자신을 불태울 용기가 없었기에 나의 삶은 원하는 만큼 타오르지 못했다. 어설프게 타다만 흔적들이 상처로 남았지만 다시 저 말이 주는 유혹에 나를 태우려 한다. 끝없이 삶에 질문을 던지고 싶은 나는 아직 용기가 남아있는 것이리라.     

 

모든 이별에 앞서가라, 마치 이별이

네 뒤에 있는 것처럼, 막 지나가는 겨울처럼.

겨울 중 어떤 것은 끝없는 겨울이라서

겨울을 나며 네 마음은 그냥 견뎌야 하리니.

....

존재하라 그리고 동시에 비존재가 그 조건임을 알아라

너의 내밀한 진동의 무한한 근거를 알아라,

그리하여 네 진동을 이번 한 번에 완수할 수 있도록.

                                 라이너 마리아 릴케 <모든 이별에 앞서가라> 부분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모든 이별에 앞서가라.’고 이야기한다. 모든 이별에 앞서갈 의지를 지닌 자, 이별이 뒤에 있는 것처럼 여기는 자는 이별이 오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이별에 앞서 가는 그에게는 끝도, 절망도, 허무함도 없다. 그러하기에 그는 기꺼이 자신을 불태울 사람이다.     

  바람이 불고 있다. 앙상한 가지만 남은 장미나무가 심하게 흔들린다. 앙상하고 보잘것없는 가지 속에 빨간 장미가 될 가능성이 숨어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바람 속에도 고요가 있지만. 장미의 마음에는 갈등이 피어오르고 있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장미는 이별에 앞서갈 생각을 한다. 다시 꽃 피우기 위해서.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D.H 로렌스는 문학의 가장 지고한 목표를 ‘떠나기, 도주하기, 지평선을 가로지르기, 다른 삶으로 스며들기’라 이야기했다. 한 해의 끝과 시작에서 나는 다시 문학이라는 장치를 빌어, 사실은 쓴다는 지극히 사소한 행위를 통해 어딘가로 떠나고 어딘가로 도주한다. 지평선을 가로질러 한계를 넘어서고 다른 삶으로 스며들기를 바란다. 다른 삶이란 결국 ‘나와는 다른 삶’이 아니라 ‘지금과는 다른 삶’이다. 나는 나를 끝내 던져버릴 수 없다. 다만 지금과는 다른 나를 만나야 한다.      

  볼품없는 것,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 그  어딘가에 숨은 가능성을 찾는 일...

바로 그것이 한 해의 끝에서 해야 할 일이 아닌가... 모든 이별에 앞서가기 위해서 날마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 끝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다.

        

차가운 바람 헤치고 볼 빨개진 채로 거침없이 달려온 ‘빨강’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이 한 권의  책 <빨강 수집가의 시간>이 많은 이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해 주기를, 끝없이 불 타오르기를, 우리의 심장을 쉼 없이 뒤흔들어주기를...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려원 산문집 2022년 8월/ 수필과 비평사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빨강 수집가의 시간> / 려원 산문집 /2024년 12월/ 수필과 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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