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chmitz cabrel Oct 27. 2024

겨울이 될 거야


눈에 관해서라면 저마다의 견해가 있다. 

좋고 싫고부터 시작해서 소복한 것이라면 좋다, 

진눈깨비만 아니라면, 내리는 것은 좋지만 녹는 것은 싫다 등등. 


나는 추위에 약한 것치고는 눈을 좋아하는 편이다. 아마도 열아홉 때까지는 하얗고 차가운 땅을 열렬하게 뒹굴며 한참을 놀 수 있었다. 나와 친구는 고3으로 보낼 일 년을 앞두고 함박눈을 맞으며 달렸다. 가로등이 켜진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단 둘이 그해 가장 많이 내렸던 눈을 맞으며 수영을 했다. 못난 눈사람을 만들고, 손이 시려 성기게 뭉칠 수밖에 없었던 눈송이를 서로에게 흩뿌렸다. 엄마들은 동네에서 같이 자란 우리가 대체 중3인지 고3인지 헷갈린다는 말을 반복해야 했다.  


내 몸의 체온은 대체로 낮은 편이라 여름에 필히 에어컨을 멀리하고, 겨울에 누구보다 패딩점퍼를 일찍 꺼내 입는다. 그러나 가장 싫은 계절이 겨울은 아니다. 오히려 겨울에 여행 가는 것을 즐긴다. 여행지에 눈이 많이 온다면, 꼭 내 기억에 남는 여행이 된다. 운이 아니었던지, 확률의 문제였든지 간에 눈이 온 여행은 많지 않았다.


대신 내게 고요히 눈이 내리던 밤이 있었다.


오 년도 더 전에, 추운 겨울의 일본 시골마을을 방문했다. 료칸의 내부가 꽤 넓어서 밖을 돌아다닐 필요가 있을까 고민했다. 나무 바닥 에 누워 마을의 추운 풍경을 보는 하루도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또 쓸데 없이 사진기로 방 안을 찍었다. 심플한 벽시계도 찍고, 정원이 보이는 창문을 찍고, 한기가 도는 마루도 찍고, 유카타를 입고 희미하게 웃는 A도 찍었다. 그날 밤에는 눈이 왔다. 그치지 않고 소리 없이 쌓여만 갔다. 눈이 내리는 모양을 자장가 삼아 잠이 들었다가 깨었다가 했다. 


아침인지 얼굴에 빛이 들었다. 눈을 비비고 창문으로 바짝 다가섰다가 차가운 유리에 물러섰지만, 나는 반사적으로 다시 유리창을 붙잡았다. 세상이 새하얬다. 아무도 쓸지 않고 밟지 않은 완전한 풍경이 참으로 따뜻했다. 그날 아침, 나는 여전히 유카타를 입고 자던 A를 흔들어 깨웠다. 그리고 억지로 옷을 껴입혀서 밖으로 밀어냈다.


하루의 일상을 시작하기 전의 거리는 역시 한가해서 우리는 부드럽게 쌓인 눈을 처음으로 밟을 수 있었다. 


눈이 앉은 도로를 찍고, 저 멀리 동산도 찍다가 입바람에도 부서지지 않는 다리 위의 눈에 손가락도 찍어보았다. 찬 기운을 먹은 검지를 A의 얼굴로 가져가니 A는 질색하며 말했다. 추워. 나는 눈을 업은 나무 밑에서 흐르는 냇물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눈 오는 날은 원 래 덜 추워. 물도 안 얼었잖아. A가 뭐라고 대답하려다 입김만 불길 래, 나는 A의 팔짱을 끼고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날 아침 산책 때 찍은 사진들에는 A는 없고 눈이 내린 풍경만 남았다. 



눈이란 건, 당연히 차갑지만 눈이 쌓인 모양은 그 반대의 온도를 가지고 있는 것만 같다. 어쩜 저렇게도 상냥하게 아스팔트 바닥을 덮고 있는지, 황량한 나뭇가지에 올라갔는지, 우리의 세상을 어루만지는지. 


그러니까 나는 눈이 따뜻해서 좋은 것이다. 추운 겨울에 오는 따스함이란 더운 여름보다도 훈훈해서 내 맘을 단숨에 사로잡아버린다. 그래서 만약 누군가가 너 사계절 중에서 어떤 계절이 될래, 라고 물으면 눈을 많이 내려도 된다는 전제하에 나는 백 퍼센트로 겨울이 될 거다. 그러면 내 발목까지 눈을 소복하게 내려서, 적당히 따뜻한 풍경을 온 겨울에 선사할 수 있을 테니까.

이전 05화 오차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